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본관을 통해 별관으로 나가는 문에서 잠시 한철진이 멈칫했고, 왕일이 그런 그의 시선을 따라 별관을 보니 한 쌍의 남녀가 보였다.
‘누구지?’
한 명은 장수련이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이다!
그 순간 한철진의 전음을 받은 장수련이 몸을 비틀거리며 쓰러지자 남자가 부축하려고 했다.
하지만 장수련은 그의 손길을 애써 뿌리치며 일어서더니 왕일과 한철진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누…….”
말을 하려던 왕일이 멈췄다.
그를 지나치는 장수련이 눈물을 글썽인 채 손으로 입을 막으며 황급히 지나갔던 것이다.
왕일이 보기에는 분명 울고 있었다.
“허… 아직도…….”
알 수 없는 한철진의 중얼거림.
“가서 위로해 주겠느냐? 아무래도 저녁은 다음에 먹어야 할 것 같구나.”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장수련을 쫓아가는 왕일을 바라보는 한철진의 눈이 반짝였는데, 그런 그의 뒤로 의문의 사내가 다가왔다.
“어찌된 영문이냐?”
“오셨습니까?”
“제수씨가 아직 몸이 낫지 않은 것이냐?”
“예. 그런 모양입니다. 좀 나아진 것 같아서 사형을 모시고 저녁이나 같이 하려고 했더니…….”
한철진이 죄송하단 표정으로 대꾸하는 이는 바로 적요신의 대제자인 홍동곽이었다.
“그게 무슨 대수냐? 몸이 우선이지. 자, 내가 어렵게 구한 약이다. 아침, 저녁으로 다려서 먹으면 몸에 좋다고 하니 챙겨주어라.”
약을 싼 종이를 넘겨주는 홍동곽은 약간 작은 듯하지만, 한철진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몸을 가졌는데, 다부지게 보이는 면에서는 오히려 한철진을 능가하고 있었다.
“일단 차린 음식이니 같이 드시지요.”
별관에 차려진 음식은 왕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홍동곽을 꾀기 위한 것이었다.
“괜히 나 때문에 병이 도지신 것 같아서 괜스레 죄송하구나.”
“아닙니다.”
홍동곽과 한철진이 자리에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술을 들이켰다.
“한데, 아까 같이 있던 아이는 누구냐?”
“아! 왕일이라는 아이입니다.”
“그래? 셋째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 그 아이구나.”
“예. 사형께 소개시키려고 데려 왔는데, 안사람이 몸이 안 좋은 것 같기에 위로해주라고 보냈습니다.”
“같은 마을에서 자랐다고?”
“네.”
“마음의 병은 쉬이 낫는 것이 아니니, 제수시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일전에도 두 사람이 얘기를 하고서 약간의 차도가 있었으니,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너도 더욱 신경을 쓰도록 해라.”
“예.”
장수련애 약으로 몸이 피폐해지는 시기에 고향마을의 참사는 한철진에게 변명거리를 만들어주었다.
마음의 병을 얻어 쇠약해진 것으로 무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일과는 다음에 다시 기회를 만들겠습니다.”
“그래라. 나도 꼭 보고 싶구나.”
‘크흐흐흐. 꼭 보게 해주마.’
입가에 흐르는 보기 좋은 미소와는 달리 한철진은 마음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
“누나, 무슨 일이야?”
“흑!”
왕일의 물음에도 장수련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눈물만 흘렸다.
‘꼭, 해야 하나?’
속으로 갈등하는 장수련이었지만, 하지 않기에는 남편인 한철진이 너무도 무서웠다.
그리고 약에 대한 유혹도 너무 강렬했다.
흐느낌으로 시작된 울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통곡으로 바뀌었다.
억지로 울기 시작했던 것이지만, 처지를 생각하고 왕일을 속여야 한다는 사실에 슬픔이 복받쳤던 것이다.
“흐흑… 어어어엉!”
“누나, 울지만 말고 말을 좀 해봐.”
왕일은 장수련의 모습에 어쩔 줄을 모르고 안절부절 하였다.
“그게… 사실 아까 그 사람 때문에… 흑!”
“왜? 그 사람이 때렸어?”
“아니. 그게 아니라… 자꾸… 자꾸…….”
“……!”
장수련이 갑자기 와락 왕일을 안았다.
확 하고 밀려오는 여인의 체취와 뭉클하게 자신을 압박하는 장수련의 몸에 굳어버린 왕일은 그대로 눈만 데굴데굴 굴릴 뿐이었다.
두근! 두근!
왕일의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요동쳤다.
“흑… 아까 그 사람은 홍동곽이라는 남편의 사형인데, 자꾸만 추파를 던지고… 아까도 남편이 좋은 마음으로 식사에 초대했건만, 갑자기 끌어안기에…….”
말을 잇지 못한 장수련이 다시 울음을 터뜨렸고, 왕일은 그런 그녀의 가녀린 몸을 안고서 분노에 몸을 떨었다.
‘어찌… 어찌하여…….’
철사명에게서 홍동곽에 대해 들었었다.
그때는 얼마나 호탕하고 남자다운 사람인지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던 왕일이었다.
“사실 일 년 가까이 밖에 나가지 못한 것은 그 사람이 틈만 나면 찾아와 희롱했기 때문이었어.”
“그런 짐승 같은 자였다니!”
벌떡 일어나는 왕일의 소매를 장수련이 붙잡았다.
“어떡하려고?”
“철 사부님께 말씀을 드려야겠어.”
“하아~ 소용없는 짓이야.”
“왜?”
“홍동곽은 성인군자로 소문이 나 있고, 사람들은 그의 그런 모습만을 봤으니까. 네가 말한다고 해도 누가 믿어주겠니? 이미 그는 명성이 자자한 패진무관의 대제자에 산서성에서도 소문난 부잣집 아들인걸.”
“철 사부님이라면 내 말을 믿어주실 거야.”
“아니란다. 그럴 것 같았으면 진즉에 말을 했지. 어찌 보면 그 사람도 홍동곽과 같은 무리라고 볼 수 있단다. 패진무관에서 홍동곽의 진실 된 모습을 알고 그에 대항하는 사람은 우리 남편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어.”
“관주님은?”
“관주님의 따님과 혼담이 오가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야. 그런데 우리말을 들어줄 것 같니?”
털썩.
자리에 주저앉는 왕일.
그도 알고 있었다.
진실이 있더라도 그 진실이 묻히는 것이 얼마나 쉬운 것인지.
포쾌였던 정곽에게도 듣지 않았던가.
진실은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의 것이지 자신과 같은 촌무지렁이에게는 하등 해당사항이 없는 얘기였다.
“괜찮아. 이대로… 이대로 또 숨어 살면 되니까.”
앉은 왕일의 머리를 감싸 안는 장수련.
왕일의 얼굴이 그녀의 가슴에 파묻혔고, 그 감촉과 향기에 왕일은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누…….”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어주렴.”
머뭇거리던 왕일의 팔이 장수련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네가 와줘서 정말 기뻐.”
장수련의 입술이 왕일의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
장수련의 방에서 나와 탁자에 앉아 있던 왕일의 뒤로 한철진이 다가왔다.
‘잘 했겠지? 하긴 실패한다면 약을 주지 않겠다고 했으니…….’
멍청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왕일을 보면서 한철진은 장수련이 자신의 지시를 잘 따랐다고 생각했다.
“왕일아?”
“예? 아, 아…….”
무슨 일인지 왕일은 한철진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느라 곧바로 숙여버렸다.
그 모습에 한철진의 눈가가 살짝 치솟았지만, 이내 그의 입에 인자한 미소가 어렸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느냐?”
“…….”
“…음, 왕일아, 아까 본 것 말인데, 노파심에서 하는 얘기지만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그저 안사람의 몸이 아팠던 것뿐이니까.”
한철진의 말에 왕일의 고개가 발작적으로 들려졌다.
“그게 아니잖아요!”
왕일의 고함소리에 순간 당황한 듯 보이던 한철진의 얼굴에 가득 근심이 어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지요? 이럴 수는 없잖아요!”
“혹시, 안사람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은 것이냐? 그렇다면 이 시간부로 잊어라. 그것이 너나 우리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니.”
“방법이 없나요?”
“없다. 이곳 패진무관은 홍 사형의 패거리들로 뭉쳐있…….”
“사형이라니요! 어떻게 그런 짐승에게 사형이라는 말을 할 수 있어요!”
“쉿!”
왕일이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자 한철진이 황급히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조심하여야 한다. 예전에도 한 수련생이 우연히 오늘 본 것과 같은 광경을 목도하고 주위에 말을 하고 다녔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고향으로 갔다며 사라졌단다.
“……!”
왕일이 진정된 것 같이 보이자 한철진이 손을 치우며 말을 이었다.
-너의 분한 마음은 알겠지만, 절대 티를 내거나 다른 이에게 말을 하여서는 안 된다. 설사 그것이 경이나 마 어르신이라고 하여도 말이다. 알겠느냐?
왕일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분하다 하여도 어찌 나나 안사람만큼 분하겠느냐.
말을 하는 한철진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제가… 제가 도와드릴 방법이 없나요?
“됐다. 어찌 너의 힘까지 빌리겠느냐? 그리고 홍가는 무공이 높고, 그를 비호하는 무리들도 많아서 어차피 바위에 계란 던지기다. 자칫하다가는 너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르고.”
“전 상관없어요. 그러니 방법이 있다면 말씀을 해주세요.”
“후우~”
일단 한숨을 내쉰 한철진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위험할 것이다.”
“절대, 절대 그런 사람은 용서할 수 없어요.”
“좋다. 나를 돕겠다는 네 정성이 갸륵하구나. 하지만 너에게 위험한 일을 맡길 수는 없으니 그를 기절시키기만 하여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내가 단단히 혼을 내주겠다.”
한철진의 말을 들은 왕일의 머릿속에 황만복이 주었던 마비단이 떠올랐다.
“자, 이것을 받아라.”
미처 왕일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한철진이 작은 흰 봉지를 건넸다.
“만일을 대비해서 가지고 다니던 약이다. 이것을 술이나 물에 풀어서 먹이면, 그 사람은 곧 기절하게 된단다. 그러니 너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뒷일은 내가 처리하마.”
“저…….”
“왜 그러느냐? 혹시 겁이 나는 것이냐?”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럼 되었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너와 홍가의 만남을 주선할 것이니 그때를 노리면 될 것이다. 물론 그 만남은 비밀리에 할 것이니, 너에게 피해가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좋은 약이 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한철진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왕일이 혹시나 거부할 것을 염려해 빠르게 몰아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숙소로 돌아가서도 절대 다른 이에게 말을 하여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나보다도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알겠느냐?”
“네.”
“그럼 돌아가 보도록 하여라. 그리고 다른 이에게는 안사람이 아파서 당분간 간호를 해야 하겠기에 외출을 삼간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내가 연락을 하마.”
“네.”
왕일의 손을 잡은 한철진의 얼굴에서 비장함이 느껴졌다.
“왕일아, 부탁한다.”
“걱정 마세요.”
굳은 다짐을 한 왕일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철진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그것은 먹는 즉시 피를 토하며 죽는 독약이니 네놈이 손을 쓰는 순간,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한꺼번에 정리하고 패진무관과 적미정 그년을 내 손아귀에 움켜쥐게 될 것이다!’
이윽고 완전히 왕일의 모습이 사라지자 한철진이 장수련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주… 주인님.”
한껏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는 한철진을 발견한 장수련이 뒷걸음질을 쳤다.
“아주 잘했더군. 꼬마 놈이 넋이 나갈 정도로 말이야. 그래 어디까지 해줬냐? 그 헤픈 몸뚱어리라도 던져준 것이냐?”
“아, 아니에요.”
“말해봐. 괜찮으니. 난 지금 화를 내는 게 아니야. 일을 잘해서 상을 주려는 것이니까.”
말을 하면서 한철진이 품에서 흰 봉지를 꺼내더니 흔들었다.
“자, 어서 말해봐. 응? 좋더냐? 어린놈의 몸을 품으니 색다른 기분이 들더냐? 응?”
“주, 주인님. 아니에요. 절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서 약을…….”
“이년이 어디서!”
퍽!
“같이 뒹굴었지? 응? 그렇지? 네년의 그 보잘것없는 몸에도 녀석이 황홀해 하더냐? 응?”
퍽! 퍽!
“윽! 아… 컥!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년이 그래도!”
“아악! 예… 마, 맞습니다. 제… 제 몸을 줬습니다.”
“진즉에 실토할 것이지. 그래, 맛이 어떻더냐? 응?”
“좋… 좋았습니다.”
“그럼 그렇지. 역시 네년은 개다. 여기저기 몸뚱이를 함부로 굴리는 네년은 개다.”
“맞습니다. 소녀는 갭니다.”
“개는 개답게 음식을 먹어야지?”
말을 하면서 한철진이 봉지를 찢어 흰 가루를 바닥에 뿌렸다.
“아…….”
안타까운 탄식을 토한 장수련이 허겁지겁 공중에 뿌려지는 가루를 받아먹고는, 그것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지 바닥에 떨어진 약을 핥아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철진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