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딱히 더 이상 비밀로 할 필요도 없었기에 오히려 개운하달까. 덕분에 지금은 가면 없이 돌아다니는 중이다. 졸지에 양면검의(兩面劍醫) 같은 이상한 별호가 돌아다니는 것도 같지만.
“왜 우리 스승님 놀려요? 기권패 주제에!”
“내가 기권하고 싶어서 기권함? 야, 금태양! 제자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임?”
큰 포부를 가지고 화산지회에 임했던 당당은 모용가 무인들과의 일전에서 갖고 있던 암기를 전부 소진하는 바람에 되레 화산지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검으로도 충분히 싸울 수 있지만, 그래도 당가의 대표로 참석했는데 암기를 보여주지 못하는 게 말이 되냐며 고집을 피웠다.
하지만 역으로 엉뚱한 곳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화산지회 참석도 못 하고 할 일이 없자 검 한 자루에 몇 가지 마비산 등을 가지고 치안 유지에 나섰던 것이 의외로 명성을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닿은 자리가 미친 듯 간지러운 독, 눈에 뿌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상대를 편안하게 제압할 수 있는 독, 눈과 코, 피부에 닿기만 해도 너무 매워서 기침을 하게 되는 독 등. 부작용 없이 일 각 정도 효과가 지속되어 상대를 빠르게 무력화시킬 수 있는 독들이 빠르게 입소문을 탄 것이다.
길 위의 인생이라 위험한 상황이 많은 보부상들이 발 빠르게 구매했고, 화산지회를 구경하러 와 있었던 정왕은 곧바로 귀부인들에게 선물해야겠다며 대량의 물건을 계약했다. 나도 의원들에게 지급하려고 상당한 양을 사들였다. 당장은 사천당가가 대량생산을 할 처지가 못 되어서 장 의원과 협력해 태양의원의 의약당이 생산을 돕기로 했지만.
전혀 엉뚱한 분야로 독의 명가 사천당가의 이름을 널리 알려버린 걸 보면,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딱 맞다 싶기도 하고.
“아, 이제는 제자 아니지 않음? 다시 거지굴로 돌아간다고 했잖음.”
“그, 그래도 한번 스승님은 영원한 스승님이죠!”
이제 훌쩍 커버린 신생이 내 팔을 와락 끌어안았다. 사슴 같은 눈망울은 아직 어릴 때의 느낌이 남아 있긴 했다.
“제자는 제자지만, 이제 어엿한 의원인데. 마냥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지.”
신생은 항주로 돌아가기로 했다. 거기에 태양의원 분원을 차리는 동시에 도개걸로부터 제대로 된 방주 후계 수업을 듣기로 되어 있었다.
벌써 허리춤에 팔결의 매듭이 달려 있는 거 보라지.
그 얘기가 나온 게 어젠데, 벌써 매듭을 주고 간 모양이다. 하긴, 도개걸로서는 신이 날 만도 하지. 신생이 그 얘길 꺼냈을 때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춤이라도 출 거 같았으니.
나는 신생을 도닥여주고 자리에 앉았다. 신생은 과장되게 훌쩍거리며 눈가를 훔치더니, 우리 자리를 벗어나 다른 쪽 객석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남해태양궁과 북해빙궁의 자리였는데, 무와 한, 그리고 태양의원의 아이들이 어울려 놀고 있었다.
“볼 일 다 보니까 가는 거 보셈. 머리 검은 놈 키워봤자 다 쓸모없음. 다 배신이나 때리는 거임.”
“애들은 애들끼리 노는 거지. 금동아, 넌 안 가 봐도 돼?”
남해태양궁주는 이번에 금동이의 어미 되는 신수를 데리고 왔다. 뒤늦게 도착해 우리의 싸움에 끼지는 못했지만, 도망치는 모용가의 잔챙이들을 수거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냐아―
잃어버린 줄 알았던 새끼를 본 어미는 눈물을 글썽였지만 금동이는 한번 그 품에 폭 안겨준 거 이후로는 쭉 내 곁에만 있었다. 남해태양궁주는 여전히 아쉽다는 듯 입을 다시며, 이미 주인을 정해서 그러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래도 이산가족 상봉에는 성공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어미 쪽도 금동이를 보고는 우울증이 가셔서 상태가 좋아 보였으니, 소궁주에게도 짝이 될 멋진 새끼 신수가 태어나지 않으려나.
“머리 검은 것을 거두었다고 반드시 배신을 하리라는 법은 없지.”
새외 궁주들과 눈이 마주쳐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니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큰 형님이었다.
“형님.”
“왔느냐.”
“네, 왔죠. 아무렴 제가 제일 열심히 봐야 하는데요.”
누가 이기든 두 사람이 원하는 바는 들어주긴 하겠지만, 그래도 진 사람에게 졌어도 노력했으니 괜찮다라는 말을 하려면 꼼꼼히 대결을 봐야 한다. 둘 다 자기가 졌으니까 그럴 자격이 없다고 할 위인들이라.
“저쪽 젊은이가 내 사위 될 녀석인가.”
“이기면요. 지면 좀 두고 보셔도 되고.”
“리가 마음을 정했다면 그뿐이지.”
“그런 것치곤 말에 아쉬움이 꽤 묻어나는데요. 정해두었던 사윗감이 따로 있으셨던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하다만, 당사자들의 마음이 서로를 향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가망이 있다 여겼건만.”
“어릴 때요? 저도 아는 인물입니까?”
“네가 가장 잘 알게다.”
누구지? 내가 가장 잘 아는, 내 조카사위가 될 뻔한 인물이었다고?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
이럴 때 홍령이 있었다면 아무개 아닐까요? 하면서 사랑의 작대기를 마구 갖다 붙였을 거다. 아니지, 그것도 뭘 알아야 작대기를 붙이지. 마땅한 후보라고 한다면 생각나는 건 고작 하나정도……?
잠깐만.
“설마.”
“아마 그게 맞을 것이다.”
미친. 온몸에 소름 돋았어. 발가락 털까지 쭈뼛 섰다고.
그 사윗감 후보가 나였다는 얘기야?!
“처, 처음부터 전부 계획이었습니까?!”
“전부까진 아니지만. 그런 쪽으로 흘러가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을 뿐이다.”
미친. 이 사람 대체 어디까지 보고 있었던 거야?!
어쩐지 리가 너무 순조롭게 나한테 왔다고 했어. 아니, 이 시대에 삼촌 조카 사이의 혼인이 흔한 건 아니지만 아주 드문 것도 아니긴 한데.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조, 좋은 계책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네요.”
만에 하나 그렇게 됐다면, 아버지 금왕의 허물은 구 금가장과 함께 사라지고 나와 금리가 신 금가장을 꾸렸겠지.
큰 형님 입장에서도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말뼈다구 같은 놈보다야, 핏줄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동생으로 인정한 나와 소중한 외동딸을 이어주는 게 마음 편했을 거다. 과거에는 내가 몸이 약했지만 이후에는 많은 제약을 벗어던지고 가능성이 있는 걸 보여줬으니까.
내가 전생을 또렷이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것도 아주 가망이 없진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게 더 소름이다.
“저도 많이 늘었다 생각했는데, 큰 형님 앞에서는 아직 쉽지 않다 싶네요. ……그래도 그때는 너무하셨습니다. 아버지 장례에 참석도 못 하게 한 거요.”
“그때는 나도 화가 많이 났으니까.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지만, 그건 미안했다.”
“됐습니다. 저도 비슷하게 갚아드렸으니까.”
서로 묵직하게 한 방씩 주고받았으니 이젠 넘어가야지.
“그래서 그 계획은 계속 하실 겁니까?”
“어떤?”
“구 금가장은 역사 속으로 저문다는 계획 말이에요.”
“……이번에 타격을 좀 입긴 했지.”
“아직 문 닫을 정도는 아니잖아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하나가 죽으면 하나가 사라지는 건 좀 진부하잖아요. 제대로 겨뤄보죠. 어느 쪽이 더 잘하는지.”
“자신 있는 모양이지?”
“대충 체급은 비슷해졌으니 할 만하지 않을까요?”
“아직 그 정도로 비슷하다 할 수준은 아닌 거 같다만.”
금건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닌 게, 구 금가장에는 가장 핵심적인 사업체인 금왕상단과 금왕표국이 있었다. 누님들이 내 쪽으로 옮겨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일부 떨어져 나가거나 개별적으로 구 금가장에 남은 이들도 있어서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거기에 사업에서의 자산은 단순히 자본이나 생산, 거래량 이외에 따져야 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인맥이라든가 유명세라든가, 오랜 세월 거래하며 쌓아온 신의 같은 것도 중요한 자산이다. 신 금가장은 구 금가장에 비하면 그런 무형적인 자산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하지만 그런 건 또 만들어 나가기 나름이지.
“그거 관해서 안 그래도 드릴 말씀이 하나 있었는데. 리가 결혼할 때 저도 같이 할까 합니다.”
“같이? 내 사위가 둘이 되는 것이더냐?”
“아니, 그게 아니라고요!”
어쩐지 큰 형님에게서 사랑의 작대기를 타던 홍령의 모습이 어른어른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다들 저 나이쯤 먹으면 그렇게 되나?
“농이다. 네가 남궁세가의 소가주와 연정을 주고받는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래, 남궁세가란 말이지.”
그제야 내가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한 듯 금건양이 은은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문, 개방과 손을 잡고 남궁세가를 처가로 둘 정도라면 겨루어볼 만하지.”
“그러면 해보는 겁니다?”
“언제든 준비가 되면 들어와 보거라.”
이로서 구 금가장은 자멸하기 위한 어리석은 행보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과거를 반성하고 제대로 된 운영을 하기 위해 힘쓰게 될 것이다. 아버지 금왕으로 받은 유산만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큰 형님과 셋째 형님 두 사람이서 최선을 다하게 되겠지.
우리가 선의의 경쟁을 약속한 그 순간, 비무대 위로 창천과 좌수검이 올라섰다.
“시작하는군.”
심판이 붉은 깃발을 높게 치켜 올렸다. 두근. 어느 쪽이 이기든 상관없다고 했지만 가슴이 뛰었다.
누가 이길까. 두 사람은 어떤 검을 보여줄까.
이윽고 깃발이 크게 허공을 가르며, 두 검수가 서로를 향해 격돌했다.
* * *
사람의 원념이란 지독한 구석이 있다.
그 어떤 술법도 없이, 홍령의 원혼이 그가 애용하던 침에 깃들었던 것처럼, 누군가의 원혼 또한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았다.
그래 봤자 그뿐이었다. 애용하던 물건에 깃들어 잠든 이의 원혼은 수십 년의 세월을 버텼지만 그조차도 없는 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기 자신을 잃어가다가 끝내 저승으로 향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기사 비참한 끝을 알면서도 이 생에 미련을 놓지 못하니 망령이라 부르는 게 아닌가.
자신의 이름조차 잊어버린 망령은 자신의 생 내내 포기하지 못했던 것처럼, 다시금 재기를 다짐하며 원래의 곳으로 돌아갔다.
요녕. 제 이름은 잊었어도 그곳의 이름은 떠오르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여기서 다시 시작할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도, 어떤 예비도 없었지만 망령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망령의 편린일 뿐이었으니 생각이라는 말이 적절치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떤 원혼은 자신의 핏줄에게 깃들어 제 원을 이루었으니 이 망령 또한 운이 좋았다면 그것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 무엇 하나라도 이 땅에 남아 있기라도 했다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피를 이은 이들은 이미 제물로 쓴 지 오래였다. 연이 깊은 자도 없었다. 그 집의 나무를 해오고 밥을 차리고 측간을 치우던 자들까지 전부 갈아 마셔 버렸으니.
돌아다니는 들개 한 마리도, 시든 풀 한 포기조차 없는 땅.
그 자신의 마지막 동아줄마저 사그리 앗아버린 것은 바로 그 망령 자신일지니.
‘아아아아아아.’
망령은 비참하다는 생각조차 잊은 채 비참히 스러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땅에는 망령의 헛된 야망은커녕 원혼 한 자락마저 남지 않은 채, 쓸쓸한 바람만이 남아 메아리쳤다.
<경영의원> 完.
― 지금까지 금태양과 홍령의 이야기를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