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화천오를 앞세우고, 그 뒤를 백정과 무사 아홉 명이 따르고 있었다.
왕일은 맨 뒤에서 그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라도 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천오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을 용케 알아서 갔다.
진천문이 있는 곳에 갈 때까지 마주친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그가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움직였는지를 말해주었다.
밤늦은 시각, 정신없는 취객이 있을 법도 하건만, 뒤따라가는 왕일의 눈에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천문? 설마 여기를 치자고 이 밤에 나오신 것입니까?”
백정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왕일을 바라보았다.
“그래.”
“지금 이 인원으로요?”
“안 될 이유라도 있나?”
“그것이…….”
“겁난다면 돌아가도 좋다. 대신 혈문에서도 나가줘야겠어.”
“누가 겁난다고 했습니까? 그저 좀 무모해 보여서… 저안에는 그래도 한다는 놈들이 최소한 스물두세 놈은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럴까?”
왕일은 진천문이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으므로 최소한의 인원만 남고는 모두 그곳에 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그것이 맞는 말일 겁니다. 이들이 운영하는 도박장이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 항상 최소한의 인원만 그곳으로 가고 나머지는 대기하는 입장이지요. 사람이 많지 않다보니 만일에 대비해 최대한 휴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천오가 백정의 말을 거들었는데, 왕일의 생각과는 정 반대였다.
“진천문의 문주와 나한테 죽은 놈의 무위를 비교하면 어떻지?”
“비슷하거나 진천문의 문주인 소리도 혁천강이 더 높을 것입니다.”
“그럼 걱정할 것 없잖아?”
“저나 백정이 걱정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놈들은 우리처럼 두목이 꺾인다고 해서 순순히 항복할 놈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다 구룡장 놈들도 있고 말입니다.”
“꺾이지 않는다면 꺾일 때까지 밀어붙이면 되는 것이고, 구룡장이 오기 전에 해결을 본다면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보는데?”
“예?”
“선두에는 내가 선다. 뒤처리나 하라고 데려온 거니까, 여러 소리 말고 가기 싫은 사람은 빠지도록.”
성큼 걸어가는 왕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천오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고, 뒤를 따라서 백정과 나머지 수하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왕일을 따랐다.
“쳇! 그럼 기습이라도 하던가. 이렇게 대놓고 가면서…….”
***
진천문의 정문을 지키고 있는 것은 두 명의 무사였는데, 왕일을 위시한 십여 명의 사람이 다가가자 긴장한 표정으로 대문에 달려 있는 쪽문을 통해 무언가를 전했다.
그러자 곧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더니 이내 문이 열리며 대여섯 명의 사내가 더 나왔다.
그런 그들을 본 천오가 왕일의 옆으로 다가왔다.
“장만우란 놈입니다. 진천문의 삼인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만! 더 이상 다가오면 재미없다!”
삼 장의 거리까지 다가가자 장만우가 소리를 질렀고, 진천문의 무사들이 각기 검과 도, 낭왕봉 등의 무기를 꺼냈다.
어떤 이는 소도를 꺼내 던질 태세를 하고 있었는데, 날의 빛이 거무죽죽한 것이 아마도 독을 바른 모양이었다.
장만후의 말에 천오와 백정 등은 멈췄지만, 왕일은 멈추지 않았다.
천오 등을 바라보던 장만우가 고갯짓을 하자 소도가 날았다.
채챙!
한순간의 움직임으로 날아오는 소도를 쳐낸 왕일은 결코 서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느린 것도 아니었다. 처음과 똑같은 속도로 전진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적과의 거리가 일 장 남았을 때 땅을 박찬 왕일이 일 장의 거리를 순식간에 지워버리고는 손에 들린 도를 휘둘렀다.
챙! 빡!
공격을 막으려던 장만우의 도를 부러뜨린 왕일의 도는, 그러고도 힘을 잃지 않고 장만우의 허리를 강타했다. “커… 컥…….”
옆구리가 오른쪽으로 완전히 접힌 것을 보면 척추가 부러진 것 같았고, 입으로 피거품을 내뿜는 것을 보니 내장도 망가진 것 같았다.
“도, 도망쳐!”
장만우가 일격에 쓰러지자 나머지 진천문의 무사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서며 장원 안으로 들어갔고, 왕일은 그들을 따라서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웬 잡놈들이 여기까지 와서 행패냐!”
이십여 명의 진천문 무사들 앞에서 고함을 지른 칠 척 거인은, 그 키에 어울릴 만한 대월(大鉞)을 어깨에 걸쳤는데 한쪽 도끼날이 거의 석 자에 이르는 커다란 것이었다.
손잡이와 연결하는 부분의 두께도 만만치 않게 두꺼워서 일반 사람 같으면 그것을 드는 것만도 벅찰 것 같았다.
“저놈은 황치…….”
또다시 재빨리 천오가 다가와 왕일에게 뭐라 속닥이려고 했지만, 왕일이 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했다.
“됐어. 앞으로 내 앞에 나서는 자의 이름은 필요치 않아.”
“예?”
“어차피 죽을 놈들이니까.”
“아, 예.”
그 소리를 들은 진천문의 이인자인 황치성이 대월을 땅에 내리꽂고는 손에 침을 탁 뱉었다.
“흥! 소방파가 또 주인이 바뀌었다더니, 네놈인 모양이구나. 어린놈이 잠시 정신이 나간 것 같아서 봐주려고 했더니, 망발을 지껄여? 나도 네놈의 이름 따윈 필요치 않다!”
설왕설래하는 사이 진천문의 내원에서 두 명의 무사와 함께 천천히 걸어 나오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황치성과 반대로 왜소한 몸집의 중년인이었고, 그가 바로 진천문의 문주인 소리도 혁천강이었다.
“저 애송이냐?”
“예. 문주님.”
“어이, 눈알 벌건 어린놈아. 왜 오밤중에…….”
혁천강이 말을 시키면서 후문으로 보낸 수하가 구룡장 사람을 데려올 때까지 시간을 벌려고 했지만, 왕일이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다짜고짜 몸을 날린 것이다.
“막아!”
퍽!
혁천강의 말에 앞을 가로막선 무사 하나가 왕일이 휘두른 도에 맞아서 거의 이 장여를 피분수를 뿜으며 날아갔다.
또다시 네 명의 무사가 왕일을 제지하려 했지만, 어떤 놈은 도가 부러지고, 어떤 놈은 팔이 부러지면서 튕겨 나갈 뿐이었다.
어느새 왕일과 혁천강, 황치성 사이에는 아무도 없었고, 왕일은 그들을 향해 도를 내리찍고 있었다.
“놈!”
땅에 꽂혀 있던 대월을 뽑아 수직으로 쳐올리는 황치성.
그것에 걸리면 설사 바위라도 갈라질 것만 같았다.
동시에 혁천강의 손에서도 비도가 날았는데, 손이 척척 맞는 것이 합공을 연습한 사람들 같았다.
그런데 비도가 직선으로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약간 곡선을 그리며 대월과 왕일이 만나리라 예상되는 지점으로 범위를 좁혀왔다.
밑에서는 대월이 갈라오고, 그것을 피할 공간에는 혁천강이 날린 비도가 쏘아져오니 피할 곳이 없었다.
공중에서 다시 신법을 발휘해서 신형을 띄운다는 것은 경공의 고수들이나 하는 것이었다.
그런 재간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직접 본 이들은 드물었다.
고수들이 아무 데서나 실력을 뽐내지 않았으니까.
“하앗!”
왕일은 애초부터 피할 생각이 없었는지, 떨어지는 힘을 더해서 들고 있던 도를 내리찍었다.
옆에서 각도가 미묘하게 변하며 자신을 찔러오는 비도는 아예 무시했다.
쾅!
도와 대월이 만났고, 순간 날아오던 비도가 왕일의 양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큭!”
신음은 비도가 박힌 왕일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황치성에게서 나왔다.
올려 치는 불리한 자세였지만, 황치성은 자신이 있었다.
얼치기 왈패가 아니라 이류지만 내공심법도 가지고 있었고, 부단한 노력으로 어느 정도 성과도 거뒀었다.
혁천강과 함께 이 좁은 촌구석을 벗어나서 나름 위치를 가진 사파를 만들어 마교의 시선을 받은 연후에 분파의 이름을 받는 것도 꿈꿨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른 뜨내기 사파인들을 걱정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광서 땅에서 감히 누가 마교의 권위에 도전하겠는가?
그런데 그 희망이 새어나온 신음과 함께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이…….”
완전히 부서진 황치성의 대월이 그의 운명을 말해주었다.
천천히 반으로 갈라지는 황치성의 몸.
분명 날이 없건만, 왕일의 도는 황치성의 몸을 매끈하게 잘라버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가장 놀란 것은 왕일 그 자신이었다.
“어떻게?”
몇 사람과 싸웠지만, 자신의 도에 베인 사람은 없었다.
모두 몽둥이에 맞은 것처럼 타격을 입었지 자상을 입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황치성은 완전히 잘라진 것이다.
‘그게 뭘까?’
황치성의 도와 부딪힌 찰나 그의 눈에 희미하게 보인 그것.
자신의 도를 감싼 그것은 검붉은 색으로 검은색인 도신과 어우러져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했었다.
‘어째서 지금 보였지?’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쉬쉭!
바람소리를 내며 비도가 또 날아왔던 것이다.
챙!
두 개의 비도 중에서 하나는 걷어내었지만, 하나는 그의 허벅지에 박혔다.
왕일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고, 그러자 오히려 비도를 날린 혁천강이 당황했다.
“놈… 정녕 사람이냐?”
옆구리와 허벅지. 그곳에 박힌 비도는 평범한 비도가 아니었다.
발린 독만으로도 열 사람은 죽이고도 남을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앞에서 걸어오는 왕일은 그것을 세 개나 맞고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쉬쉬쉭!
이번엔 세 개의 비도가 날았다.
그와 동시에 왕일도 땅을 박차며 혁천강을 향해 신형을 쏘아 보냈다.
퍼퍽!
얼굴과 심장을 노렸던 비도가 왕일의 팔에 박혔고, 나머지 하나는 뒤로 날아갔다.
어느새 자신의 앞에 선 왕일을 보면서 진저리를 치는 혁천강은, 자신의 양손에 들린 비도로 공격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놈은…….”
퍽!
왕일의 도가 혁천강의 머리를 부숴버렸다.
‘안 되는구나.’
높이 들어 올린 도를 힘껏 내려쳤지만, 황치성처럼 자르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앞에 세워두고 자를 순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싸움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었으니까.
몸을 돌려서 진천문의 무사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몸에 박힌 비도를 뽑는 왕일은 그 모습 하나로 다른 이들을 완전히 제압했다.
“덤비면 죽는다.”
나직한 왕일의 음성에 흠칫하는 이들은 진천문의 무사들만이 아니었다.
후방에서 정문을 지키고 있던 같은 혈문의 무사들도 그 목소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할 일을 잊지 않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천오였다.
“꿇는 놈은 살 것이고, 반항하는 놈은 죽을 것이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는지 백정도 진천문의 무사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무기를 버려라! 더 해보겠다는 것이냐!”
이윽고 진천문의 무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모두 항복하자, 왕일이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피도 멎었는지 흘러내리지는 않았지만, 이미 흘러내린 피가 그의 옷을 붉게 물들였다.
일렁이는 횃불, 피에 젖은 옷, 거기에 붉게 빛나며 어둠을 유영하는 적안.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기괴한 장면을 연출했다.
“떠날 놈은 떠나라. 대신, 이후로 이곳 삼강현에 얼굴을 내미는 놈이 있다면 죽을 것이다.”
이십여 명의 사내들 중에서 서넛만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머지는 모두 자리를 지켰다.
“부문주.”
“예.”
“바깥의 움직임은?”
“아직 조용합니다.”
“구룡장은 오지 않은 것인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음…….”
이곳도 정리해야 했고 구룡장도 신경 써야 했지만, 왕일은 지금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비도에 발린 독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어지간한 독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산에서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몸에 들어 있는 신비한 힘이 활동을 개시했는지 간질거렸지만, 그것뿐이었다.
천오가 왕일의 상처를 힐끔거리면서 쳐다보았다. 아마도 혁천강의 비도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독이 아니더라도 저런 상처를 입고도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왕일이 신기해 보이리라.
그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있는 이들이나, 그들을 묶고 있는 혈문의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다린다.”
그렇게 밤새 구룡장을 기다렸지만, 그들은 끝내 날이 밝도록 오지 않았다.
진천문을 정리하고 그들의 사업과 재산을 천오에게 처리하도록 한 왕일이 혈문으로 돌아오자 그곳에는 삼십여 명의 장한이 십여 명의 혈문무사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문주님 오십니까.”
왕일을 발견한 혈문무사들이 인사를 건넸다.
“뭐지?”
“예? 아, 구룡장 놈들입니다.”
“구룡장?”
수하의 말을 들은 왕일의 얼굴에 의문이 들었다.
“예. 그리고 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듣고 왕일이 석휘명을 찾아갔다.
“왔어?”
“어떻게 된 거야?”
“그놈들? 뭐긴, 너 때문이지.”
“뭐?”
“네가 너무 빨리 움직이는 바람에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잖아.”
왕일이 진천문을 치러 간 사이 석휘명은 구룡장으로 쳐들어간 모양이었다.
“나서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랬지.”
“그런데?”
“네가 너무 서둘렀다니까.”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래? 그렇다면 어때서 진천문을 치고서 바로 구룡장으로 가지 않은 건데?”
“뭐?”
“나는 시간을 두고라도 두 곳을 한 번에 치려는 계획을 세웠단 말이야. 설마 네가 이렇게 무모하게 일을 벌일지는 몰랐지.”
하루가 가기도 전에 벌써 삼강현을 장악한 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