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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6화 (6/138)

6화

“알았어. 그이에게 부탁해볼게.”

대답하는 장수련의 얼굴에는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왕일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고마워, 누나.”

“지금은 그이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니까, 저녁에 말 할 테니 기다려 봐.”

“응.”

패진무관의 관주인 패력도 적요신은 요상한 방법으로 무관을 운영했는데, 그의 세 제자를 모두 교두로 내세운 것이었다.

다른 문파의 직전제자들이 무공을 배우느라 사람들의 이목에서 멀어지는 것이 대부분인 현 세태에 비한다면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적요신의 생각은 달랐다.

[사람은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르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이것이 그의 신념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경험담이었다.

아무튼 그날 왕일은 장수련의 도움으로 패진무관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고, 수련은 삼 일 후부터였다.

***

‘참으로 배짱이 두둑하다니까.’

일 호를 발견한 십칠 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에 맡은 문파인 모양이지? 그나저나 일 호가 저렇듯 본모습을 보이고 행동할 정도라면 멸문으로 결정된 것인가?’

평상시 자신들은 절대 본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일 호는 달랐다.

가끔 저렇듯 역용을 하지 않고 일을 처리할 때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일 호의 본모습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십칠 호뿐이었다.

회주와 부회주도 이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 일 호의 모습을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벌써 십 년이 훨씬 넘었으니 기억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었다.

‘멸문이면 귀찮은 일도 있을 텐데…….’

자신은 방금 소문파를 회유하고 온 길이었는데, 그에 비하면 패진무관은 소문파가 아니라 중대형 문파는 되었고, 그런 문파를 멸문시키는 일이었다.

거기다 십칠 호는 일을 일을 마친 직후였기에 다른 임무가 없어 여유가 있었다.

-도와줄까? 언제 결행하는데?

전음을 보내자 일 호가 마치 헛소리라도 들었다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으이구, 하여간 철두철미한 것하고는.’

분명 자신을 알고 목소리도 알건만, 마치 놀라운 일을 겪었다는 듯이 좌우를 살피는 일 호의 모습에 십칠 호는 그가 끼어들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알았어. 조용히 할게. 한동안 보기 힘들겠군. 수고해.

전음을 마치고 십칠 호는 무리지어 움직이는 군웅들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왜 그래?”

“응?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왜소한 소년이 머리를 긁적였다.

“실없기는. 그나저나 오늘은 분명히 네가 사주고 싶어서 산거다. 알았지?”

소년의 두 배는 됨직한 체격을 가진 청년이 다짐이라도 받듯이 다시 물었다.

“당연하지. 헤헤.”

헤프게 웃는 소년이 티 나지 않게 주먹을 불끈 쥐었는데, 그 모습으로 봐서 하고 싶어서 한 행동은 아닌 것 같았다.

“대신 내일부터는 나도 같이 끼워주는 거지?”

소년의 물음에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대신 잊으면 안 돼. 보름에 최소한 두 번은 사줘야 한다.”

“알았어.”

소년의 대답을 뒤로하고 일곱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정문을 들어섰는데, 그곳에는 힘이 넘치는 웅장한 글씨가 적혀있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패진무관.

***

도박에 열중하고 있는 사내들의 땀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도방은, 그렇게 시끄럽지는 않았지만 긴장감만은 최고조로 달아올라 있었다.

마침 문이 열리며 시원한 바람과 함께 들어오는 이제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춘삼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에서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어이, 춘삼이 안 죽고 살아있었나? 안 보이기에 어디 가서 칼침이라도 맞은 줄 알았더니.”

그를 발견한 사람이 손을 흔들며 알은 척을 했고, 그를 필두로 여기저기서 사내를 반겼다.

그러나 그런 이들 중 대부분은 후줄근한 춘삼의 몰골을 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자신들의 판에 집중했다.

“흐흐흐. 항주에서 잘 지내다 왔지.”

춘삼의 말에 알은 척을 한 사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항주? 거기까지 갔었나?”

“흥! 이 근처에서 얼쩡댔다간 자네 말대로 칼침을 맞았을 걸?”

“하긴. 그런데, 꼴이 그게 뭔가? 설마 그 많은 돈을 그 사이에 다 쓰고 온 것인가?”

“항주가 물가가 높기는 높더구먼. 은자 백 냥이 어디서 어떻게 사라졌는지도 모르겠어.”

떠날 때보다도 더 초라한 옷차림이었다.

거기에 먼지까지 잔뜩 뒤집어 써, 자칫하면 개방 인물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으이구, 이 미련한 친구야. 그 돈이면 이런 도박판을 벗어나서 새 삶을 살 수도 있는 액수였는데, 그걸 겨우 계집과 술로 날린단 말인가? 자네도 이제 가정을 꾸려야 하지 않겠나?”

“천하에 널린 게 계집인데, 꼭 하나에 묶일 필요가 있나?”

“자식은 봐야지!”

“알았네, 알았어. 내 이번에 한탕하면 생각해봄세.”

그러면서 춘삼은 주사위 놀음을 하는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자, 돌리라고!”

호기롭게 소리를 질렀지만, 춘삼이 꺼내놓은 돈을 달랑 이십 문이었다.

그 돈으로는 몇 판 하지 못하리라.

-십칠 호, 보고가 먼저라고 생각지 않나?

막 물주가 흔들던 사발을 내려놓은 상황이었는데, 춘삼은 귓가에 들리는 전음에 인상을 구겼다.

“소!”

“대!”

여기저기서 돈을 거는 이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발이 올라가고 드러난 것은…….

“대다!”

환호와 절망이 교차하는 순간.

입맛을 다시는 춘삼이와는 달리 그를 보고 알은 척을 했던 이의 앞에는 제법 많은 양의 돈이 쌓였다.

“쩝. 이봐, 동춘이.”

“안 되네. 알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친해도 도박장에서 돈거래는 안 한다는 것을.”

“제길, 첫판부터 재수 옴 붙었군.”

동춘은 투덜거리며 도박판을 떠나는 춘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돈이 떨어졌다 싶어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또 돈을 가지고 오거든. 하긴, 그동안 딴 돈이 얼만데 꿍쳐놓은 것이 있겠지.’

이내 그의 머릿속에서 춘삼은 지워졌다.

새로운 판이 시작된 것이다.

***

“쳇, 어차피 보고만 하면 그만인 것을 이리 서둘러야겠소?”

투덜거리는 이는 춘삼이라는 이름의 사내였다.

“십칠 호. 내가 분명히 경고했다. 한 번 더 나를 무시하는 행동을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이다.”

“응? 그런 적이 있었던가? 가만있자… 좀 생각을 해 봅시다. 그러니까, 들은 것도 같고.”

머리를 갸웃거리는 십칠 호를 바라보는 중년인, 송만휘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옳지! 이제야 기억이 나는군. 맞소, 맞아. 그런 말을 했었지요. 자, 그럼!”

갑자기 십칠 호가 기세를 올리자, 순식간에 그의 앞에 있던 책상이 튕겨져 나가고 방 안의 기물들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크윽!”

어느새 십칠 호는 송만휘의 목을 틀어쥐고 그의 눈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를 어떻게 할 건데? 응?”

송만휘의 얼굴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는데, 이대로 조금만 지난다면 생사를 장담하기 힘들 것이었다.

“왜 말이 없어? 감히 너 따위가 그따위 하찮은 지위로 나를 기만하려고 들어? 나도 분명히 경고했었다. 내 앞에서 건방떨지 말라고 말이다. 내가 얻은 십칠이라는 번호가 네놈에게는 그렇게도 우스워 보였더냐? 응? 응?”

그 순간 복면인 한 명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그만하지.”

굵게 울리는 음성은 그 자체로도 중년인의 목을 잡고 있는 십칠 호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을 정도의 공격력을 가지고 있었다.

“켁! 켁!”

바닥에 주저앉아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중년인을 바라보던 십칠 호가 가루가 되어 부서진 자신의 소매를 보았다.

“이건 도전이냐, 십육 호!”

중년인을 향하던 기세가 살기로 변하며 새로 나타난 인물을 향해 쏘아졌다.

쾅!

기세만 격돌했을 뿐인데 방을 이루고 있던 벽이 부스스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만일 외벽에 철판을 덧대지 않았다면 그대로 터져나갔으리라.

“회에서는 우리가 서로 싸우는 것을 금했다.”

“그럼, 방금 전의 행동은 무엇이지?”

“하극상을 막은 것뿐이다.”

“흥!”

십칠 호는 아직도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는 송만휘를 경멸하듯이 바라봤다.

“네 잘난 상전한테 똑바로 전해. 수틀리면 진짜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그리고 다시는 이런 머저리를 보내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이다. 아니면, 또 다시 실종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퍽!

“꾸엑!”

송만휘를 걷어찬 십칠 호가 방을 나섰다.

“흐음…….”

송만휘는 한 대 맞은 것이 잘못되었는지 이제는 바닥을 박박 기고 있었는데, 그런 그를 바라보는 십육 호의 눈은 무심함 그 자체였다.

십칠 호의 행동을 말리기 위해 나온 것 치고는 중년인의 안위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크윽!”

“조용.”

십육 호가 송만휘의 발을 짓이기며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었다. 네놈이 할 일은 이곳에서 십칠 호와 팔 호의 행동을 감시하는 것뿐이니, 너무 나대지 말라고 말이다.”

“예, 크윽…….”

“어르신께서 네놈을 특별히 여기시지만 않았다면 당장에 네놈의 목을 잘라버렸을 것이다.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조용히, 그리고 얌전히 네가 맡은 일에만 충실하도록. 그렇지 않았다간 네놈의 목을 뽑아버릴 테니까. 내게 그렇게 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예!”

“알았으면 그만 나가봐라.”

고개를 숙이며 나가는 송만휘를 십육 호가 다시 불렀다.

“송만휘.”

“예.”

“경거망동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송만휘가 나가고 생각에 잠겨 있던 복면인도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

“부회주님, 일을 서둘러야겠습니다.”

십육 호의 말에 부회주라 불린 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과 인자한 눈매.

마치 마음씨 좋은 동네 훈장을 보는 것 같았지만 그 눈 속에는 범접키 힘든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아무리 흑룡들의 정보를 차단한다고 해도 일 호의 실종소식은 곧 전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를 따르면 흑룡들의 반발을 사게 될지도 모릅니다.”

“흐음… 일 호의 죽음은 확실한 것이냐?”

“네.”

“시체를 찾지는 못했지?”

“오 호의 쇄룡지에 단전이 뚫렸고, 구 호의 천살각에 머리가 반이나 함몰되었었습니다. 그리고 제 검이 확실하게 놈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그 상태로 절벽에서 떨어졌으니, 살아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얼마나 더 정보를 차단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각 흑룡들의 활동 구역이 다르고, 모든 임무는 비밀이니 쉽사리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만, 문제는 회주입니다. 그가 일 호를 아낀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일 호에게서 오랫동안 소식이 없다면 회주가 나설 테니, 그렇게 되면 일 호를 지지하는 흑룡들도 모일 것입니다.”

“그리되면 안 되지.”

“물론입니다.”

“알았다. 현재 물망에 올라 있는 문파가 있으니, 결정을 서두르도록 하마.”

“일 호의 능력을 감안한다면 만마문 정도는 되어야 납득할 것입니다.”

“참고하도록 하지.”

그때 누군가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냐?”

“장주님. 남궁세가주께서 오셨습니다.

“알았다. 곧 가마.”

부회주가 눈짓을 하자 십육 호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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