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상들의 무림 생존기-39화 (39/138)

39화

“빠를수록 좋지 않아?”

“그러면 주위에 너무 강한 인상을 주게 돼.”

“내 이름을 날리라며?”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천천히 놈들의 숨통을 옥죄다가 마지막에 항복을 받으려고 했는데. 아무튼 너 때문에 앞으로의 계획을 수정해야 되겠다.”

“어째서?”

“너무 강하면 견제를 받을 수 있어. 가까운 곳에 있는 융안현이나 칠성현에 있는 문파들이 우리를 주시할 거야. 그리고 우리를 탐색하겠지. 그러다 만일 자신들의 힘에 부친다고 판단되면 외부 세력을 끌어들일지도 몰라. 그러니 일단 좀 더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는 수밖에 없게 되었어.”

“그들도 목표였어?”

“그래. 뭐 아무튼 벌써 벌어진 일이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자고. 알아볼 것도 많고 준비해야 할 것도 있으니까.”

“나는?”

“너는 좀 바빠질걸? 우리 덩치가 좀 커졌으니 노리는 놈들도 있을 것이고, 앞서 말한 두 현을 잡고 있는 놈들이 네 실력을 알아보려고 보내는 놈들도 있을 테니까.”

“어떻게 하면 되지?”

“덤비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리면 돼.”

“그럼 그들이 긴장하지 않을까?”

“그러면서 밖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 되지. 한동안 꼭꼭 움츠리고 있는 거야. 놈들이 우리가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까지. 그리고 우리가 좀 더 실력을 키울 때까지. 나중에 가서는 한꺼번에 정리해버리는 거지.”

“알았어.”

“가는 거야?”

대답하고 나가려는 왕일을 석휘명이 붙잡았다.

“온 김에 아침이나 같이 먹자.”

“됐어. 잠이나 잘래.”

“그래? 알았어. 그럼 가봐.”

“응.”

문을 나서는 왕일의 머릿속에 석휘명과의 대화는 없었다.

밤새 고민한 문제.

황치성과 혁천강을 상대할 때 나타난 현상을 생각하기에도 바빴던 것이다.

“후유. 모르겠군.”

그러나 왕일이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눈이 조금 더 붉어졌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석휘명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사부님, 오늘은 더 특별한 것 같습니다?”

“너희들의 무공을 더욱 일취월장시키기 위해 신경을 썼다.”

비룡장의 장주이자 오룡회의 회주인 허장천이 그의 네 제자를 앞에 두고서 눈을 빛냈다.

그런 그들의 앞에는 사방을 점한 강철로 만들어진 네 개의 상자가 놓여있었고, 그곳에는 매캐한 약초 냄새를 풍기는 탁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또한 두 개의 상자씩 둥근 관으로 연결되어 액체가 자유로이 통과할 수 있게 만들어진 상태였다.

“다시 말하는데, 일체의 잡념을 버리고 운기하는 것에만 신경 쓰도록 하여라. 그리고 약기운을 최대한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이번에 가장 많은 성취를 이루는 이를 내 후계자로 선포할 것이다.”

쿵!

허장천의 그 말은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충격을 준만큼 그보다 더한 동기를 부여하였다.

현재 네 명의 무공수위는 거의 같았다.

누가 높고 낮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박빙이었다.

그동안 노력한 대가를 이제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 후계자가 된다 함은 령아와 혼인하여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곳 비룡장과 함께 회의 모든 힘도.”

사비룡 네 사람 모두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자, 들어가거라.”

허장천의 말에 사비룡이 모두 옷을 벗더니 경쟁적으로 상자에 몸을 뉘였다.

머리 부분에 받침이 있는지 수면 위로 얼굴만 내밀고는 모두 잠겼다.

그것을 확인한 허장천이 상자들 가운데 놓여 있는 화로에 불을 지피자 코끝을 자극하는 향이 신기하게도 퍼지지 않고 네 사람을 향해서만 날아갔다.

이내 주문을 외우는 허장천.

낮게 퍼지는 그 주문은 어쩐지 사기가 물씬 풍겼고, 주문을 외우는 것만으로도 벅찬지 허장천의 몸은 금방 땀에 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긴 한숨을 쉬면서 몸을 일으킨 허장천이 가만히 상자에 누워있는 네 제자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은 제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물건을 보는 것 같았다.

아주 귀중한 물건을.

“흐흐흐. 이제 내 시대가 열릴 것이다. 두 구의 혈천강시를 그 누가 당할 것인가!”

혈천강시는 삼백여 년 전에 모습을 보였고, 당대에 십대고수로 꼽히던 이들이 모두 합공하여 간신히 막았다고 전해지는 마물이었다.

그 강시를 대동하고 나온 인물은 정파에 멸문을 당한 고루문의 생존자였는고, 사이한 술법으로 사람을 현혹하고 살아있는 사람을 이용해 강시를 만들어 무림공적으로 몰려 멸문 당했었다.

그때 나타난 것은 단 한 구의 혈천강시였다.

그것만으로도 무림은 거의 풍비박산이 났는데, 지금 허장천을 그것을 두 구나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액체가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그 순간 허장천이 재빨리 다가가 손끝을 칼로 벤 다음 피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액체가 순식간에 가라앉더니 처음보다 많이 맑아졌는데, 그만큼 네 명의 몸은 점차 회색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앞으로 천 일. 그동안 별다른 일이 없다면 혈천강시는 완성될 것이고, 나 허장천과 우리 가문은 세세토록 영원할 것이다. 무림, 아니 더 나아가 이 나라의 황제가 되리라!”

지금껏 키워 온 것도 힘들었지만, 네 명의 무위를 조절하여 같은 수준이 되게 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하나의 혈천강시를 만들자면 특이한 무공을 익힌 두 사람이 필요하였다.

그것도 같은 수준의 무공을 익히고 있는.

그래서 그동안 가장 무위가 떨어지는 전혁에게 더욱 공을 들였었다.

“누가 남을까?”

상자에 연결된 둥근 관을 통해 액체는 순환하였고, 결국에는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어 두 사람 중에 하나만 남을 것이었다.

무위를 맞춘다고 하여도 정신력까지 같게 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정신이 강한 하나였다.

주문을 외우고 피를 떨어뜨린 것은 종속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이제 앞으로 만들어질 혈천강시는 허장천과 그 피를 이은 이에게만 반응할 것이다.

“세상은 혈천강시만을 기억하지만, 그보다 더욱 위험한 것이 있음은 알지 못하지. 이제 곧 보여주겠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감히 나를 거역하는 이가 없으리라.”

만족한 듯 네 사람을 바라보던 허장천이 몸을 돌렸다.

석실을 나선 허장천이 자신의 방에 돌아와 줄을 당기자 십육 호가 스르륵 모습을 나타냈다.

“부르셨습니까?”

“때가 무르익었다. 너는 만반의 준비를 하였느냐?”

“예? 아, 예.”

허장천의 말을 들은 십육 호가 격동에 물들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는 앞으로 데릴사위가 되어 허씨를 이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네 위에 내가 있고, 우리 령이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을 잊고 경망되이 행동하는 날, 그날이 바로 네놈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령이는?”

“처소에 계십니다.”

“알았다. 혼례는 열흘 뒤에 올릴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하고, 이제부터 너는 허진영이다.”

삼십여 년 만에 번호가 아닌 이름을 받았지만, 십육 호의 속내는 그리 좋지 않았다.

‘진영(眞影). 진정한 그림자란 말인가? 나는 아직도 밝은 빛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인가?’

그렇다고 그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십육 호, 아니 이제는 허진영이 된 그가 나가고 나자 허장천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어렸다.

‘흥! 네놈이 좋아서 내 딸을 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네놈의 몸이, 자질이 탐날 뿐이지. 손자가 태어나는 날 네놈의 역할도 모두 끝날 것이다. 길어야 삼 년이겠지. 흐흐흐흐. 기다려라, 남궁창성아. 네 눈으로 남궁가가 사라지는 꼴을 보게 될 것이니.’

길고 긴 인내의 세월이었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역사가 오래되어 주위에서는 존경을 받았고, 가진 것도 적지 않았다.

그런 허장천의 가문이 적도들의 습격에 의해서 한순간에 몰락하고 말았다.

가문의 충신에 의해 간신히 목숨을 건진 허장천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있다면 가문이 숨겨둔 재산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재산도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자칫 적도들에게 정체가 들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가신과 함께 떠돌던 허장천은 같은 처지에 있는 석호천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서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중원에 그와 같은 일을 겪은 이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넓디넓은 중원에서 피고 지는 가문이 적지는 않겠지만,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가문이 몰락한 것이다.

하나같이 복면인들에게 피습을 당해서 가문이 몰락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어떠한 원한관계도 없었다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다만 억지로 공통점을 찾자면 그들이 점유하고 있던 사업이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현재 무서운 기세로 발전하고 있는 당가, 제갈가, 남궁가, 종남파가 그들이었고, 그들이 현재와 같은 세를 이루는 데는 그때 거둬들인 사업권들이 한몫했다.

물론 당시에는 몰랐던 일이었다.

아무튼 이 우연한 만남으로 허장천, 석호천 두 사람은 뜻을 세워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가문의 사람들을 은밀히 수소문했다.

하지만 작심하고 음지로 숨어든 이도 있었고, 그들처럼 정처 없이 떠도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만난 것은 단 세 사람뿐이었고, 그들과 허장천, 석호천이 뜻을 모았다.

오룡회는 그렇게 결성되었다.

음지에서 만난 그들을 고무시킨 것은 하나의 단서였고, 그 단서를 따라서 찾은 곳이 남궁가였다.

그때부터 계획은 시작되었다.

비룡장을 만들고, 무사를 키워서 중원 전역에 있는 중소문파들을 수중에 넣었다.

자신들이 당한 것은 잊었는지, 아무 잘못도 없고 원한도 없는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고, 약으로 제압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허장천은 가문이 만들어놓은 비밀금고에 들어있던 비급을 발견했고, 그가 또 다른 야망을 키우는 것에 일조하였다.

혈천강시의 제조법.

그리고 석호천이 가지고 있던 백회를 여는 방법이 적혀 있던 비급은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석호천은 삼백여 년 전 약물을 이용하여 백회를 여는 것을 연구하던 철심문의 후손이었고, 허장천은 고루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이의 후손이었다.

삼백여 년의 시간을 두고 그들이 만난 것이다.

결국 철심문의 후손은 고루문의 후손에게 죽었지만,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철심문의 후계자인 석휘명이 살아 있으므로.

“남궁가를 처리하고 나면 다음에는 네놈들이다.”

남궁세가와 함께 신흥 사대세력으로 불리는 이들.

물증은 없었지만, 그들의 부흥이, 그리고 남궁세가가 일어난 시점이 그들과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세간에 은밀히 떠돌던 소문도 있었다.

다만 그들이 중소문파가 멸문한 것에서 혐의를 받지 않은 것은, 당시에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그들의 분가나 속가도 조용하였다.

혐의를 두려 해도 움직인 세력이 없는 것이다.

남궁세가 등이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세력에게 의뢰할 리는 없었다.

만일 그런 것이 밝혀진다면, 아무리 당시에서 세가 높은 문파나 가문이었다고 해도 무림의 공분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결국 몰락의 길을 걸었을 테니까.

또한 밝혀지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런 약점을 쥔 의뢰 받은 세력이 그 가문과 문파를 가만히 놔둘 리 만무하였다.

그것을 이용하여 더 큰 이득을 챙기려 할 것이었다.

이미 막강한 세력과 부를 가진 그들이 그런 불안요소를 만들 리 없다는 것이 당시의 세간에서 내린 결론이었다.

***

“사모님.”

“사우.”

애틋한 눈길로 장사우를 바라보는 이는 한철진의 아내가 된 적미정이었다.

이제는 완연한 성숙미를 자랑하는 적미정과 훤칠하게 자란 장사우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쪽으로.”

적미정이 조막만한 손으로 두툼한 장사우의 손을 이끌고 간 곳은 그녀가 즐겨 이용하는 별관이었다.

오늘은 한철진이 정기적으로 수하들과 회식하는 날이었고, 그런 날이면 한철진은 현에 있는 기루에서 질펀한 술판을 벌였다.

장사우는 적요신의 제자는 되지 못하였지만, 한철진의 제자는 될 수 있었다.

적미정은 적요신과 홍동곽이 비극을 맞은 그 이후로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타인을 만나는 것을 꺼렸다.

그러던 것이 철사명이 사부님을 죽인 흉수들을 찾는다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객사를 한 후에는 완전히 외부와 단절하는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철사명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신강현의 뒷골목이었고, 술 냄새가 진동했으며 그런 그의 옆구리에는 검 하나가 깊게 찔려 있었다.

옷가지가 풀어 헤쳐져 있고, 소지품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강도를 당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나름 일가를 이루어가던 무인이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패진무관의 사정을 알던 이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안타까워했다.

남은 것은 한철진뿐이었는데, 그는 패진무관을 재건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무너지거나 불탄 전각을 수리하였고, 문호를 크게 개방하여 수련생들을 받아들였으며, 장사우를 비롯한 자질이 있어 보이는 아이들 셋을 제자로 삼아 다음 대 패진무관의 기둥이 될 것이라 공표하였다.

적미정이 건넨 술을 마신 장사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허~ 벌써 취기가 오다니, 상당히 독한 것인 모양인데요?”

“그럴 거야. 사우가 하도 술이 세서 마음먹고 구한 것이니까.”

“그만 마셔야겠습니다. 자칫 돌아가는 길에 실수하면 안 되니까요.”

은밀히 기루로 돌아가야 했다.

어차피 오늘 술판은 밤새 이어질 것이고, 이십여 명의 사람들은 고주망태가 될 것이니 몰래 들어가 섞인다 해도 눈치 챌 사람은 없으리라.

하지만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인다고 해도 조심하는 게 좋았다.

“이쯤에서…….”

일어서려던 장사우가 순간 비틀거렸다.

“응?”

이럴 리 없었다.

아무리 독한 술이라도 서너 잔에 몸까지 비틀거린다는 것은 그가 익힌 무공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요신의 무공은 패도를 추구하는 양강 계열의 무공이었고, 화기와 독기, 주기는 상극이었기에 무관에서 배운 이들은 모두 말술이었던 것이다.

눈이 흐려지며 앞에 앉아 있는 적미정의 얼굴이 뱅글뱅글 돌았다.

“사, 사모…….”

쿵!

적미정을 부르던 장사우가 결국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러나 그런 그를 바라보는 적미정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자리 잡은 것은 슬픔과 공포였다.

그때,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적미정이 입술을 꼭 깨물더니 주안상을 치우고 갑자기 자신이 입고 있던 옷들을 찢었다.

찌이익!

마치 힘센 누군가 강제로 찢은 것처럼 갈기갈기 옷을 찢고는, 침상을 흐트러뜨리고 그곳에 기대자 열락이 감돌던 방은 이내 범죄 현장처럼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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