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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14화 (14/138)

14화

“두 번째 보여준 동작을 하려면 반드시 내공이 필요하단다. 육체의 힘만으로는 이를 수 없는 경지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너는 내공을 익힐 수가 없다.”

“왜요? 키가 작아서요? 아니면 살이 없어서요? 이제 열심히 먹을게요. 그리고 키는 사우 형에게 늘여 달라고 할게요. 열심히 늘일게요. 그러면 되지요?”

“하~아. 그런 문제가 아니다. 너에게 준 책이 있지.”

“천자문이요?”“아니, 그것 말고 혈도에 관한 것 말이다.”“네.”

점심을 먹을 때 숙소에 가져다 놓았었다.

어차피 수련하는 이들은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었기에 도둑을 맞거나 잃어버릴 염려는 없었다.

“네가 그 책을 본다면 알게 되겠지만, 내공은 혈도를 이용해 대자연에서 기를 흡수하는 것이란다.”

“그런데요?”

“너는 혈도가 망가졌다. 내공이 지나다녀야 할 길이 막히거나 엉뚱한 곳으로 뚫려 있다는 얘기다. 쉽게 말해서 강이 흘러야 하는데, 길이 막히거나 바다로 가지 않고 오히려 산으로 흐르게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철사명의 옷깃을 잡은 손의 힘이 풀리고 왕일이 비척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그럼, 강해질 수 없단 건가요?”

“강해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에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사우 형보다 훨씬 약해지겠지요?”

“너는 경이를 어떻게 보느냐? 이길 것 같으냐?”

당경이 수련하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지지는 않을 것 같은 왕일이었다.

“네.”

“시일이 지나면 사우가 아니라 경이보다도 약해질 거다.”

“경이보다도요? 제가 이길 가능성은 없나요?”

“네가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경이가 게으름을 피우고 네가 죽도록 노력한다면 그 차이가 메워질 수도 있겠지만.”

잔인한 소리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래도 안 되나요?”

“내가 보여준 것이 내공이 있고 없음의 차이다.”

“…….”

철사명의 말에 왕일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래도 너는 무공을 계속 익힐 생각이냐?”

입술을 꼭 깨물던 왕일이 무언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기…….”

“얘기해 봐라?”

“내공은 세상에 딱 한 종류만 있나요?”

“강호에는 수없이 많은 종류의 내공이 존재한다.”

그 말을 듣고 왕일은 약간 들뜬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네가 혹시나 희망을 품을까봐 말한다만, 그 많은 내공의 종류 중에서 네 혈도에 맞는 내공을 찾기란 요원한 일일 것이다.”

“네? 어째서요? 교두님이 그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것은 아니잖아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모든 내공 심법은 근본이 있고, 그 틀을 이루는 근본은 거의 거기서 거기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혈도를 이용한 무공이 있겠느냐? 각기 근본이 비슷하기에 그 혈도를 이용하여 상대를 제압하거나 죽일 수 있는 것이다.”

“거의라고요?”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인지, 왕일은 철사명에 말에서 희망의 끈을 발견했다.

“그래, 거의 말이다. 하지만 나머지 극히 소수의 내공은 익힌 사람을 미치게 만들거나 평생 불구가 되어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만들 가능성이 큰 것들이란다. 또한 살기를 키워 악한으로 만들기도 하지. 정도의 무공처럼 사도나 마도의 내공도 기본 틀은 비슷하단다. 다만 내공을 흡수하는 형식이 다를 뿐. 앞서 말한 일부분의 정도(正道)를 벗어난 내공은 사도나 마도도 천시하는 내공이다. 그 폐해를 알기 때문이지. 그러니 네가 간절히 내공을 익히고 싶다면, 차라리 새로운 내공심법을 만들어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물론 정도를 바탕으로 해서 말이다.”

“내공심법을 만든다고요?”

“그래. 역사적으로 볼 때, 그런 이들도 있었다. 너와 같이 혈도가 망가지거나 선천적으로 혈도가 기형이라서 도저히 내공을 익힐 수 없는 이들이 선택한 방법이다. 그런 이들 중에는 스스로 내공심법을 만들어 절대 종사가 된 이들도 있었다.”

“그건 어, 어떻게 만드나요?”길이 있다는 말에 왕일이 흥분으로 들떴다.

“내가 말했지? 내공은 토납법에서 출발한다고 말이다. 그 뒤에 기를 빠르고 용이하게 흡수하는 방법을 바로 내공심법이라고 한단다. 다행이 너의 혈도 중에서 토납법을 운용하는 곳은 멀쩡하니, 토납법으로 기를 느끼고 극히 미량의 내공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다. 자칫 네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고.”

“하겠습니다!”

왕일은 굳은 결의가 느껴지는 얼굴로 대답했다.

“알았다. 나도 최대한 도와주마. 일단 너는 단전이 없으니, 토납법으로 기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꾸준히 하도록 해라. 그러다 보면 그 기가 스스로 머물 곳을 찾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가 네가 본격적으로 내공을 익힐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말하는 철사명의 내심을 달랐다.

‘녀석. 이렇게 뭔가에 매달리는 것도 좋겠지. 그 끝이 절망으로 이어져 있다고 해도.’

무림이 시작된 이래로 많은 이들이 내공심법을 만들어왔고, 그 속에서 무림도 커왔다.

하지만 그 긴 역사 속에서 왕일과 같은 처지에서 성공한 이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고, 그중에서 아까 말한 절대강자와 같은 길을 걸은 이는 단 한사람뿐이었다.

그는 ‘불사지존’이라 불린 천오백여 년 전의 인물이었는데, 선천적인 혈도의 기형을 안고 태어났었다.

결국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절대자의 위치에 올랐지만, 너무도 괴팍한 성정과 이기주의로 똘똘 뭉쳐 적을 스스로 만들었었다.

내공심법도 자신에게만 소용이 있는 것이었기에 제자를 들일 수도 없던 그는 결국 정파와 사파의 합공에 홀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또한 그의 비급은 만인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졌으나 누구도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이미 기재라 불리던 이들 몇 십 명이 시도해 봤지만, 결국엔 주화입마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철사명이 도와준다는 말은 자칫 내공에 너무 몰두하여 혹시라도 잘못된 길로 들어설까 두려워 그것을 경계하게 해준다는 뜻이었다.

천의를 거스르는 내공심법을 탐할지도 몰랐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공심법을 연구하는 것도 도와줄 것이지만, 그보다는 왕일의 인성을 키우는 데 더 주력할 생각이었다.

***

첫날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왕일은 바로 당경과 글공부를 해야 했기에 쉴 시간이 없었다.

무언가 언질을 들은 것인지 장사우는 왕일을 내버려두었고, 왕일을 가르쳐야 하는 당경도 덩달아 무리에서 이탈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왜 그렇게 입술을 내밀고 있는데?”

왕일의 물음에 당경이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흥! 너 때문에 아까운 은자 한 냥만 낭비한 결과가 돼버렸잖아.”

“무슨 소리야?”

“저 사이에 끼려고 저번에 잔뜩 사줬단 말이야.”

일곱 명 소년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저희들끼리 낄낄대면서 숙덕이고 있었는데, 물론 그 중심에는 장사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쟤들과 같이 있는 게 좋아?”

“혼자 떨어지는 것보다는 훨씬 좋지.”

“지금은 혼자가 아니잖아?”

“흥!”

투덜거리면서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은 당경 덕분에 왕일은 여름이 시작할 무렵에는 천자문을 다 배울 수 있었고, 혼자서도 혈도에 관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겨울이 시작될 무렵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

쾅!

누군가가 인정사정없이 문을 발로 차고 지나갔고, 그 서슬에 문이 벌컥 열리며 찬바람이 숙소로 몰아쳤다.

“젠장, 빌어먹을!”

인상을 찌푸린 왕일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와, 왕일아…….”

문소리보다도 왕일의 중얼거림에 잠에서 확 깬 듯한 당경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곧 그 두려움의 실체가 열린 문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뭐라고 씨부렸냐?”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머리는 봉두난발을 하고 있는 거지같은 행색의 중년으로 보이는 인물이었다.

깨끗하게 빨아 입은 옷이 거지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그는 개방 인물로 마호성이란 이름의 거지였다.

한 달 전에 갑자기 패진무관에 들이닥친 마호성은 슬그머니 그대로 눌러 앉았는데, 놀고먹을 수는 없다며 맡은 일이 바로 왕일과 당경을 깨우는 일이었다.

“뭘요?”

조금은 움츠린 당경과는 달리 왕일은 마호성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사이로 내뿜는 안광을 마주보며 태연스레 대꾸하였다.

“그 싸가지 없고, 똥탑에 찔려도 오히려 똥탑이 불쌍한 그 지저분한 주둥이로 언어 파괴적 존장 무시 발언을 내뱉은 거지발싸개 같은 놈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똥탑은 겨울에 뒷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자연스런 조형물이었는데, 쌓이고 쌓여 끝이 뾰족한 그 조형물의 끝을 조준하기란 쉽지 않아 당경과 왕일은 심심할 때면 누가 맞추는지 내기를 하곤 했다.

“흐음…….”

왕일의 시선이 마호성의 발로 향했다.

“그런 지저분한 것을 신고 다니세요?”

왕일이 코를 막으며 짐짓 뒷걸음질 치는 시늉을 했다.

“이런 버르장머리가 석 달 열흘 굶은 거지도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빈약한 놈아. 오늘도 해보자는 것이냐!”

팔을 걷어붙이는 마호성 앞에서, 마찬가지로 왕일도 눈에 쌍심지를 켰다.

“적반하장이 뭔 말인지도 모르는 무식한 거지 어르신. 내가 괜히 이러냐고요. 왜 아침마다 그따위로 깨우는데요!”

“뭐? 그따위? 이런 복날 끓인 황구의 똥 찌꺼기만도 못한 놈이 이제는 막말까지 해? 오냐, 오늘 죽어봐라.”

오늘도 변함없이 토닥거리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당경의 눈에 두려움과 동시에 한심하다는 빛이 떠올랐다.

‘왕일이가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겨우 한 달이었다. 사람 망가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역시 옛말 틀린 게 없어.’

근묵자흑이라는 고사를 생각하며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는 당경의 귀로 왕일의 비명과 고함소리가 들렸다.

“컥! 크억! 조… 좀 맵… 꾸엑! 구나! 그래, 죽여라! 죽여!”

“오냐! 죽여주마!”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조용해진 숙소 앞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 자로 뻗어 있는 왕일에게 다가간 당경이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매일 맞으면서 지겹지도 않아?”

당경은 첫날 엉겁결에 왕일과 함께 싸잡혀 맞은 뒤로, 절대 이 두 사람의 다툼에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걸을 수 있겠어?”

걱정하는 당경과는 다르게 왕일의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아직이야. 조금만, 조금만 더하면 뭔가 보일 것 같아.’

“흥, 당연하지! 그런 말라비틀어지기가 삼 년 가뭄의 똥개보다 더한 영감탱이의 주먹질에 쓰러질 내가 아니지.”

왕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당경이 부축하고 있던 어깨를 놓아버렸다.

털썩!

“악! 뭔 짓이야!”

왕일이 소리를 질렀지만, 당경은 왕일의 투덜거림이 들리지 않았다.

‘그 말투만은 닮지 않길 바랐건만.’

왕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호성의 성질은 물론 입담마저 닮고 있었다.

***

“왠지 썰렁하다.”

당경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는 왕일.

아무도 없는 식당은 두 사람에게 허전함을 느끼게 하였다.

“조용하고 좋은데 뭘.”

마지막까지 남아 왕일과 대련하던 장사우도 다른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중급반으로 올라갔고, 평소에 말을 하지 않는 사이였다고는 해도 같이 수련하던 이들이 없으니 식당이 갑자기 넓어 보였다.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는데, 날씨가 추워지니 더욱 그들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지금은 한창 내공을 익히고 있겠지?”

“그렇겠지.”

“부럽다.”

중급반에서는 본격적으로 내공수련을 하였고, 대부분 그것은 새벽과 저녁에 이뤄졌다.

그래서 하급반과 식사시간이 어긋나는 것이다.

이대로 나간다면 거의 그들과 마주칠 일은 없을 터였다.

“우리는 언제나 중급반으로 올라갈까?”

“우리? 너는 갈 수 있잖아. 그렇게 부러우면 지금이라도 올라가.”

당경의 말에 왕일이 조금은 퉁명스런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너와 함께 가고 싶어.”

“평생 못 갈지도 모른다.”

“못가면 또 어때. 나는 무림인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훌륭한 대장장이가 될 거야.”

“쳇! 마음대로 해라.”

당경이 중급반으로 올라가지 않은 것은 왕일과 함께하고픈 것보다도 다른 이유가 더 컸다.

어차피 중급반에 간다고 하여도 또다시 따돌림을 당할 것인데, 친구를 얻은 상황에서 그런 경험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왕일아.”

“왜?”

“이제 마 어르신의 화를 돋우는 것은 그만하는 게 어때? 돌아오는 건 매밖에 없는데, 너 그러다 골병든다.”

“걱정 마. 벌써 이렇게 쌩쌩하잖아.”

“그동안 사우 형한테 얻어맞은 것만으로도 맞는 게 지겹지 않냐?”

“그 대가로 더 강해졌잖아.”

강해졌다는 것은 맞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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