소설리스트

군상들의 무림 생존기-46화 (46/138)

46화

“우리는 죄인이오.”

“?”

중년사내가 입을 열었지만, 왕일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떠나온 곳에는 우리의 가족이 머물고 있소. 그들이 자유를 얻으려면 우리가 살아서 임무를 마쳐야만 하오. 그리고 그 임무에는 대장의 목숨을 살려야 한다는 것도 들어 있소. 대장이 죽는 날, 우리도 죽을 것이오.”

“어째서? 다시 온 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나?”

“돌아가거나 실종된다면 남아 있는 가족이 끔찍한 고문을 받다가 죽을 것이오.”

“무슨 죄를 지었지?”

왕일의 말에 중년인이 침묵했다.

“당신들이 전부인가?”

“총 삼백의 인원이 차출되었소.”

‘삼백이라… 그렇다면 최소 삼십 명은 더 있다는 소리군.’

자신에게 배정된 인원이 열 명이라는 것에서 나온 추론이었다.

“그중의 누구 하나라도 도망간다면 나온 이들의 가족과 남아 있는 사람들 전부가 죽는 것이오.”

삼백에 가족을 둘만 잡아도 육백이었다.

“얼마나 남아 있지?”

“총 삼천이백육십이 명이 남아 있소.”

아무리 악독하다고 하여도 삼천이 넘는 생명의 짐을 지고서 살아가기란 힘들 것이니, 지독한 족쇄였다.

하지만 인간이란 때때로 그보다 작인한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을 알기에 독을 복용시킨 것이리라.

‘이름이 없다면, 내가 지어주어야 하나?’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그들에게 이름을 줄 수밖에 없었다.

해서 천자문에서 따와 천은 당연히 중년인이었고, 나이순으로 이름을 짓자 마지막 월은 열다섯의 소년이 받았다.

‘이들의 무공을 봤을 때 나보다 더 뛰어난 이도 있다. 그런데 어째서 나에게 이들을 맡긴 것일까?’

아무리 궁리해도 그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로 가면 되지?”

“귀주.”

“그러니까 귀주로 가서 어디부터 들쑤셔야 하느냐고.”

“모르오. 우리는 대장과 함께 귀주로 올라가라는 것밖에는 들은 것이 없으니까.”

“가서 죽으라는 것인가? 귀주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 거기에 어떤 문파가 있고, 어디서 나온 이들이 있는지 아느냐 그거야.”

“모르오. 우리는 세상에 나온 것이 처음이오. 귀주가 어디를 가리키는지도 모르오.”

‘안내자인가?’

문득 왕일은 자신은 이들을 안내하는 역할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디서 살았는데?”

“알지 못하오.”

“누구에게 들은 사실도 없나?”

“바깥세상의 일을 얘기하는 것은 철저히 금기로 되어 있소. 만일 얘기하다가 적발되면 말한 사람과 들은 사람은 가족과 함께 처형되오.”

“으음…….”

삼천의 사람을 가둬놓고 마치 가축처럼 길렀단 말이었다.

“얼마나 살았는지도 모르겠네?”

“…….”

침묵은 긍정이라고 했지만,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이 중년인의 침묵은 부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자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말해줄 것 같았으면, 묻지 않아도 말해주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좋아. 그럼 죽으러 가볼까?”

그렇다.

이 길은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왕일도 귀주의 상황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었다.

마치 대문파들의 경연장 같은 곳이 귀주 아니던가.

삼십 년 전에 마교의 힘이 약해진 순간부터 발 빠르게 움직인 정파가 가장 공을 들인 곳이 귀주였다.

때문에 광서를 벗어나는 순간 이미 무림맹의 시야에 걸릴 수도 있었다.

왕일이 걸음을 떼자 열 명의 사람도 같이 움직였다.

“허망하군.”

진짜 웃긴 일이었다.

짧지 않은 생에 여러 일이 일어났지만, 그다지 좋은 일은 없었다.

그러더니 결국 지금에 와서는 죽음마저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만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나?”

“동조자를 구하는 것은 재량에 맡긴다 하였소.”

“그나마 다행이군.”

빨리 갈 생각은 없었다.

천천히 걷다보니 상념이 계속 떠올랐다.

‘이들은 마교에서 나온 이들이다. 삼백이라고 했으니 나와 같은 이들이 최소 삼십 명인데, 과연 그들 중 단 한 명도 마교에서 이 일을 획책했다고 발설하지 않을까?’

만일 그렇게 생각했다면 대단한 자만심인 것 같았다.

자신만 해도 석휘명이 걸리기는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정파에 이 일을 떠벌릴 수 있었으니까.

물론 독이라는 제약이 있기는 했지만, 해약도 받았기에 무림맹에서 그것을 연구해 독을 치료시켜 줄 수도 있었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왕일은 독에 대해서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았다.

***

귀주 서쪽, 운남과의 경계에 위치한 곳에서 일이 벌어졌다.

사천당가와 거래하던 백남표국의 인물들이 모조리 시체가 된 것이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정파의 속가가 운영하는 표국이 습격 받는가 하면, 그들과 거래하는 표국들도 정체 모를 누군가에 의해서 쑥대밭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치면서 화려하게 등장한 문파가 있었으니, 바로 혈마교라는 집단이었다.

놀랍게도 이 집단의 우두머리는 칠면염라 악불군이라는 자였는데, 마교의 부교주로 알려진 자였다.

그런 자가 수하를 거느리고 새로운 문파를 연 것이다.

오래전부터 악불군과 교주 사이에 골이 있다는 것은 정파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예전 구양신마의 경우처럼 서로 상잔하는 것을 기대한 정파는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둘러 소집한 무림맹 수뇌들 사이에서 이것은 마교의 간악한 음모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그것으로 마교를 압박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가만히 있는 마교를 자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 일로 마교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악불군이 마교를 나간 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고 그를 마교에서 축출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악불군이 벌이는 모든 것은 그의 책임이라는 것도 같이 공표하였다.

그러자 정파에서는 차라리 각개격파를 노리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다.

악불군이 마교에서 목적을 가지고 나왔든 아니든 간에 따로 떨어진 것은 맞으니, 이 기회에 마교의 힘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이의 시선이 귀주로 쏠린 상황에, 광서에서 산발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된 그들의 공격은 서쪽에서 몰아치는 악불군의 진격과 맞추어 무림맹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남쪽에서 귀주로 올라오는 이들의 준동이 시작됨과 동시에 악불군의 진격은 멈추었고, 그곳을 세력권으로 만드는데 주력하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무림맹은 일단 악불군을 제쳐두고 산발적으로 공격하는 이들을 먼저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악불군을 돕기 위해 움직였지만, 완전히 눈 가리고 아옹이었다.

그들이 마교의 주구라는 것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정작 숨죽인 마교는 호남에 은밀히 사람들을 보내고 있었다.

***

“헉, 헉… 모두 괜찮아?”

왕일의 물음에 천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진짜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같이 부상을 입었고, 심한 이는 옆구리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그 상처를 입은 이가 천이었는데, 다른 이들을 구하려다가 입은 상처였다.

그런 상처에도 불구하고 천은 지혈만 하고 다른 이들의 상처를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천의 몸에 그런 상처들이 최소 세 군데는 더 있다는 것을 왕일은 알고 있었다.

‘지독한 놈들이군.’

왕일 자신이야 불가사의한 신체 덕분에 버틸 수 있다지만, 이들 열 명은 그야말로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벗어나서 휴식을 취한다.”

혈향이 감도는 이곳은 막 전투가 끝난 곳이었다.

널브러진 삼십여 구의 시체를 등지고 떠나는 이들은 왕일과 열 명의 수하였다.

지금 무림맹의 시야는 귀주의 남서쪽인 흥인현에 거의 모여 있는 상태였다.

그곳에서 혈마교가 발호했고, 남쪽에서 시작된 산발적인 움직임들도 그곳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패잔병이 본진을 향하듯 시체를 양산하며 일제히 그곳을 목표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일부는 이미 죽었고, 일부는 다른 세력을 규합해 좀 더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그래도 아직 십여 단체가 살아서 흥인현으로 몰려가고 있었고, 이런 것들을 알게 된 것은 왕일이 귀주에 들어서면서였다.

많은 이들의 부산한 움직임과 난리라도 난 것 같은 사람들의 긴장감.

귀주는 이미 전장이었다.

그들에 대한 정보를 얻음과 동시에 그들이 자신과 같은 처지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속에 뒤늦게 뛰어든 왕일은 결정을 해야 했다.

다른 이들처럼 흥인현을 목표로 움직일 것인가, 아니면 복면인이 말한 것처럼 위로 전진할 것인가.

결정을 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일단 사태를 주시하면서 주위를 정찰했는데, 보이는 것은 승도속의 인물로 구성된 무림인들이요, 하나같이 정기를 뿜는 무사들이었다.

그들의 수는 적었지만, 우르르 몰려다니는 낭인보다 더욱 위험하게 다가왔다.

왕일과 열 명의 수하가 주목을 받지 않는 것은 그렇게 움직이는 낭인들 때문이었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행동을 조심하면서 올라가다보니 여운현까지 오게 되었다.

이대로 올라간다면 귀주와 호남의 경계에 이를 것이지만 이렇게 무턱대고 그냥 올라갈 수만은 없었다.

복면인은 분명 지금 난리를 치는 이들처럼 분란을 일으키라고 주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작은 문파만을 골라서 공격했고, 그들을 회유하거나 흡수하려는 노력은 포기했다.

그러다가는 정도 무림맹의 무사들에게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처음 한두 개는 주목 받지 못했지만, 그것이 다섯 개가 넘어가면서 무림맹의 시야에 걸리고 말았다.

낭인들이 하도 많이 귀주에 몰렸기 때문에 처음에는 으레 그중에 섞인 망나니들이 벌인 일이라고 치부했었고, 실제로 그런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개방의 시선은 그들을 놓치지 않았고, 그들을 목격한 개방도를 죽임과 동시에 개방의 이목에 걸려들었다.

결국 십여 명으로 구성된 추적대와 마주쳤고 그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러자 이번에는 삼십여 명으로 구성된 추적대가 쫓아왔다.

지금 이곳에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다행히 추적자들의 무위가 높지 않았고, 고수가 한 명에 불과해서 목숨은 부지했지만, 이 행운이 얼마나 갈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제는 진짜 고수가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추적대와 싸운 곳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동굴에 왕일을 비롯한 이들이 지친 몸을 뉘이고는 쉬고 있었다.

‘누굴까?’

한쪽에서 운기를 마치고 일어서는 천의 모습을 보면서 궁금증이 일었다.

자신의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챙기는 그는, 왕일의 예상을 깨는 무위를 보여주었다.

삼십여 명의 추적대를 이끌던 무사는 왕일이 대적하기에 부담이 되는 무사였다.

날카로운 검기를 뿌려대며 사방에서 채찍과 같이 검을 휘두르는 무사는 마치 왕일과 천적 관계에 있는 것 같았다.

최대한 무기와 충돌을 피하며 허점을 노려 검을 날린 덕분에 왕일은 몸 여기저기에 적지 않은 검상을 입었었다.

속도도 왕일이 따라가기에 벅찰 정도였다.

그런 그가 막 왕일의 복부에 검을 쑤셔 넣으려는 찰나 그 검을 막으며 무사의 목을 날려버린 것이 천이었다.

덕분에 옆구리에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그 상황에서도 천은 기습적으로 자신을 공격한 이를 단숨에 반으로 갈라버렸다.

그 매끄러울 정도의 움직임은 아직 왕일에게는 요원한 경지였다.

만일 천 혼자 그들 삼십여 명을 상대했다면, 오히려 부상을 입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저씨…….”

“참아라. 널 위해서가 아니라, 네 동생들을 위해서.”

가장 나이가 어린 월의 팔에 옷을 찢어 상처를 감싼 천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하였고, 천을 바라보는 모두의 눈 속에는 그런 천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천.”

“예.”

왕일이 부르자 천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고, 다른 이들은 운공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이곳에서 위로 올라가면 호남이지만, 그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호남성의 땅이 귀주를 바늘처럼 살짝 찌른 형태였다.

하지만 그 길이가 길었기에 호남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우회한다면 무림맹의 추격을 따돌리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 호남에 들어 가려다가는 군에 걸릴 확률도 높았다.

“관문 쪽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회해야 하나?”

“예.”

귀주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얘기였다.

쫓기다보니 정보를 얻을 수 없었고, 남서쪽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쏴아아아아아.

밖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행운이군.’

쫓기는 입장의 왕일에게 귀주는 천혜의 은신처였다.

산지가 거의 대부분인 귀주는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 더 적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비로 왕일 등의 흔적이 지워질 테니, 시간을 번 셈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는 법이 없었다.

짧은 시간이라도 운공을 하여 몸을 풀어주었고, 달리는 와중에도 풀을 뜯어먹으며 그것으로 배를 채웠다.

열매라도 만난다면 더 없이 좋은 음식이 되었다.

불을 피울 수가 없었기에 작음 들짐승이 있었지만, 잡을 수 없었다.

왕일이 비를 바라보고만 있자 천도 운공을 시작했다.

***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지?’

귀주에 들어와 처음 문파를 치기 위해 들어간 날이 떠올랐다.

누구인지도,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무가라 생각했기에 그저 도를 들고서 천 등과 함께 담을 넘었다.

왕일도 입을 다물었고, 천 등도 원체 말이 없었기에 그들의 습격은 조용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처음 비명이 들린 것은 막내 월이 단숨에 목을 자르지 못해서였다.

그 뒤로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얼마 가지 않았다.

워낙 사람도 적었고, 왕일을 비롯한 습격자들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자신을 향해 검을 들고 달려들던 이를 죽인 왕일이 천 등과 함께 장원을 빠져나가려는 그때, 열려진 문틈으로 여인과 아이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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