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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45화 (45/138)

45화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연전연승할 때는 무림의 고수라도 된 것 같았으나, 현실은 애송이였다.

그것도 누군가의 심부름꾼 노릇이나 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없구나.’

지금이라도 무림에 자신들이 청하도법이라는 무서를 가지고 있다고 소문낸다면, 정도객 하만성이 나서기도 전에 소리 소문 없이 죽을 것이었다.

보물은 언제나 피를 몰고 다녔으니까.

***

“어서 오십시오.”

진승한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어디 있어?”

“기다리고 계십니다.”

찾아온 이는 하얗다 못해 투명하게까지 보이는 손을 가진 서른 초반의 여인, 바로 옥골음희 화영영이었다.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있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닌 듯싶었다.

“허허허, 오셨는가?”

“무슨 짓이지?”

“자, 일단 앉게.”

화영영을 반갑게 맞은 남찬우가 차를 준비하려 했다.

“차 따윈 필요 없어. 무슨 의도로 흑랑문을 멸문시켰는지 그것에 대해 말해봐!”

쾅!

화영영이 탁자를 내리치자 남찬우가 혀를 찼다.

“쯧쯧, 그만 하면 되지 않았는가?”

“놈의 목숨은 내 거라고 분명히 얘기했을 텐데?”

“일이 그렇게 되었네. 자네가 그곳에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겠지.”

“내가 개입했다고 누가 그래?”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잡아뗄 텐가?”

“흥! 잘도 대처했더군.”

“미리 알려주었네. 자네가 보낸 아이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라고 말이네.”

“그 왕일이라는 놈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일이 좀 급해졌다는 것이 옳은 말일 걸세.”

“응?”

“악불군이 움직였네.”

“그놈이?”

칠면염라 악불군.

마교의 부교주로 온건파인 교주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인물이었고, 중원을 향해 칼을 뽑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은밀하게 동조자를 모으고 있는 것 같은데, 차라리 이번 기회에 그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하였네.”

“주군은 대를 이어서 그런 놈과 마주하는군.”

“이번에는 특히 나쁘지. 그때는 선대교주님을 지지하는 이들이 더 많아서 구양신마를 물리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애들을 내보낸 거야?”

“그러네.”

“얼마나 내보냈는데?”

“삼백.”

왕일에게 할당된 인원이 열 명이었다.

그렇다면 왕일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가 삼십 명은 된다는 말이었다.

“삼백? 그런데도 나한테는 일언반구도 없었단 말이야?”

그들만 삼백이었지, 나간 인원은 더 많았다.

“어차피 소모품이지 않은가. 그리고 자네는 모르겠지만, 은밀하게 악불군을 비롯해 그를 지지하는 이들도 같이 나간 지 오래되었네.”

“뭐? 정말? 어쩐지 요새 교가 조용한 것 같더라니.”

“그러게 무슨 대단한 것을 익힌다고 그렇게 폐관을 자주하는가? 장로들이 모두 모이는 회합에도 한번 참석하지 않고.”

“성공할 것 같아?”

“결과에 따라 다르겠지. 찔러봐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면 일단 귀주가 혼란스러운 사이 호남을 도모하면 되겠지. 성공하면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고, 실패한다고 해도 악불군이 모든 것을 감당할 것이니 손해는 없지 않겠는가?”

구양신마가 일으킨 하극상으로 인해 마교의 입지는 상당히 좁아졌다.

사실 귀주와 호남에는 마교의 분타가 몇 개씩 있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때 이후로는 광서에 꼭꼭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다.

“주군이 마음을 바꿀까?”

“주군도 나가는 것에는 찬성하는 입장이시네. 다만 그 시기가 문제이지.”

삼십 년의 세월은 마교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뭘 그렇게 신경 쓰시는 것이지?”

“그 속을 어찌 알겠나? 다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네. 그렇지 않다면 부교주와 사이가 틀어지는 것을 감수하면서 극구 중원 진출을 막을 이유가 없으니.”

“흥! 능구렁이 같으니.”

“어허, 어찌 주군께 그리 경망되게 말하는가?”

“뭘? 없는 곳인데.”

“쯧쯧.”

화영영의 태도에 혀를 차던 남찬우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어떤가? 이 기회에 칩거를 깨고 호남을 한번 맡아보는 것이.”

“일 없어.”

“교에 적을 둔 장로라면 한번쯤 교를 위해서 나서보게나.”

“흥!”

“그나저나 묘한 것이 적혀 있더군.”

말하면서 전서를 꺼낸 남찬우가 그것을 화영영에게 건넸다.

“뇌정지기?”

전서를 보는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일단 확인해본 결과로는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했네만, 어떤가? 직접 확인해보겠는가?”

“…….”

“나쁠 것은 없지 않나? 더구나 싱싱한 젊은 놈이니 말이네.”

“뭐야?”

“아, 아닐세. 내 실언을 했구먼.”

손사래를 치는 남찬우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 깃들어 있었다.

그런 남찬우를 향해 화영영이 눈을 흘기고는 홱 하니 돌아서 나가버렸다.

‘쯧쯧,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게 한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군.’

양세문이 벽력권 정대만의 무공을 가지고 있다고 임소명에게 말해준 것이 화영영의 수하였다.

또한 양세문이 정대만의 무서를 발견하게 도운 것도, 그리고 임소명을 조종하여 양문세를 감금하게 만든 것도 그녀의 수하였다.

양세문이 십오륙 년 전에 화영영에게 찍히게 된 사연은 별것 아니었다.

아니, 여인에게는 수치일망정 그렇게 십여 년을 사위에게 온갖 멸시를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차라리 단칼에 죽였다면 이해하기 편했으리라.

‘알몸을 훔쳐 본 죄 치고는 무겁군.’

그것을 본 것이 양세문의 일생일대의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러고도 목숨을 부지하고 빠져나간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물론 그 행운은 결국 파멸이라는 결과로 돌아왔지만…….

‘숨어 있으려면 잘 숨어 있을 것이지, 그따위 짓을 하고 돌아다니다니. 그리고 올 곳이 없어 이곳으로 기어 들어와? 미친놈.’

화영영은 양세문의 제자이자 사위인 임소명이 광서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양세문의 종적을 놓쳤을 때부터 그를 감시하였고, 마침내 양세문이 나타나자 계획을 실행한 것이다.

그녀는 결코 양세문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쉽게 죽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접근한 것이 임소명이었다.

원래 욕심 많고 이기적이던 임소명을 조종하는 것은 쉬웠다.

‘그나마 미리 알고 방비한 덕에 왕일 그놈을 살릴 수 있었지, 아니었다면 후회할 뻔 했어.’

왕일이 언젠가 삼강현을 치고 나올 때를 위해 임소명의 주위에 사람을 심어두었었다.

그리고 화영영의 수하가 왕일이 임소명을 죽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을 눈치 챈 남찬우의 심복이 그것을 막은 것이다.

남찬우는 이 기회에 양세문에게도 죽음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충분히 벌을 받았고, 또한 화영영이 더 이상 과거에 사로잡혀 망가지는 것을 볼 수 없었기에.

“뇌정지기라? 정말 익혔을까? 그녀를 위해서는 제발 그렇게 되어야 하건만…….”

화영영의 상태는 조금씩 나빠지는 중이었다.

“이놈이 무엇을 알고 있으려나?”

남찬우가 내려다보는 다른 전서에는 석휘명을 데려오는 중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청하도법 말고 숨기는 것이 무얼까?”

캘수록 재미있는 놈들이었다.

“또 어떤 비밀이 있는지 궁금해지는군.”

석휘명의 앞날도 예측하기 힘들 것 같았다.

과연 석휘명이 이것을 노리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이루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석휘명과 같은 처지로 마교로 향하는 이들은 귀주와 인접한 곳에서 많았지만, 마교에 도착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아니, 석휘명이 유일하였다.

나머지는 모두 죽임을 당했으니까.

“사부님.”

화영영이 나가고 진승한이 남찬우를 찾았다.“그래, 일은 잘 진행되고 있느냐?”

“예.”

“과연 정파 놈들이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하구나.”

“그런데, 그 왕일이라는 놈과 석휘명이라는 놈에게 너무 특혜를 베푸는 것이 아닙니까?”

“특혜라? 너는 궁금하지 않느냐? 그놈들이 쥐고 있는 비밀 말이다.”

다른 이들과 같은 조건이 아니었다.

“서른 명 중에서 가장 늦게 출발했으니 그만큼 생존율도 높을 것인데, 놈에게 보낸 쓰레기는 쓰레기라고 하더라도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놈을 붙여주셨고 말입니다.”

“그 아이의 일은 이제 그만 잊어버리고, 석휘명이란 놈이 오는 즉시 내게로 보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악불군과 더불어 마교의 실세를 쥐고 있는 남찬우가 왕일과 석휘명에게 흥미를 보이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는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이었다.

“그나저나 그놈들이 하만성의 비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그렇구나. 당시 나를 지독하게 쫓던 놈의 제자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이가 광서로 와서 내 감시망에 걸리다니 말이다.”

남찬우가 자신을 이용하려고 배신한 이들을 죽인 일로 정파의 추격을 당할 때, 가장 적극적으로 쫓던 이가 바로 정도객 하만성이었다.

“설마 죽였겠습니까? 아마도 우연히 주운 것일 것입니다.”

“이제 곧 알게 되겠지.”

“그나저나 놈이 사부님의 눈에 들려고 그것을 일부러 보였을까요?”

“글쎄, 그것도 놈이 와봐야 알겠구나. 그런 비급을 함부로 굴릴 정도로 어수룩한 놈이 아니었으니, 뭔가 생각을 하고 나를 자극했겠지.”

눈을 빛내는 남찬우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

“무… 문주님?”

정문을 지키고 있던 위사가 눈이 둥그레져서 왕일을 바라보았는데, 죽었다고 생각한 왕일이 살아 돌아온 것에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일은 아무 말 없이 문을 지나서 석휘명의 거처로 향했다.

그 중간에 만나는 이마다 놀란 표정을 했지만, 섣불리 다가오거나 말을 걸지는 않았다.

다만 저희끼리 웅성거리며 왕일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왕일이 석휘명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그 안에서 천오가 뛰어나왔다.

그도 밖에서 이는 소란을 눈치 챈 것이었다.

그리고 왕일을 본 그도 눈을 크게 뜨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처음이군.’

왕일이 본, 천오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첫 번째 진실 된 표정 이었다.

“휘명은?”

“대인은 안 계십니다.”

“언제 나갔는지 아나?”

“그것이…….”

말끝을 흐리며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것이 아마도 석휘명에게 아무런 귀띔도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들이 일 처리를 허투루 할 리가 없겠지.’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온 것입니까?”

천오는 궁금했겠지만, 왕일은 그것을 가르쳐줄 생각이 없었다.

“흑랑문과 혈호문은 멸망했으니까, 발 빠르게 움직여서 그곳을 차지하든가 아니면 여기만 지키든가는 알아서 하도록.”

“예?”

“아, 혈호문은 아직 잔당이 남았을지도 모르겠군. 아무튼 혈호문의 문주는 죽었으니 그리 알고. 나도 이제 떠날 테니까, 이곳은 부문주가 지키고.”

밑도 끝도 없는 얘기였다.

“무슨…….”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모든 것은 부문주가 결정하도록.”

그 말을 마지막으로 왕일이 몸을 돌렸지만, 뒤에 남은 천오는 현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기에 움직일 수 없었다.

천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석휘명이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기에 그는 그전에 내려진 명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혈문을 지키고, 키우는 것.

그것은 천오가 멸혼방의 살수이기 때문이었다.

혈문을 나선 왕일이 마을 근처의 산으로 올라가자, 열 명의 복면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그들과는 말도 섞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왕일이 이곳으로 오자 쫓아왔던 것이다.

복면인들을 힐끔 바라본 왕일이 도를 땅에 박더니 자리에 앉았다.

‘마교로 들어갔을까?’

혹시나 하고 들러봤는데, 석휘명은 역시 없었다.

그리고 천오의 행동으로 봐서는 그것이 급작스럽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왕일이 우두커니 서있는 열 명의 복면인들을 바라보았다.

“벗어봐.”

왕일이 말하자 그들은 순순히 복면을 벗었는데, 사십대부터 이십대까지, 아니 더 어려 보이는 이도 있었다.

‘이들은 진짜 내 명령에 따르는 것일까, 아니면 나를 감시하는 역할일까?’

“이름은?”

“없소.”

사십대의 장한이 나서며 말했다.

그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맡은 임무는?”

“대장의 감시와 대장의 목적을 도우는 것.”

“내 목적이 뭔데?”

아직 자신도 잘 모르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 복면인은 그저 귀주에 가서 분탕질을 치라고 말한 것 외에는 없었으니까.

“귀주의 잠식.”

“하아~”

말이 귀주의 잠식이지 가서 죽으라는 말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들을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있다고 하여도 문제였다.

자신이 먹은 단약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마교에서 준 것이니 필시 허튼 것은 아니리라.

“모두 단약을 먹었나?”

왕일의 말에 열 명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들은 그 단약보다도 더한 것이 얽어매고 있었다.

단약을 먹지 않아도 따라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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