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상들의 무림 생존기-44화 (44/138)

44화

‘뇌정지기를 익혔을까?’

만일 그렇다면 산공독이나 무기에 발라졌던 독에 당하고도 쓰러지지 않는 것이 설명되었다.

뇌정지기는 그야말로 양강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것이었으니, 어지간한 독은 자체로 해독해버렸다.

뇌정지기를 익히고도 멀쩡한 몸이라면 특별한 방법이 있을 것이었다.

“쩝!”

입맛을 다셨지만, 이미 왕일은 그의 손아귀에서 멀어진 상태였다.

‘그분은 이것을 알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인가?’

안령이 의문을 느낄 때, 임소명이 수하들을 불렀다.

“이놈을 창고에 가둬두어라!”

임소명의 말에 무사 둘이 오더니 왕일을 짊어지고는 어딘가로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임소명이 땅에 떨어진 왕일의 도를 주워 들다가 그 무게에 놀랐다.

“헉! 이런, 이렇게 무거운 것이었다니…….”

그 모습을 보던 안령이 아차 했다.

소문난 혈안독마의 도였다.

주변에 그 강도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맞는다면 틀림없는 최상품의 도였다.

비록 날이 서지 않은 것 같았지만, 날이야 세우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축하드리오.”

먼저 줍는 놈이 임자였다.

괜히 도 하나로 인해서 임소명과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임소명의 소굴인 흑랑문이었다.

자칫 그가 딴마음을 먹는다면 안령 자신도 위험했다.

“고맙소이다. 자, 그럼 안에 들어가서 술이나 한잔 할까요?”

임소명이 안령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날의 소동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

창고에 꽁꽁 묶인 채 쓰러진 왕일은 스스로가 한심했다.

‘이게 무슨 꼴이냐! 천방지축 날뛰다가 어이없이 잡힌 꼴이라니…….’

도전해오는 이들을 모두 죽이면서 자만한 것은 사실이었다.

내심 한철진과의 승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것은 왕일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왕일이 내공을 가진 사람처럼 오감이 뛰어나고 괴력을 발휘하지만, 사실은 내공을 운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를 운용하는 무사들을 죽이는 것을 봐온 혈문의 무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석휘명조차 잊고 있었다.

내공을 돌릴 줄만 알았다면 그물에 갇히는 신세는 면했을 것이었다.

차라리 던져진 것이 집채만 한 바위였다면 그것을 부술 힘은 있었지만, 유연한 밧줄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왕일의 무위가 발휘되는 순간은 상대의 무기와 부딪쳐 그 내공을 이용하는 순간이었다.

이전 싸움만 해도 내공이 없는 이들과의 싸움에서는 상대의 무기를 부러뜨리거나, 몸을 때려도 잘리지 않고 뼈가 부러지거나 뒤로 튕겨 나가기만 했었다.

오히려 상대의 내공이 강할수록 힘을 발휘하는 왕일이었다.

익숙해지면 사소한 것은 잊는다고 하던가?

왕일과 석휘명 모두의 실수였다.

‘응?’

자책을 거듭하던 왕일은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누구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인물의 기척을 느끼자 희망이 생겼다.

적지에서 이렇게 접근해오는 인물이라면 그와 같은 편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혹시, 천오인가?’

왕일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복면을 쓰고 야행의를 입은 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혈을 제압당해 상대의 기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쉿! 조용히 해라.

들어온 인물이 왕일을 들쳐 메더니 창고를 벗어나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것이지?’

흑랑문을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숙이 들어왔다.

그리곤 한 전각에 들어오더니 비밀 장소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보이는 것이 엉덩이뿐이라 왕일은 이 인물이 누군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그긍.

밀실로 생각되는 곳이 육중한 굉음을 울리며 열렸고, 그곳을 통해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뿐이었다.

속을 뒤집을 것 같은 냄새가 풍겼고, 흔들리는 횃불이 장내를 밝히고 있었다.

철컹, 철컹.

손목에 쇠고랑이 채워지고 대롱대롱 매달린 왕일의 눈에 드디어 문제의 인물이 보였다.

복면을 벗자 드러나는 얼굴은 곱게 늙은 중년인이었다.

자신을 죽일 듯이 두들겨 패던.

‘이놈은 임소명?’

어째서 자신의 문파에서 이리 은밀하게 행사를 하는지 왕일로서는 의문이었다.

“클클클. 그분은 네놈을 살려두라고만 하셨다. 고로 살아있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분?’

“자, 네놈이 익히고 있는 심법에 대해 말해보아라.”

“…….”

임소명이 아혈을 풀어주었지만, 왕일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큭!”

다음 순간 왕일의 몸을 강타한 것은 다름 아닌 왕일 자신의 도였다.

혁소명의 손에 들려 휘둘러지는 자신의 병기를 보는 왕일은 고통보다 착잡함을 느꼈다.

“으음……”

이번 신음소리는 왕일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신음소리를 따라 왕일이 고개를 돌리자 발목을 쇠사슬에 묶인 추레한 몰골의 노인이 보였다.

“이, 이놈…….”

기력이 쇠한 늙은이의 목소리.

그곳에 담긴 것은 절망과 원망이었다.

“사부, 오늘은 당신을 괴롭히러 온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천벌을 받을 놈!”

“흥! 아직도 그따위 소리나 하고 있다니, 독한 늙은이! 나도 더 이상은 기다려줄 수 없으니 알아서 해!”

“절대… 절대 내게서 그것을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닥쳐!”

왕일이 듣는 것을 경계하는 것인지 임소명이 서둘러 노인에게 다가가 점혈을 해버렸다.

‘사부?’

그렇다.

지금 저 추레한 몰골의 사람이 바로 임소명의 사부인 금강도 양세문이었던 것이다.

양세문을 점혈한 임소명이 다시 왕일에게로 다가왔다.

“네놈도 저 꼴이 되고 싶으냐?”

한쪽 팔은 잘렸고, 한쪽 다리도 무릎 아래가 없었다.

멀쩡한 팔과 다리도 온전하지 않았다.

발가락은 모조리 잘렸으며, 손가락도 그 길이가 천차만별이었다.

눈은 인두로 지진 것 같았는데, 눈꺼풀이 아래위로 완전히 붙어 있었다.

이 몰골을 하고도 살아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자, 곱게 심법을 불겠느냐, 아니면 저 꼴이 되고 난 후에 불겠느냐?”

품속에서 잘 갈린 소도를 꺼낸 임소명이 그것을 핥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

“거기까지.”

낮게 들리는 음성.

그 음성을 듣자마자 임소명의 신형이 굳었다.

횃불이 미처 밝히지 못한 구석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그림자.

검은 복면에 검은 야행의를 입은 남자를 보는 임소명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는데, 복면에 그려진 붉은 해골 문양이 섬뜩했다.

“헉! 어… 언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건조한 음성을 들은 임소명이 그대로 엎드렸다.

약간 칼칼한 음성이었는데, 그것으로는 몇 살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그리고 놈을 사로잡으라고만 하셨지 않습니까?”

“욕심이 나셨다?”

“그, 그게… 하,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엎드린 임소명과 쓰러져 있는 양세문을 바라보던 복면인이 그대로 발을 들어 임소명의 머리에 올렸다.

“네가 할 일은 끝난 것 같구나.”

“……!”

퍽!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벌레를 죽인다고 해도 그보다는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임소명을 처리한 복면인이 왕일을 바라보았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냐?”

“…….”

“이놈은 십여 년 동안 한 가지를 얻기 위해 사부이자 장인인 이자를 고문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쓰러진 양세문의 머리를 임소명과 마찬가지로 밟아서 부숴버리며 복면인이 물었지만 왕일의 대답을 기다린 것 같지는 않았다.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으니까.

“바로 벽력권 정대만의 무공이지. 이름은 들어보았느냐?”

여전히 왕일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 벽력권 정대만을 죽인 이가 누군지 아느냐? 바로 내 사부였다. 이놈들이 끝까지 숨기고자 한 것과, 알아내고자 한 것들이 나에게는 쓸모없는 것들에 불과했다는 소리다.”

“무슨 소리지?”

“이게 무림이라는 거다. 하수가 용을 쓰고 얻으려는 것도 고수의 입장에서는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듣고 보니 정말 허망한 말이었다.

십여 년을 사부이자 장인인 양세문을 고문하는 폐륜까지 저질렀건만, 그런 것들이 복면인에게는 하잘것없는 것들이었다.

“뇌정지기? 풋!”

매달린 왕일의 몸을 살펴보던 복면인이 코웃음을 쳤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막혀 있는 혈도들을 확인했기에 의문이 들었다.

“흠… 이런 몸으로 여태 그렇게 싸워왔던가? 나도 네놈이 익히고 있는 심법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는구나.”

눈을 빛낸 복면인이었지만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왕일의 팔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손짓 한 번에 끊은 복면인이 밀실의 문을 열었다.

“따라오너라.”

말을 마치고 먼저 밀실을 벗어나는 복면인의 뒤를 따라서 왕일도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외에는 없었다.

크악! 사, 살려줘!

문이 열리고 석실을 벗어나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전각을 올라가 이 층에 닿은 복면인과 왕일의 눈에 아비규환의 참상이 보였는데, 다수의 복면인들이 돌아다니며 흑랑문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있었다.

“제 분수를 모르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해를 끼치는 법이지.”

덤덤한 목소리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왕일의 눈에 아이의 손을 잡고 빠져나가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서 바람처럼 내달리는 복면인도 보였다.

복면인의 검이 허공을 갈랐고, 이내 여인의 머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뒤이어 겁을 먹고 울먹이는 아이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검.

그 모습에 왕일이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순간적이었다.

“이게 무림이다.”

복면인의 말에 왕일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평온한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는 무수한 죽음이 자리하고 있지. 지금 이 순간 중원 전체에서 사라지는 목숨이 얼마나 될 것 같으냐? 자연사하는 인간을 빼고도 최소한 수백, 수천의 목숨이 덧없이 끝나고 있을 것이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질문한 왕일을 향해 복면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널 뭘 보고 일을 맡기시려는 것인지…….”

애매한 대답이었다.

그렇지만 이 대답으로 최소한 한 가지는 알게 되었다.

이 복면인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그를 구하러 왔다는 것과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

이내 비명소리가 가라앉고 살육을 벌이던 복면인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정확히 열 명이었다.

“이들을 너에게 주겠다.”

“……!”

왕일로서는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이들의 움직임을 보아서는 최소한 자신과 동급이거나 강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할 일은 나아갈 방향을 귀주로 잡는 것이다. 본교가 있는 쪽이 아닌.”

“귀주?”

귀주는 그다지 큰 방파가 없이, 각 대문파의 지부가 난립한 곳이었다.

특별한 문파가 세를 떨치지 못하는 곳.

그보다 ‘본교’라고 했다. 그렇다면 마교에서 나왔다는 말이 되었다.

‘마교의 인물이었나?’

한 가지 의문은 해소되었다.

이 복면인이 바로 왕일 자신을 감시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복면인이 혈을 풀어주며 기감도 돌아왔기에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한데, 어째서 나를 감시했고 귀주를 향해 이를 드러내라는 것일까? 혹시…….’

“나 혼자요?”

“클클클, 그래도 눈치는 있는 놈이구나. 가다보면 알게 될 일이다. 가겠느냐?”

귀주에 대문파가 없다고 해서 쉽게 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구파일방으로 대변되는 이들의 분파와 지부, 그리고 중원의 이름 있는 표국들의 지국이 우후죽순처럼 자리한 곳이 바로 귀주였다.

거기다 운남과 사천, 호남을 잇는 곳이기에 물류가 활발히 이동하였고, 산지가 대부분이었기에 녹림도도 많이 자리한 곳이었다.

또한 마교가 있는 광서와 인접해 있어서 무림맹의 인물들도 부지기수였다.

“어디까지 가면 되오?”

“갈 수 있는 데까지.”

“너무 많이 가르쳐준 것 아니오?”

“크하하하하하! 많이 알려줬다?”

어찌 보면 마교의 무림침공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일 왕일이 마교의 사주를 받고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무림맹에 알려진다면 큰 파장이 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튼 살고 싶다면 열심히 하도록 해라. 네가 살아남으면 그때 모든 궁금증이 풀어질 것이니.”

-솔직히 너희 따위가 폭풍도 장우석을 죽였다는 것은 의외였지. 정도객 하만성을 그리 미쳐 날뛰게 만든 것이 애송이들이었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까.

복면인의 전음을 들은 왕일이 내심 긴장했다.

석휘명이 지금 익히는 것이 바로 하만성의 청하도법과 폭뢰심법이 아니었던가?

완벽한 협박이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아마 석휘명이 수련하는 모습을 본 것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책자를 본 것임에 틀림없었다.

‘석휘명이 이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것도 의문이었다.

매사 조심조심하였고, 언제나 계획을 세우며 빈틈없이 움직이려는 그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들에게 이렇듯 쉽게 그것들을 노출시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혈문으로 돌아가도 석휘명이라는 놈은 없을 것이다. 이미 본교로 데려가는 중이거든.”

“인질이오?”

“인질? 크크크, 너는 아직 내가 말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과연 너희가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렇다면 어째서 휘명을 데려간 것이지?”

“알 것 없다.”

복면인의 말에 왕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이후로 너와 마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네가 길을 걷다 보면 우리가 있을 것이니, 그때가 바로 네가 멈출 때다. 자, 이것을 먹도록 해라.”

복면인이 내민 검은 환단은 보기에도 꺼림칙했다. 하지만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일이 그것을 먹자, 순간적으로 복통이 있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이것은 해약이다. 삼십 일에 하나씩 백팔십 일 분이다. 그 안에 새로운 해약이 전해질 것이다.”

말을 마친 복면인이 신형을 날려 멀어졌고, 남아 있는 것은 코를 찌르는 혈향과 말없이 서 있는 열 명의 복면인이 전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