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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41화 (41/138)

41화

도와 도가 부딪치는 순간, 검이 왕일의 옆구리를 노리고 찔러왔다.

하지만 왕일이 반동을 이용해 몸을 휘돌리며 도를 휘둘렀기에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청년이 훌쩍 뒤로 물러났다.

왕일의 도와 부딪친다면 분명 검이 부러질 것이 뻔한 상황이었기에 물러선 것이다.

양쪽에서 왕일을 포위한 채 서서히 원을 그리며 회전하는 두 사람은 마치 합공을 연습이라도 한 듯 같은 속도로 돌고 있었다.

“하앗!”

기합을 넣으며 중년인이 도를 움켜쥐고 뛰어오르는 시늉을 했지만, 정작 공격을 가한 것은 조용히 검을 찌르는 청년이었다. 왕일이 중년인에게 시선을 주는 순간 검이 어느새 그의 지척에 이르렀다.

순간 왕일이 땅을 박차고 중년인에게 쇄도했다.

검을 피하면서 동시에 중년인을 압박하겠다는 의도였다.

중년인과 부딪치려는 찰나 왕일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고, 붉은 혈광이 대낮임에도 밝게 빛을 내는 순간 내디딘 발이 땅을 후려쳤다.

쾅!

밟힌 땅이 폭발할 정도로 강한 발구름이었고, 그 파편에 검을 든 청년의 시야가 가렸다.

그리고 그 힘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중년인에게 다가간 왕일이 도를 위에서 내리찍었다.

미처 피할 사이도 없었기에 왕일의 도를 막아야만 했지만, 이미 그 힘을 한번 경험한 중년인이었기에 정면으로 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도를 비스듬히 세우며 흘려 넘기려고 했다.

쨍!

어느새 왕일은 직각으로 떨어지던 도를 사선으로 틀었고, 도와 도가 직각으로 만났다.

“크윽!”

왕일은 중년인을 가른 도를 크게 회전시키며 뒤에서 공격하는 청년을 향해 올려쳤다.

“흡!”

흙먼지를 헤치고 공격하던 청년은 밑에서 올라오는 기운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급히 몸을 휘돌려 도의 사정권에서 벗어났지만, 도가 일으킨 기운에 옷이 너덜너덜 해졌다.

“어디…….”

도를 피한 청년이 검을 곧추세우고 왕일의 신형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휘돌리며 왕일이 찾는 청년의 눈에 점점 커지는 그림자가 보였다.

얼굴을 하늘로 향하자 떨어지는 검은 인영과 그 속에서 붉게 타오르는 두 개의 횃불이 보였다.

검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은 선택이었다.

서걱!

“역시… 혈… 안독마…….”

힘겹게 말을 뱉은 청년의 몸이 검과 함께 두 조각으로 갈라졌고, 왕일은 피와 살점이 널린 연무장을 등지고 다시 어둠이 기다리는 자신의 전각으로 향했다.

혈안독마(血眼獨魔).

이 년에 걸친 비무와 그로 인해 죽은 사람들 때문에 붙은 별호가 그것이었다.

언제나 비무와 싸움을 끝내면 돌아서는 그의 등을 보고 고독하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핏빛 눈을 가진 고독한 마귀.

왕일은 현재 광서에서 떠오르는 신성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승부사들과의 대결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기에 승부사들이 가장 원하는 상대였지만, 그 대가는 언제나 죽음이었기에 가장 기피하는 상대이기도 했다.

삼강현에 이웃한 융안현이나 칠성현은 왕일을 경계해서 손을 잡는다는 얘기도 간간히 흘러나오는 실정이었다.

만일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조만간 왕일이 이끄는 혈문과 그들 간에 충돌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

방에 돌아온 왕일은 피를 머금은 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스며들면서 자취를 감춰가는 핏자국.

그렇다. 이 도는 피를 먹고 있었다. 그럴수록 도신은 점점 얇아졌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지만, 매일 그것을 바라보는 왕일은 느낄 수 있었다.

“아…”

순간 왕일이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며 왠지 모를 희열이 느껴지는 듯한 음성을 내뱉었는데, 두 사람이 죽음에 이르던 순간을 되새기던 왕일이 내는 소리였다.

무감정하던 그가 감정을 내는 순간이었고,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 표정이란 것이 지어지는 순간이었다.

굳어 있던 그의 얼굴 근육이 마음껏 움직이는 때이기도 하였다.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의 희열이 왕일을 감싸 안았다.

하지만 피와 죽음이 화려하게 폭발하는 그때를 떠올리며 만족감에 차있던 왕일의 얼굴은 곧 굳어졌다.

언제나 이랬다.

희열의 순간은 짧았고, 짧은 만큼 강렬했다.

‘불사지존이라…….’

불사지존은 마치 싸우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싸움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만일 그가 지금의 자신과 같은 희열을 느꼈다면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희열이 주는 유혹은 달콤했지만, 자신은 결코 피를 찾아 떠도는 망령이 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그는 본보기로 삼을 것이 없었지만, 나는 그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자신이 언제까지 이 유혹을 이겨나갈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그렇게 왕일이 다짐을 할 때, 그를 지켜보던 자가 조용히 모습을 감추고 서서히 혈문에서 멀어졌다.

“어떻더냐?”

남찬우의 물음에 진승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놈입니다. 아직 그 속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심법을 익혔는지 모르지만, 조금씩 그 폐해가 드러나는 모양입니다.”

“폐해?”

“예. 피를 그리워하더군요.”

“그건 문제가 있겠구나.”

“저는 왕일보다 그놈의 뒤에 있는 휘명이라는 놈이 더 신경이 쓰입니다. 왕일을 조종하는 것도 그놈이니까요.”

진승한의 말에 남찬우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너는 왕일보다 휘명이라는 자를 더 높이 평가하는 모양이구나.”

“더 영악하고, 더 조심스럽고, 더 뛰어납니다. 지켜본 바로는 휘명이라는 놈이 무위도 더 높은 것 같습니다.”

“그래? 아직도 너와 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구나.”

“사부님이 왕일이라는 놈을 어째서 그리 높이 평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째서 네가 왕일을 애써 무시하려는지 모르겠다.”

“아시지 않습니까? 본교에서도 사공을 익힌 이들은 많습니다. 그들의 말로가 어땠습니까? 모든 것을 극복하고 경지에 올랐다는 혈마도 결국에는 자신의 몸을 난도질해서 그 피를 먹다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는 누구보다 빠른 성장과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언제 실수할지 모를 놈입니다.”“그래도 이용해 먹을 정도는 되지. 또한 지금 필요한 것은 그런 놈이다. 석휘명이라는 놈처럼 의뭉스러운 놈이 아니라 왕일처럼 저돌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그럼 언제 놈을 움직이게 할까요?”

“우리가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자연히 움직일 것 같더구나.”

“도와줄까요?”

“아직은 나서지 마라. 도움은 절실한 순간에 줘야 그 효과가 큰 법이다.”

“알겠습니다.”

남찬우와 그 제자인 진승한의 대화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

밤이 깊어가며 음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을 느낀 왕일이 정좌했다.

비무를 하고 상대를 죽인 횟수가 많아질수록 왕일은 자신이 변해간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운기에도 조금씩 효과가 있었다.

그렇다고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혈도를 돈 내공은 아침 햇살에 증발하는 이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기가 통하는 구간이 좀 길어졌다.

분명 막혔다고 생각한 부분이 어느새 뚫려 있었던 것이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발견한 길이었다.

평소처럼 토납법을 하다가 발견한 아주 작은 구멍이었다.

그 구멍은 작기도 작았지만, 길이도 짧았다.

혈도를 천 길로 따지면, 겨우 한 자나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왕일을 들뜨게 했었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백회를 열어 음기를 흡수하며 그것을 내공으로 바꾸는 노력을 하였다.

기감이 뛰어난 만큼 기운을 흡수하는 것은 쉬웠지만, 기운은 내공으로 바뀔라치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왕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쌓이는 내공은 없을지라도 그만큼의 효과는 보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석휘명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왕일이 내공이 있다고 여겼다.

그가 보여주는 무위나 동작은 내공 없이는 하기 힘들었으니까.

만일 지금 왕일의 상태에 대해 알려진다면, 무림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

“후유~”

길게 숨을 내쉰 왕일이 막고 있던 천을 걷고 창을 열었다.

하늘은 어두웠고, 그곳에 작은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였다.

유심히 그것들을 바라보던 왕일이 문을 닫고 다시 운공에 열중했다.

하지만 겉모습만 그럴 뿐이고, 내심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바빴다.

‘어딜까?’

며칠 전부터 기운이 느껴졌다.

그가 운공하고 있을 때나, 아니면 기감이 고조되어있을 때 느껴지는 기운이었고, 시선이었다.

감시자는 최소 두 사람이었다. 딱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다르게 느껴지는 두 개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혹시 그들인가?’

왕일이라는 이름이 흔하다고 하여서 그냥 쓴 것이 문제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석휘명은 이름도 고쳤고, 외모도 예전과 비교하면 많이 변했다.

수염을 길렀기에, 체구는 작지만 결코 어린아이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비해 왕일은 체구만 변했다.

자세히 보면 예전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아니야, 그들이 내 존재를 알 리가 없어.’

중원 천하에 왕일이라는 이름이 하나둘도 아니고, 그런 이름의 무림인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너무 부주의했던 것은 사실이야.’

왕일이라는 이름이 흔하다지만, 나이와 등장한 시기 등을 고려한다면 대폭 축소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도대체 누굴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 말고는 다른 이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이라면 한철진과 같은 무리일까, 아니면 그들을 공격한 무리일까?’

왕일은 석휘명에게 들어서 적이 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생각이 떠오르자 다시 궁금증이 들었다.

‘그들은 누구일까? 어째서 나를 죽이려고 했지?’

아직도 해답을 알 수 없었다.

석휘명은 그들의 정체와 왕일을 죽이려는 목적까지 짐작했지만, 아직까지 왕일에게 함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일은 그저 마을을 몰살시키고 자신을 죽이려고 한 놈들이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당문은 어째서 움직이지 않았을까?’

이곳 삼강현에 자리 잡고 주위 얘기를 주워들으며 궁금한 것은 당문의 침묵이었다.

원한은 잊지 않고 열 배로 갚는다는 당가이건만, 그들이 그날의 일을 보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긴, 개방도 찾을 수 없던 놈들이었으니 당연할지도.’

개방도 패진무관을 습격한 놈들을 수소문했지만,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이들을 당가가 찾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복수하려고 해도 대상이 있어야 할 것이니, 당가가 침묵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철교두님…….’

패진무관의 성세는 이곳까지 들려올 정도였지만, 같은 시기에 몰락한 석가장은 이미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갔군.’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다가 자신을 감시하는 이에게로 주의를 기울이자 그의 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곧 다시 올 것이란 것을 알고 있는 왕일이었다.

하루 십이 시진을 꼬박 감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어딘가로 움직일 때면 언제나 그 시선은 자신을 주시했었다.

‘느끼지 못했던 놈을 찾아내었다. 그렇다는 것은 언젠가 놈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란 얘기겠지? 그러나 이놈이 내가 생각하는 그들의 하수인이라면, 그 전에 내가 먼저 죽을 수도…….’

고개를 흔든 왕일은 점점 발전하는 자신을 믿기로 했다.

***

긴 밤을 꼬박 운기로 지새운 왕일은 해가 뜨려는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고 오랜만에 햇빛을 받으며 나간 왕일이 향한 곳은 석휘명이 있는 곳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낮에 나를 다 찾아온 거야?”

왕일은 자신이 다가가자 누군가가 서둘러 멀어지는 기척을 느꼈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냥. 같이 밥이나 먹자고.”

“마침 점심때니, 그러지 뭐.”

둘은 음식이 나올 때까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석휘명은 서류를 보느라 바빴고, 왕일은 그런 석휘명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천오는 언제부터 석휘명의 수하였을까?’

방금 전 황급히 사라진 사람은 천오였고, 자신을 감시한 적도 있었다.

일 년여 전쯤부터 느낄 수 있었는데, 그때도 놀라기는 했지만, 이내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기에 지금처럼 애타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뻐했었다.

사람은 각기 독특한 기운을 흘렸고, 그 독특함으로 인해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왕일이 석휘명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 그 즈음이었다.

여전히 천오는 왕일 앞에서 능청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문주님, 문주님’하고 부르고 있었지만, 그 미소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다.

‘석휘명이 숨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저 외모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과연 당경이 맞기는 한 것일까?’

석휘명은 패진무관에서 빠져나온 후에 급속도로 나이를 먹어 급격하게 노화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멈췄다.

마치 어린아이가 순식간에 어른이 되고, 그 상태로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 같았다.

눈가에 있는 주름이나, 수염 등으로 봤을 때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나중으로 미루자.’

왕일은 그동안 숨겨왔던 암중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놈에 대해 석휘명과 의논하려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 능력으로 보건데 휘명의 수하는 아닌 것 같지만, 모르는 일이지.’

석휘명에 대해 의심에서 시작한 마음은 불신으로 커지고 있었다.

이내 음식이 나오고 두 사람이 그것을 안주 삼아서 모처럼 술잔을 기울였다.

“아예 굳어버렸냐?”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하게 술과 음식을 먹는 왕일을 보면서 석휘명이 혀를 찼다.

“글쎄, 그럴지도.”

“웃은 게 언제냐?”

웃은 지는 오래되었을지라도 미소라면 바로 어제 피를 머금고 그것을 떠올리며 지었었다.

“그나저나 무공은 진전이 있어?”

왕일의 물음에 석휘명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응. 막힌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을 뚫고 나니까 다시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 알겠어?”

“그냥. 얼굴이 밝아 보이기에.”

폭뢰심법이 막힌 것은 거의 반년이나 되었다.

그러던 것이 해답을 찾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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