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문주님, 이제 오십니까?”
정문에서 번을 서고 있던 무사들이 왕일을 보더니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헤헤헤, 이쪽으로 오십시오. 미리 다 준비해두었습니다.”
한 사람이 왕일을 안내했는데, 그가 안내한 곳은 장원에서 내원에 해당하는 전각이었고 그 전각 뒤로 별채처럼 보이는 전각이 하나 더 있었다.
“자, 이곳입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원래 좀 지저분했습니다만, 소인 백정이 이것을 치우느라고 고생깨나 했습지요.”
낡기는 했지만, 그나마 깨끗하게 치워놓은 덕분인지 오히려 고풍스러운 멋이 느껴졌다.
흠이라면 너무도 황량한 실내였다.
침상과 탁자, 의자 네 개, 휑하니 빈 책장 하나가 넓은 방을 차지하고 있는 전부였다.
“대인은 저 뒤쪽 전각에서 기거한다고 하셨습니다.”
장한의 말을 들은 왕일이 당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왕일이 멀어지자 안내해온 장한이 땅에 침을 뱉으며 투덜거렸다.
“퉷! 제길, 주둥이에 아교를 발라놨나? 고생했다고 한마디 하면 주둥아리가 부르트기라도 하냔 말이다. 흥! 시뻘건 눈알만 가지고 다니면 누가 겁이라도 먹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어디서 허접한 사술하나 배워가지고 뻐기긴.”
실제로 무림에 눈이 붉거나 손이 하얗거나 얼굴이 푸르뎅뎅한 놈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서 진짜로 위험한 인간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일례로 마교의 옥골음희 화영영을 들 수 있는데, 그녀는 소수를 익혀서 손이 희다 못해 투명하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런 화영영의 손을 비웃을 놈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죽음보다 괴로운 꼴을 당해야 했으니까.
“곧 뒈지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백정이 왕일을 비웃는 것에는 두 가지가 이유가 있었다.
한 가지는 신체의 이상을 드러내놓고 떠돌아다니는 놈들 중에 실력이 높은 이들이 없었고, 설사 높다 해도 마교나 혈성 같은 곳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보통 무림공적이라는 이름으로 정파의 합공에 사냥당하는 운명을 걸었다.
왜냐하면 이런 신체의 이상을 가져오는 무공의 대부분이, 익히는 방법이 악독하였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신체를 이용하는 것부터, 어린아이의 뇌수를 이용하는 것까지 다양했는데, 악독한 만큼 그 능력이 뛰어나다면 다행이지만, 그런 무공이 또한 드물었다.
두 번째 이유는 사이한 방법인 만큼 부작용도 심해 고수가 되기 전에 죽는 이들이 태반이었기 때문이었다.
***
“왔어?”
“난 뭘 하면 되지?”
왕일은 탁자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읽던 당경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물어보았다.
그런 왕일을 가만히 바라보던 당경이 서책을 덮었다.
“그건 뭐야?”
당경은 대답 대신 물음을 던졌다.
“시전에 나가서 구한 거야.”
“그래?”
날도 없이 그저 도의 형태만 잡아놓은 쇠였다.
도가 부서지는 것을 봐온 당경은 왕일이 일부러 저런 것을 샀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근데 그렇게 들고 다니게?”
도집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손에 들고 있었다.
날이 없기에 도신을 그대로 잡고 있었는데, 모르는 이들이 얼핏 본다면 도집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만큼 도신은 무겁고 뭉툭했다.
“별로 불편하지도 않으니까.”
당경은 말을 시키며 속으로 궁리하고 있었다.
‘어디까지 말해줘야 할까? 묻는 모습이나 요즘 하는 행동을 보면 뭔가 불만이 있는 모양인데.’
“날 믿지?”
“응.”
말은 그렇게 하지만 왕일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일단 이곳 삼강현을 장악하고, 그 힘으로 낭인들을 끌어 모아서 세를 형성할 거야. 그러니 너는 부문주인 천오와 함께 그것을 위해 움직이면 돼. 앞으로 전면에 나서는 것은 네가 될 거야. 나는 놈들에 대한 정보와 앞으로 우리가 갈 길을 위해 준비할 것이 있으니까.”
“알았어.”
“근데, 너는 계속 왕일이란 이름을 쓸 거야?”
“응.”
“알았어. 그럼 넌 나를 부를 때, 휘명이라고 불러줘.”
“휘명?”
“그래.”
석휘명.
이것이 당경의 옛 이름이었다.
일 호라는 이름을 부여받기 전에 가졌던 이름이고, 세상에서 단 세 사람만 알고 있던 이름이었다.
“알았어. 그럼 간다.”
당경은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는 왕일을 향해 무언가 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왕일의 태도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보다 급한 일들은 많고 많았으니까.
먼저 정보를 얻어야 했다.
패진무관에 나타났던 복면인데 대한 것은 나중 일이었다.
그에게 급한 것은 비룡장에 대한 것이었다.
당경의 전각을 나온 왕일이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곳 장원에는 총 다섯 개의 전각이 있었는데, 그중 두 개의 전각을 왕일과 당경이 나눠 썼고, 하나는 장사가 썼다.
고로 나머지 두 개의 전각은 수하들이 사용하고 있을 것이었다.
“아, 빌어먹을! 이제는 애송이들을 떠받드는 신세가 되었네?”
“야, 아니꼬우면 나가라. 누가 붙잡는 다냐?”
“흥! 가면 어디로 간단 말이냐? 이런 촌구석이 아니면 어디서 우리가 목에 힘주고 다닐 수나 있으려고?”
“이번 놈들은 얼마나 갈 것 같아?”
“그 눈알 뻘건 놈은 뭔가 있어 보이지 않디?”
“아서라. 어디 그런 놈들이 하나둘이냐? 나만 해도 얼굴 퍼렇게 하고 다니는 놈이 춘식이에게 몰매 맞는 것을 봤다.”
“하하하. 인마, 그놈은 전날 나에게 줘 터져서 얼굴이 시퍼렇게 멍든 놈이었어.”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들은 왕일을 본다면 넙죽 엎드릴 것이었다.
“이 녀석들아! 말조심하지 못해! 이제 부터는 문주님이라고 불러!”
“천오 형님은 좋겠수다. 부문주로 출세했으니.”
“그러게. 왜 여기 계시우? 전에 부대장이던, 그놈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그놈이 쓰던 전각에나 가시지 않고.”
“흥! 가면 뭘 하냐? 어차피 빈 곳인데. 차라리 네놈들 입조심 시키고 같이 술이나 먹는 게 속 편하지. 그리고 내가 그런 곳에서 거들먹거리는 것 좋아하는 놈이더냐?”
“그게 왜 거들먹거리는 것입니까? 어쨌건 내일은 형님이 사쇼.”
“인마, 형님이 뭐냐? 부문주님이지.”
“그나저나 그 문주라는 애송이보다 애늙은이 같은 놈의 도가 더 매서운 것 같던데요?”
빡!
“악! 왜 때려요!”
“문주님이라고 하랬지!”
“아, 안 듣는 곳에서는 나라님도 욕한다는데 별 걸 다 신경 쓰십니다!”
“그래도 조심해, 이 녀석아. 네 녀석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다 누구 덕분이냐?”
“그야, 혀… 부문주님 덕분이지요.”
“알고 있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란 말이다. 알겠냐? 그게 이런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다. 남보다 나서지 말고, 남보다 튀어 보이지 말고,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 하지 말고 말이다. 오늘도 그 철우란 놈이 먼저 뛰어나가서 어떤 꼴이 되었는지 보지 않았느냐.”
“쳇! 그만하세요. 귀에 딱지 앉겠어요.”
“그나저나 오늘 번 서는 당번이 샛방 놈들이기에 다행이었지, 자칫 했으면 몇 놈은 못 볼 뻔했구나.”
“흥! 놈들에게는 날벼락이지만, 우리에게는 천행이었지요.”
“근데 부문주님, 오늘 같은 날은 신임 문주가 있는 돈이라도 털어서 한턱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보통은 그랬잖아요.”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왕일이 들어왔다.
***
“어… 어쩐 일이십니까, 문주님.”
천오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켁, 켁, 꺼윽!
여기저기서 먹던 술이 목구멍에 걸렸는지 기침하는 소리가 요란했고, 왕일이 그런 그들과 천오를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나머지는 어디 있지?”
짧은 말이었지만, 왕일은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강한 모습을 보여주려 수하들에게 반말로 일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사소한 결정은 왕일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동안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왕일의 물음에 천오가 앞으로 나섰다.
“다른 놈들은 옆 전각에서 지냅니다.”
얘기하는 천오나 듣는 무사들이나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친하지 않나? 오늘 사람이 죽었는데도 별로 신경을 쓰는 분위기가 아니군.”
“그 자식들이야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우리를 제외하고 있던 이들 중에서 반수는 전에 이곳을 다스리던 놈이 데려온 것이고, 나머지는 이번에 죽은 그놈이 데리고 온 놈들입니다. 오늘 죽은 놈들이 바로 그놈들입니다.”
천오는 넉살도 좋은지 새파랗게 어린 왕일이건만 꼬박꼬박 존대했고, 얼굴에도 별다른 거부감은 없었다.
“그럼 이들은?”
“이놈들 말입니까? 험… 뭐, 이놈들이야 거의 이곳에서 자랐다고 보면 되는 놈들이지요. 타지에 한두 번씩은 나갔다 왔지만, 죽도록 고생만 하고 다시 고향을 찾은 경우지요. 아, 물론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촌구석을 벗어나는 꿈은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씩은 가졌을 것이었고, 그것이 가난한 집안의 아이라면 더욱 더 간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집을 나서서 성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안 죽고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이들은 그럭저럭 성공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럼, 이들과 다른 전각에 있는 이들이 전부인가?”
“예? 아, 그야… 마을에서 심부름하는 애들이 있지만, 그야말로 완전히 어린애들입니다. 고아거나 집이 너무 어려워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일하는 아이들입지요.”
천오는 이 삼강현의 토박이였다.
그가 이곳에 자리 잡고 나서 윗대가리를 몇이나 갈아치웠는지 셀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죽는 동안에도 천오는 계속 이곳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결코 우두머리는 되지 못했지만, 그들보다는 오래 살았다.
그것이 그가 깨우친 생존방식이었다.
“모두 연무장으로 불러오도록.”
말을 마친 왕일이 바로 방을 나섰다.
“천오 혀… 아니, 부문주님. 무슨 일 같습니까?”
“낸들 알겠느냐?”
“술 사주려는 분위기는 아니고, 설마 우리 잡는답시고 오밤중에 한바탕 굴리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모른다고 했잖아, 인마! 뭐 하냐, 어서 샛방 놈들 불러오지 않고.”
“제가요?”
“그럼 내가 가리? 빨리 불러와.”
“에이, 그놈들하고 마주치기 싫은데… 막내야.”
빡!
“악! 왜 때려요!”
“그놈들 있는 데 막내는 왜 보네! 저번에 그 꼴을 보고도 혼자 보낼 셈이냐!”
나이어리고 경험이 적은 막내는 놀려먹기 좋은 상대였다.
“알았어요. 내가 갔다 올게요. 쳇!”
***
왕일이 연무장에서 기다리자, 가장 먼저 천오가 와서 섰고, 그 뒤로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수하들이 달려와서 두 무리로 나누어 뭉쳤다.
천오 쪽에 있는 이들을 세어보니 열한 명이었고, 다른 무리는 겨우 아홉 명이었다.
“번은 필요 없다. 불러오도록.”
따로 떨어져 있던 이들 중에서 하나가 뛰어가더니 백정이라고 이름을 밝힌 중년인과 다른 하나를 불러왔는데, 백정이 천오와 마찬가지로 그 무리의 앞에 선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가 그 무리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헤헤헤. 부르셨습니까, 문주님.”
“앉아.”
왕일의 말에 모두 자리에 철퍼덕 하니 주저앉았다.
마치 누가 빨리 앉는지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삼강현에 대해서 말해봐.”
“옛!”
벌떡 일어난 이는 백정이라는 중년인이었다.
그게 반해서 천오와 그 무리들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엇이 알고 싶으십니까?”
“우리… 혈문 말고 누가 또 있지?”
왕일은 혈문이라는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름만 거창한 진천문이라는 놈들과 구룡장이라는 놈들이 있습니다.”
“놈들의 수와 실력은?”
“비슷합니다. 진천문 놈들은 한 열댓 명 되고 구룡장 놈들은 한 이십여 명 됩니다. 실력은 모두 거기서 거기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인원이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처럼 고정된 인원이 아니라 변동이 무척이나 심하니까요.”
“우리가 가진 것과 놈들이 가진 것은?”
“에… 우리는 특별하게 가진 것이 없습니다. 기루 서너 곳과 시전의 점포에서 거둬들이는 돈이 전부입지요. 진천문은 도박장을 하나 운영하고 있고, 구룡장은 진짜 이름만 거창했지 도둑놈들의 소굴이고, 전문적으로 장물을 처리하는 곳이지요.”
“그들을 어째서 치지 않은 것이지?”
“그것은…….”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아직 이곳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었다.
왕일의 시선이 자연스레 천오에게로 향했고, 그 시선을 받은 천오가 마지못해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놈들을 치는 것에 어려움이 좀 있습니다. 우선 놈들은 치자면 동시에 두 곳 모두를 쳐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째서?”
“우리가 어느 한쪽을 공격하면 나머지 놈도 득달같이 달려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둘 모두에게 공격당하면 우리가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좋아. 그럼, 놈들은 어느 정도 협력관계인 모양인데, 어째서 이곳을 내버려두었지?”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왕일을 힐끗 바라 본 천오가 말을 얼버무렸다.
“그래?”
“예.”
왕일이 뚫어지게 바라보자 처음에는 당당하게 바라보던 천오가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무슨 놈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은 왕일의 눈은 마치 무간지옥에서 방금 뛰쳐나온 악귀와도 같은 느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