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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15화 (15/138)

15화

소년들이 중급반으로 넘어갈 무렵에는 장사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왕일의 적수가 되지 못했었다.

물론 도를 들고 싸운 것이 아니라 주먹다짐이었지만.

“솔직히 난 형들이 봐준 거라고 봐.”

쓰러져도, 피를 흘리면서도 벌떡 일어나 덤비는 왕일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봐줬다고?”

“그래. 내가 그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계속 이상했단 말이야.”

“뭐가? 뭐가 이상한데?”

“너 어디 부러진 적 없지? 형들이 진짜 마음먹고 너를 쳤다면 과연 네 뼈가 견딜 수 있었을까?”

“사우 형의 주먹에도 멀쩡했던 나야.”

“흥!”

둘이 말다툼을 하는 사이 진시를 알리는 타종 소리가 울렸다.

“이런! 늦었다. 야! 빨리 먹어!”

둘은 남아 있던 음식을 후다닥 먹어치우고는 연무장을 향해 달렸다.

“우리도 곧 휴식에 들어가겠지?”

소년들이 겨울을 앞두고 중급반으로 올라간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단 내공을 배우면 나머지는 스스로 해야 했다.

좀 더 높은 곳에 이른다면 교두들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단 몇 개월인 겨울 사이에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시간동안 교두들도 자신을 되돌아보고 정진할 시간을 얻는 것이다.

“그렇겠지. 왜?”

“어디 갈 데 있어?”

“아니. 난 이곳 숙소에서 계속 수련할 거야.”

“헤헤. 그럼 나도 이곳에 있어야지.”

“집에 안 가고?”

“가면 뭘 해. 매일 뜨거운 풀무 옆에서 땀만 흘리는걸.”

“훌륭한 대장장이가 된다며?”

“나중에. 아버지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셨어.”

일하기 싫은 것도 있었지만,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눈을 뜨고 마주 본 아버지는 그저 낯선 타인일 뿐이었다.

그렇게 서먹한 가운데, 아버지인 당정이 패진무관의 일을 맡자 졸라서 패진무관에 들어 온 당경이었다.

그에게 거의 헌신적이라고까지 할 정도의 당정이었지만, 아직 당경은 그를 향해 완전히 마음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

***

“늦었구나.”

철사명이 짐짓 인상을 쓰며 말했지만, 진정으로 화가 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오늘은 간단한 말로 수련을 마치고자 한다.”

“네?”

“하하하. 그동안 너희들을 가르친 것이 헛되지 않았는지 떠오르는 것이 있구나.”

깨달음을 의미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것이기에 철사명도 폐관에 들려는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철 교두님!”

“축하드립니다!”

자신의 일인 듯 기뻐하는 두 아이의 얼굴을 보자 철사명은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냥 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오히려 마음이 심란할 것 같아 기다렸는데, 물론 그 대부분의 이유는 왕일이었다.

“이리 앉아라.”

차가운 돌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왕일과 당경은 넙죽 자리에 앉았다.

“경이는 스스로 포기한 것이니, 나중에 나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네.”

내공심법을 일컬음이라.

물론 지금 가르쳐 줄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선례를 남기는 것이 되기에 철사명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왕일아.”

“네.”

“현재 너의 성장속도는 무서운 정도다. 모든 것이 너의 육체 때문이지만 말이다.”

아무리 심하게 움직여도, 죽도록 얻어터져도 그 다음날이면 멀쩡하였고 어지간한 힘에는 부러지지도 않았다.

그것이 마치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강해지는 무쇠와도 같이, 수련을 하면 할수록 맞으면 맞을수록 더욱 뛰어난 효능을 발휘하였다.

“내가 지금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자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힘든 과정을 거치고 남들보다 월등한 성장을 이뤘다는 것에는 칭찬하고 싶지만, 요새 들어서 정신을 다른 곳에 팔고 있는 것 같아 하는 말이다. 너는 설마하니 지금의 상태에 만족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 수련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느냐?”

“저기… 그게…….”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거지 영감탱이하고 투닥거리다가 떠오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아직까지 명확한 실체를 잡은 것도 아니고, 그저 막연하게 그의 머리에서만 맴돌고 있었기에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됐다. 내년에 다시 볼 때는 더욱 성장한 모습을 봤으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네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내가중수법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사물의 겉은 가만히 두고 그 내부를 파괴하는 수법이다. 물론 내공이 있어야 가능한 수법이고.”

왕일이 익히라고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조심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잘 보도록 해라.”

말을 마친 철사명이 옆에 서 있는 높이 이 장에 둘레가 한 자는 될 것 같은 나무를 향해 다가가더니 살며시 손을 댔다.

“너처럼 몸의 단단함만 믿고 있는 이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수법이다.”

그것이 끝이라는 듯 철사명은 왕일과 당경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고는 자신의 처소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경아.”

“응?”

“뭔지 알겠냐?”

남겨진 두 아이는 철사명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무는 멀쩡하니 잘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서진 껍질 조각 하나 떨어진 것이 없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부에서 부순다잖아.”

“그럼, 이 나무가 속은 다 부서졌다는 말이야?”

꼿꼿하게 서 있는 나무가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고 있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

나무에 가까이 다가간 왕일이 나무를 살짝 두들겼다.

퉁!

“멀쩡하…….”

“피해!”

우지직!

철사명이 손을 댄 부분이 꺾어지면서 두 사람을 향해서 나무가 쓰러졌다.

“뭐, 뭐야?”

간신히 나무를 피한 두 사람이 꺾어진 부분을 살펴보고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다 부서지지 않은 껍질 사이로 잘게 찢어진 속살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내가중수법?”

***

“햐~아. 무시무시했지?”

“…….”

“왕일아!”

“응?”

무엇을 생각하는지 옆에서 당경이 서너 번을 불러서야 왕일은 겨우 대답했다.

“그 내가중수법이란 거 말이야.”

“왜? 배우고 싶어? 그러려면 내공을 먼저 배워야 한다잖아.”

“으응…….”

당경은 숙소에 들어와서도 계속 흥분상태였는데, 그에 반해서 왕일은 오히려 차분했다.

아니, 뭔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후회돼?”

생각에 잠겼던 왕일이 당경에게 물었다.

“뭐가?”

“나랑 여기 남은 것 말이야.”

“아니. 내공은 나중에도 익힐 수 있는데, 뭐. 그나저나 오늘이 한 교두님 오시는 날이지?”

“응.”

왕일이 본격적으로 무공을 배우고 두 달이 되어갈 무렵 한철진이 찾아왔고, 그때부터 열흘에 한 번씩은 손수 왕일에게 무공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쳇! 어찌 보면 너는 진짜 복 받은 놈이야. 철 교두님도 부족해서 이제는 한 교두님까지 너를 챙겨주잖아.”

당경의 말을 들은 왕일이 피식하고 미소를 지었다.

‘복 받았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자신과 같은 사고무친의 천애고아는 자칫 노예로 팔려가거나 겨울을 나기 전에 죽을 수도 있었고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그럼에도 배곯지 않고 삼시세끼 꼬박꼬박 먹으며 무공까지 배우고 있으니 어찌 보면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왕일은 그렇게 말하는 당경이 진정으로 부러웠다.

지극정성인 당경의 아버지를 보면서 가만히 누워만 계셔도 좋으니 아버지께서 살아만 계셨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마지막 날이었던 그 순간에도 아버지를 미워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스스로가 졌다.

‘하루만, 단 하루만이라도 아버지를 뵐 수 있다면…….’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말 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이토록 그리워하건만 아직도 부모님의 얼굴과 동생 혜수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왕일아!”

가만히 누워 있던 당경이 벌떡 일어났다.

“왜?”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오늘은 수련을 쉰다고 했잖아. 그리고 이제는 얽매인 것도 없으니까, 가자.”

“너희 집에?”

“어차피 한 교두님이야 저녁에나 오실 거고, 그때까지만 돌아오면 되잖아.”

“글쎄…….”

“가자. 아버지께서도 네가 가면 좋아하실 거야.”

한 번도 당경의 집에 가본 적이 없는 왕일이었다.

시간을 내자면 못 낼 것도 없었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항상 왕일을 주저하게 했는데, 어쩌면 마음 깊숙이 가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 당경의 아버지를 대면하지 못하게 한 것인지도 몰랐다.

“가자, 응? 가서 네가 쓸 도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도 드려보고.”

아무리 서먹한 관계라고 해도 지극정성인 아버지였다.

보고 싶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럴까?”

당경이 왕일을 재촉해 숙소를 빠져나왔다.

***

“싸가지가 땅을 뚫고 대초열과 무간에 닿을 놈아, 어디 가느냐?”

볕이 드는 양지에 허름한 거적을 깔고 앉아 있던 마호성이 왕일을 보고는 시비를 걸었다.

“좋은 방 놔두고 왜 거기 앉아 계시는데요? 할아버지 옷 빠는 누나들이 불쌍하지도 않아요?”

“누가 빨아달라던! 그리고 내가 왜 할아버지야! 이제 겨우 육십이구먼!”

“머리 허여면 다 할아버지지, 별거 있어요?”

“흰머리가 어디 있다고 그래!”

육십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검은 머리를 자랑하는 마호성이었다.

자신은 높은 내공으로 인한 회춘이 그 비결이라고 주장하는데, 주름이 거의 없어 중년으로 보이는 얼굴을 보면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햇빛에 반짝반짝 하는데 안 보이세요? 정 못 믿겠으면 동경이라도 보시던가요.”

마호성이 부스스한 머리를 앞쪽으로 가져와 살펴보는 사이에 왕일과 당경이 달음질쳐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흥, 겨우 새치 몇 개 가지고.”

머리카락 사이로 도망치듯 달려가는 두 아이를 보면서 마호성은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떠올렸다.

“젠장! 애들 몇 대 줘 팬 것 가지고 나를 이따위 곳에다가 처 박아두다니.”

방주인 철골개 방수윤과 협개 좌영호가 떠오르자 절로 이가 갈렸다.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그곳에 가시면 왕일이라는 아이가 있을 겁니다. 그동안 꼬리를 잡지 못했던 악한의 행적이 드러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그곳에 가주십시오.]

[어찌 알았느냐?]

[사실, 왕일이라는 아이가 마을을 학살하고 다니던 놈들의 마수에서 벗어난 유일한 아이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입막음 하려던 시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 주변에 애들 몇을 풀어놨는데, 최근 몇 달 사이에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도 은밀하여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자칫하다가는 놓칠 우려도 있고요. 그러니 보이지 않게 그 아이를 보호할 누군가를 파견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마침 마 장로님께서 사고를 치셨으니…….]

[사고는 무슨 사고야!]

[그렇지 사고가 아니라 권력 남용에 애들을 이용한 사기도박이지.]

[바… 방주님.]

[후개가 될 후보들을 데려다가 대련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사람을 불러 내기도박을 하고, 결과까지 조장해 많은 이득을 챙긴 것을 사고라 하면 안 되지. 그건 범죄라고 불러야 해. 애들 두들겨 팬 것은 뒤로하고도 말이야.]

“쳇!”

입맛이 썼다.

결국 부정으로 벌어들인 돈은 모두 방주인 방수윤의 수중에 들어갔고, 자신은 이곳에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한 것이다.

“치사한 녀석들. 그걸 고자질하다니.”

번 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터졌다.

수십 냥에 달하는 돈을 마호성이 꿀꺽 하고는 후개들에게 은자 한 냥씩만 주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된 후개 후보들이 방수윤에게 찌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후개 후보들의 곡성이 개봉하늘에 울려 퍼진 것도.

“어린놈의 꽁무니나 쫓아다니다니 늘그막에 이 무슨 추태냐?”

깔고 있던 거적을 둘둘 말아서 전각 지붕의 한 귀퉁이에 잘 찔러 놓은 마호성이 사방을 훑어보았다.

“얼마 못 갔군. 제길, 제 사정도 모르면서 어딜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겠다고.”

자신을 노리는 이들이 있다는 말을 왕일에게 할 수는 없었다.

이 일은 적요신과 개방만 아는 사실이었는데, 왕일이 혹시라도 티를 내거나 말실수를 하여 다른 사람이 알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하필이면 나냔 말이야!”

투덜거리는 마호성이었지만, 이 일은 은신과 추적, 온갖 잡기에 능한 그가 제격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마호성이 이곳에 온 일에 흑막이 존재할지도 몰랐다.

“에구, 내 팔자야. 말년에 이게 뭔 고생인지.”

차가운 바람이 지나가고, 그 자리엔 마호성은 사라지고 거적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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