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상들의 무림 생존기-29화 (29/138)

29화

“그렇단 말이지. 그럼 공식적으로 놈들의 뒤를 캘 수 있겠구나.”

“예. 그것을 위해서 당가와 제갈세가 등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곧 무림맹의 이름으로 대대적인 조사를 할 것입니다.”

구양신마와 구음신마는 마교의 권력을 놓고서 교주와 대립하다가 죽었다고 소문난 인물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어째서 정파의 기수라고 할 수 있는 당가와 제갈가를 언급하는가?

“그것은 무림맹에 맡기고, 일단 패진무관을 안정시킨 연후에 산서성을 손에 넣는 것에 주력하도록 하여라. 내가 보기에는 쉽게 정체를 알 수 있는 놈들이 아닌 것 같다.”

“그럼 계획은?”

“아무래도 조금 늦춰지겠지.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한철진에게 경고하도록 하여라.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말이다.”

“차라리 이 기회에 없애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직은 아니다. 그 아이의 준비가 미흡하다. 그 아이가 힘을 가질 때까지는 어떻게든 놈을 이용해야 한다.”

“예.”

구양신마의 입에서 나온 그 아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한철진과 관계된 것은 분명했다.

***

“으음…….”

정신을 차린 왕일이 주위를 둘러보려고 고개를 움직이려다가 바로 옆에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당경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순간 그런 당경의 얼굴과 죽은 동생의 모습이 겹쳐졌다.

“경아! 경아!”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이익!”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워낙 당경이 세게 안고 있어서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일을 안은 당경의 손은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헉, 헉…….”

간신히 당경의 품에서 벗어난 왕일이 당경의 가슴에 귀를 댔다.

“살아있구나.”

당경의 심장소리를 들은 후에야 왕일은 안도하며 그 옆에 널브러졌다.

휘이이잉!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왕일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실 차가운 계류에서 익사하지 않았어도, 체온이 떨어져 죽었을 둘이었지만 자체치유력이 발휘되면서 몸에서 열이 난 왕일 덕분에 당경도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당경이 왕일을 살렸지만, 왕일도 당경을 살렸다고 할 수 있었다.

“쉴 곳을 찾아야겠어.”

왕일은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자초지종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몸을 일으키려던 왕일이 갑자기 멈췄다.

[와… 왕일아… 나… 나를 요…….]

문득 장수련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과 함께 악귀 같은 얼굴로 자신을 향해서 장력을 발출하던 한철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두고 봐!’

주먹을 꽉 쥐었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잊지 안고 있으면 언젠가는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응?”

당경을 업은 왕일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였지만, 상당히 가뿐하게 업었다.

힘이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좋은 현상이었다.

‘갚아준다! 꼭!’

발걸음을 옮기는 왕일의 얼굴은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굳어졌다.

부모의 원수는 누군지 모르지만, 한철진은 그렇지 않았다.

아련한 신기루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의 눈앞에 선명히 자리하고 있는 존재였다.

차가운 물에 옷이 젖었기에 오한이 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업은 당경의 체온과 자신의 체온으로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그런 왕일의 눈에 멀리 폐사당이 보였다.

“으… 으…….”

“경아?”

열이 펄펄 끓는 당경은 헛소리마저 하고 있었다.

“아… 안 돼! 팔 호! 안 돼!”

‘팔 호?’

불을 피우기 위해서 마른나무를 모으고, 나뭇가지를 비비던 왕일이 알 수 없는 당경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갸웃했다.

“십칠 호! 너마저… 너마저… 용서 않겠다! 용서하지 않겠다!”

소리를 지르며 깨어난 당경이 막 불을 지피고 있는 왕일을 바라봤다.

“깼어? 괜찮아?”

왕일이 불을 피우고 나서 당경을 향해 다가갔는데, 그런 왕일을 본 당경이 움찔 하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당인가?’

당경의 눈에 부서지고 쓰러진 동상이 보였다.

‘거미줄에 먼지 또한 자욱한 것을 보니 버려진 지 오래 된 곳인 모양이군.’

“윽!”

갑자기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에 당경이 신음을 흘렸다.

“많이 아파?”

왕일이 급히 다가서며 당경을 부축했다.

“좀 더 누워 있어.”

“여긴 어디쯤이지?”

당경의 물음에 왕일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모르겠는데?”

“바보같이! 빨리 불을 꺼!”

당경이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억지로 몸을 일으켜 문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왜 그래?”

비틀거리는 당경을 바라보는 왕일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불이나 꺼!”

너무도 정색을 하였기에 왕일은 어쩔 수 없이 흙을 덮어서 불을 끄고는 서둘러 당경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는 동안 당경은 몸을 문에 기대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경아, 도대체 왜 그러는데?”

“너는……!”

당경이 소리를 지르다 말고 말을 멈췄다.

“아니야. 놈들이 혹시 쫓아올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최대한 멀리, 그리고 인적이 없는 곳으로 도망가야 해.”

“그렇구나.”

“아무 소리 말고 날 따라와.”

당경이 비틀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왕일이 부축하려고 했지만 끝내 손길을 뿌리치고 자신의 발로 걸었다.

‘일단 회주님을 찾아가야 한다. 하지만…….’

당경은 일 호로서의 기억이 돌아왔다.

그가 생각하기에 부회주가 독아를 드러냈다면 회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놈들은 우리가 죽었다고 판단할까?’

이미 한 번의 죽음에서 살아왔다.

그렇다면 쉽게 자신의 죽음을 믿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흔적을 숨기고, 몸을 피해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내가 다 나을 때까지는 이놈의 도움을 받아야 해.’

***

당경이 왕일을 재촉해 도착한 곳은 섬서성과 가까운 곳에 있는 천문산이었다.

“왕일아.”

“응? 왜?”

“내가 지금부터 몸을 회복해야 하니까, 가서 요기가 될 만한 것 좀 가져와봐.”

“알았어.”

천문산 중턱에 자리한 동굴로 들어온 당경이 왕일에게 음식을 마련해오라고 시키고는 자신은 운공에 들어갔다.

“역시…….”

백회가 닫혀 있었다.

이번에는 패진무관에서 배운 토납법을 이용해 몸을 점검했다.

“큭! 이런 제기랄!”

단전 부근에 작은 상처가 있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했다.

“빌어먹을!”

단전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껏 모아놓은 내공은 흔적도 없었고 조잡한 기만 약간 뭉쳐 있을 뿐이었다.

어린 시절 고통스럽던 수련과 회주가 떠올랐고, 십칠 호와 팔 호의 죽음이 떠올랐다.

또한 당정과 지낸 시절도 떠오르고, 왕일과 생활하던 기억도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때 역체변환술을 펼친 상태만 아니었어도…….”

십육 호 등의 기습을 받을 때, 당경은 역체변환술로 어른의 형상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렇지 않고 본 모습이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복수를 다짐하지만, 당경은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다시 내공을 익힌다고 해여도 언제 복수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가 익힌 내공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혼자서는 익힐 수 없는 내공이었다.

처음 내공을 익힐 당시 받아들인 독이 있어야만 했다.

아마 부상을 입을 당시 독이 폭주하였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내공을 모두 소진한 모양이었다.

이나마 회복한 것도 기적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경도 왕일과 같은 혈도 불구의 상태인 것이다.

‘회주…….’

그를 한 번도 정식 이름으로 부르지 못했다.

‘아버지.’

일 호는 회주의 숨겨둔 아들이었다.

아니, 숨겨두었다기보다는 회주가 석가장을 가로채기 전에 알던 여인에게서 태어났다.

회주의 과거와 그가 아버지라는 것을 안 것은 수련동에 들어가기 일 년 전이었다.

‘그리고 당정.’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당정의 모습이 같이 생각났다.

단 이 년의 생활이었지만, 그가 느껴보지 못했던 부정을 충분히 알게 해준 기간이었다.

퍽!

당경의 주먹이 동굴 벽을 후려쳤고, 이내 그의 주먹에서 피가 흘렀다.

“크큭!”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다.

만일 예전 무위라면 부서진 것은 동굴이었으리라.

지금이라도 회주가 있는 석가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부회주라면 결코 회주를 그냥 내버려뒀을 리가 없었다.

‘그토록 조심하라고, 먼저 선수를 치자고 말을 했건만!’

사람이 너무 좋아도 탈이었다.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이다. 목표가 같을진대, 누가 수장인 것이 중요하겠느냐? 그가 요구한다면 회주 자리를 주겠다. 아니, 원수를 갚을 수만 있다면 더한 것도 하리라.]

‘정말 바보같이 굴더니…….’

지금 석가장을 찾아갔다가는 회주를 만나기도 전에 주위에 널려 있는 부회주의 부하들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다.

‘물론 살아 계신다면 말이지만…….’

***

“경아, 마침 냇가가 있어서 다행히 고기를 잡을 수 있었어.”

왕일의 손에 들린 두 마리의 물고기는 산에 사는 것 치고는 제법 큰 편이었다.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당경이 왕일에게 물었다.

“너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

“…아니, 대충은 알아.”

그러면서 왕일이 한철진이 한 짓과 일단의 복면인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설명했다.

‘그 복면인들이 한철진과 같은 일당이라고?’

당경은 분명 구음신마라는 이름을 들었다.

‘구음신마는 마교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인물. 그렇다면 그들이 마교의 인물들이란 말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내가 알기로 그때 얻은 상처의 후유증으로 전대 교주가 죽었고, 마교는 아직까지 침묵하고 있다. 그것을 연극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럼 어찌 된 영문인가?’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십육 호가 노린 것도 그렇다. 놈은 내가 그곳에 있는지도 몰랐어. 그렇다고 마호성을 노린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 바로 왕일이었다.

“왕일아.”

“왜?”

“네가 어떻게 패진무관에 왔는지 말해줄래?”

“응?”

약간 갈등하기는 했지만, 이내 입을 열어 마을의 몰살과 복면인들에게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좌영호에게 구출되어 황만복에게 치료받은 것까지 모두 말했다.

‘그럼 놈들이 이 아이를 노린 이유는?’

곰곰이 생각하던 당경이 왕일을 바라봤다.

‘분명 놈들이다! 놈들이 벌인 일이다. 부회주 일당이 저지른 일임에 틀림없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럴 것이란 느낌이 왔다.

그때 문득 왕일이 검을 맞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왜… 왜 이래?”

왕일이 기겁을 하며 갑자기 옷깃을 풀어헤치는 당경의 손을 막으려 했지만, 당경이 더 빨랐다.

아니, 예전에 배운 것들이 떠오른 당경의 손놀림을 왕일이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었다.

‘있다!’

심장이 위치해 있을 법한 곳에 아주 작은 상처가 있었다.

‘놈들이 이 아이의 이런 체질을 알고 잡으려 했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너무 지나친 생각이다. 그랬다면 오히려 조용히 이 아이만 들고 나왔겠지.’

산골에서 사라진 애 하나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부모나 동네 사람이라면 몰라도, 관아에서도 사건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것이 몇 백, 몇 천이라면 몰라도 사정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결국 목적은 이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마을을 몰살한 이유가 뭘까?’

아무리 궁리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놈들의 목적이 이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놈들을 공략하는 데 이용할 수도 있고.’

당경은 이미 예전의 당경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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