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상들의 무림 생존기-37화 (37/138)

37화

“알았다. 요컨대 두 곳의 힘을 감당할 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지?”

“물론입니다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일전에 번천장이라는 놈이 이 마을에 들어와서 도박을 하였는데, 그때 분탕질을 친 적이 있었습니다. 일을 크게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는지 달라는 대로 다 주고 보냈는데, 다음 날 아침 싸늘한 시체가 되어서 뒷골목에 버려졌지요.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진천문이 처리했겠지요.”

강호에서 명호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다른 이가 알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큰 의미였다.

삼류에도 못 미치는 이들은 평생을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명호였으니까.

“구룡장은?”

“그놈들은 수를 짐작하기 힘든 놈들이기에 치기가 꺼려집니다. 장물을 취급하다보니 아는 놈도 많고, 물건을 맡긴 놈도 많습니다. 언제는 한 번에 수십 명이 그 문을 나서는 것을 본 적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물건을 맡긴 놈들 중에 혹 고수라도 섞여 있으면 그야말로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지요.”

가만히 천오의 얘기를 듣던 왕일이 생각에 잠겼다.

“혹시 그 얘기를 먼저 놈들에게도 했나?”

“예? 아, 예. 했습니다.”

이렇게 겁준다면 누가 그들을 치러 가겠는가?

한마디로 그냥 이곳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이나 먹으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이렇게 마을에 정통한 사람은 밑에 두고 써먹는 것이 이로웠다.

그것이 천오가 가진 생존방식의 하나였다.

그러나 천오는 결코 먼저 앞으로 나서서 떠들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어쩔 수 없이 나서서 얘기한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마치 나는 야망 같은 것은 절대 없고, 몸 편히 사는 것이 제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지금 우리 사정을 놈들이 알고 있을까?”

“어느 정도는 눈치 챘을 것입니다. 그놈들도 우리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기는 마찬가지니까요.”

“관은?”

“관도 알고는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크게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광서에서 관과 무림은 거의 완전하게 서로를 외면하고 있으니까요. 양민을 죽인다든가 하지 않는 이상 모른 척 할 것입니다.”

“알았다. 일단 물러가도록.”

왕일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이들이 하나둘 자신들의 전각으로 향했다.

“아, 부문주.”

“예?”

자신을 부르자 몸을 돌린 천오가 눈을 부릅떴다.

패액!

왕일의 도가 갑자기 천오의 머리를 노리고 사정없이 휘둘러졌다.

피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머리가 부서질 판이었다.

순간 천오의 허리가 뒤로 활처럼 휘며 등이 거의 땅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철판교의 수법으로 하체의 힘이 극도로 발달하거나, 내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결코 할 수 없는 동작이었다.

그러나 잠깐 멈칫하는 것 같던 천오가 힘에 겨운 듯 넘어졌고, 뒤통수를 땅에 찧은 그가 인상을 쓰며 뒹굴었다.

“아이고…….”

그 소리에 처소로 향하던 이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혀… 아니, 부문주님. 왜 그러세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셨습니까?”

“크헤헤헤. 앞으로 넘어져서 뒤통수가 깨지는 경우는 재수가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백정 등은 그저 무시하고 처소로 향했고, 천오를 따르는 이들은 뭐가 좋은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닥치지 못해! 이 망할 놈들아!”

힐끔 왕일을 바라본 천오가 그의 표정에 아무 변화가 없자 슬며시 걸음을 떼었다.

“아침 일찍 나를 찾아오도록.”

“예? 아, 알겠습니다.”

멀어지는 천오의 등을 보면서 왕일이 생각에 잠겼다.

'결코 우연이 아니었어. 그렇다면 내력을 숨긴 고수라는 말인데.'

[그게… 이런 뒷골목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법이 적은지라…….]

천오의 말이 떠오른 왕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천오라. 그게 정말 그의 이름일까? 그의 정체가 무엇일까?’

***

“들어간다.”

밤늦은 시각이건만 당경, 아니 석휘명은 두루마리와 서책을 놓고 읽기도 하고 다른 쪽으로 필사하기도 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왜?”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천오와 진천문, 구룡장에 대해 말하였다.

“그 천오라는 인물. 어떨 것 같아? 우리 일에 방해가 되겠어?”

“모르지. 하지만 내 느낌을 묻는 것이라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왕일의 말을 들은 석휘명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이곳을 완전히 장악한 것도 아니니까, 일부터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겠지. 거기다 그가 고수라면 우리 일에 도움이 될 수도 있어.”

“그렇지?”

“그래. 그놈에 대한 처리는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 너는 이곳을 장악하는 것만 신경 쓰도록 해. 그럼, 그 두 곳은 어떻게 하려고?”

“어떻게 할까?”

“난 분명히 이곳 삼강현을 일통하길 원한다고 말했어. 내가 알아본 바로는 네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놈들이야. 이런 촌구석에서 너를 당할 정도의 놈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알았어.”

왕일은 대답하면서 탁자에 펼쳐진 두루마리를 바라보았다.

‘저것들은 어디서 났을까?’

이곳에 온 지 이제 겨우 몇 시진 정도였다. 그럼에도 석휘명이 보고 있는 두루마리의 수는 꽤 많았다.

“그리고 행사를 함에 있어서 정을 두지 말고, 최대한 잔인하게 처리해야 해.”

“왜?”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도움이 되니까.”

“알았어.”

‘후유~’

왕일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방을 빠져나갔고, 그런 왕일의 뒷모습을 보며 석휘명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남찬우가 저놈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어느 정도 힘을 키우면 인정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크흐흐흐. 좀 더 날뛰어라. 그리고 네 이름을 사방에 알려라. 그만큼 내 계획은 앞당겨질 것이니까.’

그러다가 죽는다면 안타까울 뿐이었다.

쓸 만한 도구가 사라지는 것이니까.

‘놈은 아마도 여기가 한계거나 더 발전한다고 해도 겨우 일류에 그칠 거야. 다만 그 몸뚱어리가 변수이긴 하지만, 불사신도 아니니 언젠가는 파탄을 맞겠지.’

생각을 하던 석휘명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불사지존이라는 허황된 말에 홀렸던 내 자신이 한심해지는군.’

지금 열심히 정리하는 두루마리들은 왕일이 죽었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놈들이 파악했을지도 모르니까 아직 섣불리 전장에서 돈을 찾을 수는 없어. 하지만 최악의 경우를 위해서 멸혼방에 손을 쓰기는 해야겠군.’

멸혼방은 석휘명이 일 호 시절에 정보를 수집하고, 그가 하는 일에 도움을 받을 살수를 키운 곳이었다.

회주나 부회주가 모르게 하기는 하였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기에 아직까지 찾아가지 않았다.

벌써 오 년이나 흘렀지만, 그의 조심성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커졌다.

‘기다려라. 하나하나 친히 목을 따줄 테니까.’

복수를 생각해서인가? 석휘명의 몸이 들끓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도를 들고 밖으로 나온 석휘명이 청하도법의 초식에 맞추어 몸을 움직였다.

‘어서 빨리 이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정도객 하만성을 죽여야만 하리라!’

정도객 하만성을 죽일 수만 있다면, 사파의 굴레가 아닌 정파의 탈을 쓸 수도 있었다.

그의 숨겨 둔 제자나 사손이라는 신분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쉽지 않겠지. 차라리 변식을 완성하는 것이 더 빠를지도.’

있는 초식에 변화를 주어서 흐름이 끊이지 않게 하는 것도 상당한 노력과 총명이 필요한 일이었다.

휭~ 휭~.

석휘명이 휘두르는 도를 따라서 점점 바람이 일더니, 흙먼지가 자욱하게 주위를 감쌌다.

“하앗!”

한소리 기합과 함께 도를 쳐내자 휘돌던 흙먼지들이 정면을 향해 폭사했다.

하지만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벽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았다.

아직 충분히 내력을 싣지 못해서 날아가는 와중에 흩어졌던 것이다.

‘지금은 이 정도지만, 기필코!’

석휘명이 굳게 주먹을 쥐고는 안으로 들어갔고, 그런 그의 뒤로 달빛이 서글프게 내려앉고 있었다.

***

“일어나셨습니까, 문주님.”

전각 앞에 자리한 작은 공간에서 도를 휘두르고 있던 왕일에게 천오가 찾아왔다.

그런 그의 뒤로 두 명의 여인과 꼬마 하나가 보였다.

“누구지?”

“아, 어서 인사드려라. 문주님이시다.”

한 명은 이제 중년으로 접어드는 뚱뚱한 여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른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는데, 역시 박색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제 여덟 살이나 됐음직한 꼬마였는데,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처음 왕일을 바라본 그들은 흠칫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꼬마도 금방 고개를 숙일 뿐 겁을 먹어서 몸을 떤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문주님.”

“하하하, 아침과 점심을 지어줄 아낙들입니다. 청소도 도맡아하고 있습지요. 저녁은 보통 나가서 먹는지라…….”

“알았다.”

천연덕스럽게 웃는 천오를 바라보는 왕일은 머리가 복잡했다.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내가 자신의 실력을 안다는 것을 알 텐데. 자신감인가? 나 정도는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다는? 그만큼 고수라는 말인가?’

여인들을 배웅하는 천오를 향해 살기를 쏘아 보냈지만, 어떤 움직임도 일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그 모습이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죽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휘명이는 어째서 그냥 두는 것이지?’

휘명이란 이름을 떠올린 왕일이 쓴 웃음을 지었다.

‘이제 당경이란 사람은 완전히 없어졌군.’

“저… 그런데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전천문과 구룡장을 치려고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왕일이 도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두 곳을 말입니까? 글쎄요. 제가 뭘 알겠습니까마는 친다면 진천문을 먼저 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인원도 적고, 구룡장보다는 그나마 승산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구룡장에서 곧 지원을 할 것이니 말입니다.”

“가능할까?”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좀 힘들 것 같은데요.”

“어째서?”

“일단 그곳을 장악하고 있는 놈들의 무위도 장난이 아니고, 거기다 놈들은 버티기만 하면 구룡장에서 지원이 올 것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에 쉽사리 항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전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놈들의 수는 유동적인데, 요즘 진천문 놈들이 운영하는 도방이 성황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쉬었다 가는 놈들도 더 많아졌지요.”

“그렇단 말이지. 좋아, 오늘 술시 초에 다시 오도록.”

“예? 아, 알겠습니다.”

멀어지는 천오의 뒷모습을 보면서 왕일은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천박해 보이는 웃음, 가벼워 보이는 행동, 거기다 여유라고 보일 정도의 자신감.

뭔가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 같은 그런 인물이었다.

‘마치 만들어낸 사람 같군.’

왜 이런 심정이 드는지 드디어 알 수 있었다.

인형.

사람이 아닌 꼭두각시 인형이 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일 것이다.

다른 이들은 알 수 없었겠지만, 기감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왕일이었다.

‘진심이 보이지 않아.’

행동 하나하나가 잘 짜인 대본을 읽는 경극 배우 같았다.

‘언젠간 알게 되겠지.’

하루 종일 수련과 운기를 하면서 지낸 왕일이 숨을 고르더니 이제 막 떨어지는 해를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멈춘 것인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었다.

이전에는 운기를 하거나 수련을 하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느꼈는데, 그런 것이 멈춘 것이다.

‘뭐가 빠졌지? 아니면 여기가 내 한계인가?’

패진무관에서는 일 년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조금씩 발전하는 자신을 느꼈었다.

그러던 것이 백회를 열고부터는 이틀, 열흘, 한 달, 이런 식으로 늦춰지다가 결국에는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흠, 흠. 문주님. 천오 대령했습니다.”

번들거리는 구릿빛 근육 사이사이로 흐르는 땀방울이 노을에 반사되어, 왕일을 검붉은 색으로 만들었다.

거기에 붉은 혈안은 그가 이제 막 피 구덩이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모습으로 보이게 했다.

“지금 문에 얼마나 있지?”

“수금하러 나간 놈들하고, 번을 서는 놈들을 빼면 아홉 명이 있습니다.”

“누가 수금하러 나갔지?”

“에… 제가 미처 말씀을 못 드렸군요. 보통 수금은 열흘에 한 번씩 바꿔 가며 저와 백정이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지 않는 쪽이 번을 서는 것입지요. 현재 번을 서는 것은 백정이 데리고 있는 애들입니다.”

“내가 진천문을 친다면 언제가 좋을까?”

“예? 그… 글쎄요. 진정 치실 것입니까?”

“시간을 끌 이유가 있나?”

“문주님이 새로 이곳을 장악한 것을 놈들이 알 터이니 지금은 바짝 긴장하고 있을 것입니다. 너무 서두르는 것은 아닐는지…….”

“좋아.”

왕일의 말을 늦춘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천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오늘은 소인이 술을 한잔 대접해 드릴 것이니, 같이 나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술은 다음에 먹도록 하지. 가서 백정과 나머지 사람들을 불러 오도록.”

“예?”

“아니지. 어차피 가는 길이니 같이 가도록 하지, 뭐.”

“어딜 말씀입니까?”

“지금 진천문을 치러 간다.”

“예?”

“왜?”

“지금 이 인원으로 말입니까?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하다못해 수금 나간 애들이라도 불러오겠습니다. 그리고 대인께도 말씀드려야 하고 말입니다.”

“아니. 지금 있는 인원으로 간다. 그리고 안에는 말할 필요 없어.”

“그래도…….”

“죽고 싶나?”

완전히 넘어가는 해가 뿌리는 붉은 너울이 왕일의 뒤에서 후광처럼 빛났다.

그리고 그 속에서 춤추는 적안.

넘실거리는 살기가 적안에서 뿜어져 나와 천오의 전신을 휘감았다.

“아,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좋아. 앞장 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