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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348화 (348/350)

348화

화산지회 결승에서 일을 벌일 줄 알았던 모용가주가 사실 개막식에 일을 치르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모용가주의 계획을 짐작함에 있어 항상 의표를 찌르는 방향을 연구했다.

내게 그 사실을 노출했으니 그보다 더 빨리 일을 앞당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함정을 팔 수도 있다고 여겼으며,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행보를 보일 거라 예측했다.

동시에, 모용가주는 그 어떤 기상천외한 전략을 세워도 항상 실패를 염두에 두고 제2안, 제3안을 준비하는 성향도 있었다.

그렇게 패턴을 찾아내자 그의 계획을 파악하는 건 쉬웠다.

영혼 상태가 된 모용가주는 다시 깃들 몸을 찾아 후일을 도모할 것이다. 이미 한 번 해본 일이니 어려울 것도 없을 거고, 미리 준비도 해놨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후보는 하나였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며 팔부신검을 뽑았다.

“뭐, 뭐가 말이야? 갑자기 검은 왜 뽑아?”

“모용을인 척 연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안에 모용가주, 당신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요.”

어설픈 연기를 하던 모용가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의 손에는 무기가 없었다. 비밀 통로를 나갈 때 다 치워버렸으니까. 하지만 그 내력이 어딜 가는 건 아니다.

사실 전면전으로 붙어서 이길 자신은 없다.

나는 아까 모용가주 본신과 혼의 연결을 끊느라 상당한 힘을 소모했다. 반면 저쪽은 모용가주의 영혼에 실린 생기에 모용을의 육신이 가진 내공까지 가지고 있다. 홍령의 희생으로 상당한 양의 기가 날아갔지만 여전히 그는 강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 혼자 왔다는 건, 다른 뜻이 있다고 봐도 되는 건가?”

그 또한 자신이 유리한 상황임을 깨달았는지 표정이 변했다. 내가 검을 쥐고 있긴 하지만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뭔가 오해를 한 거 같기도 했다.

“그래, 이해하겠네. 여태까지 함께해 왔는데 갑자기 태도를 돌변할 수는 없었겠지. 하지만 자네도 뒤늦게나마 깨달은 거야. 그자들과 함께해선 자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걸.”

나는 그의 말을 듣는 척 귀를 기울였다. 내게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모용가주의 헛소리를 들어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를 돕게. 그러면 자네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거야.”

“제가 무얼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평등!”

이건 좀 의외였다. 나를 돈에 눈먼 금왕의 아들로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평등이라고?

“자네는 그냥 돈을 버는 걸 좋아하는 장사치가 아냐. 그 돈을 가지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를 바라는 자지. 자네가 해온 일들을 전부 눈여겨 봤다고 하지 않았나? 기회가 없는 자에게는 기회를, 최소한의 기반이 필요한 자에게는 지원을. 부자에게 더 많은 것을 얻어내 가난한 자에게 베풀었지. 만인에게 발언권을 주었고 의견을 경청했어. 토론을 통해 다수의 결정을 모두가 납득하게 했지만 소수의 뜻도 무시하지 않았지. 나는 감탄했네. 나와 함께하자고 했던 것은 거짓이 아냐. 내게는 자네 같은 인물이 필요해.”

시간을 벌기 위해서 듣기 시작한 말이 의외로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내가 해온 일들을 정확하게 보았다. 사실 무림인이 긍정하기 쉬운 가치는 아니었다. 자신의 힘이 모든 것을 증명하는 세계관이 머릿속에 있는 자들 아닌가.

“힘을 추구한다는 것이 반드시 나만 잘 먹고 잘 살자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건 아니네. 그렇지 않나?”

“본인이 그렇다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지금까지의 행보와는 전혀 다른 느낌인데요.”

“이상에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터무니없어 보이는 결과에 도달하려면 과정은 때로 과격한 법이지.”

“이상이라…… 그래서 그 힘을 가져 평등한 세상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 말입니까?”

“그래. 출신과 혈통 따위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을, 그런 법칙을 세울 작정이었다. 모두가 공평한 조건에서 동등하게! 골치 아프고 힘들게 아등바등하지 않고, 서로에게 맞는 일을 하며 조화를 이루는 세상!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한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꿈틀.

모용가주는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열변을 토했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눈에 실핏줄까지 도드라질 지경이었다. 전신에서 몇 가지 생명 반응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지금 이 얘기를 듣는 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의 말에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감언이설이 아니라 솔직한 이상으로 설득하려 하신 점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나도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그 말이 솔깃했겠지. 하지만 나는 그와 비슷한 전생의 역사를 몇 개 알고 있다.

그런 이상적인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절대 권력을 가지고 세상을 신처럼 창조하려고 했던 인물들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그리고 그들이 만들려 했던 사회가 어떤 식으로 타락했는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당신은 신도 아니고, 대단한 위인도 아닌, 그냥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이겠네요.”

평범한 인간.

육신과 영혼이 이어져 있으며 육신이 죽음을 맞이하면 그대로 이 세상을 떠나는, 그런 평범한 생물.

꿈틀.

“제가 왜 싸우거나 하지 않고 여태 당신의 말을 들었는지 아십니까?”

“그게 무슨―.”

“긴 잠에 빠진 걸 깨우려면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그리고 지금, 고독이 깨어났다.

과거 소림에서 모용을의 몸에 심어두었던 그 벌레는 당가의 비술을 통해 잠재워두었다. 잠이 들면 격체전력으로 몸을 파악한다 해도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기에, 모용을의 몸속에는 여전히 고독의 자충(仔蟲)이 잠들어 있었다. 그 사실은 녀석을 기절시켜 놓으면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나는 내 안에 있던 모충(母蟲)에 내공을 집중했다.

“잠깐, 설―”

파삭―

내 안에서 작은 무언가가 터지는 느낌이 났다. 동시에 모용가주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실핏줄이 두드러졌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고, 이내 두 무릎이 바닥에 털썩 소리를 내며 닿았다.

“나는, 난, 이렇게……!”

몸에 퍼진 극독에 저항하려 한 듯했지만, 이건 당가의 절독 중 하나인 고독이었다. 거기에 고독은 잠든 시간만큼 독성이 배가된다. 충분히 잠재웠다 깨우면 제아무리 절대고수라 해도 즉사.

반 각도 지나지 않아 모용가주에게서는 생명 반응이 사라졌다.

“사실 저는 시간이 더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독을 깨우는 거야 얼마 안 걸리는데, 영혼이 완벽히 육신에 달라붙을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나는 대답 없는 모용가주를 보며 혼잣말을 뇌까렸다.

그래서 그의 생명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육신과 영혼의 연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엔 몇 가지 당연한 생명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눈가의 실핏줄이나 목에 핏대를 세우는 것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 말이다.

그걸 알게 된 것도 다 홍령 덕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육신을 아끼지 않고 각종 실험에 함께했다. 마치 의사가 죽기 직전 자신의 몸을 해부실습에 기부하는 느낌이 그랬을까.

혈육의 육신이었기에 보다 강력하게 연결된 몸, 그 육신이 죽음을 맞이했기에 모용가주는 더 이상 혼의 상태로 떠돌 수 없었다.

이제야 겨우, 그 질긴 야욕의 망령이 죽은 것이다.

“어찌 되었나?”

잠시 뒤 따라 들어온 좌수검이 내 곁으로 와 물었다. 진입 이후 얼마의 시간 이상 내가 나오지 않으면 따라 들어와 달라 부탁했는데,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그 시간이 지난 모양이었다.

“보시다시피 끝났습니다. 혹시라도 또 영혼 상태로 빠져나오면 그땐 전력을 다해서 팔부신검으로 베어버리려고 했는데, 그냥 저승 갔네요.”

그랬다간 아마 나도 전력을 쏟은 탓에 반쯤 죽어 있었겠지. 아니, 진짜 죽었을지도.

“안 믿기는군. 정말 끝난 건가……”

“그만한 악당의 최후치고는 좀 초라하긴 하죠.”

치열한 싸움이 있긴 했지만, 그만한 악행과 기나긴 눈물의 시간들을 생각하면 어쩐지 허무한 끝이었다. 수천 명이 격돌한 전쟁도 없었고, 대중 앞에서 그 죄를 고한 후 목을 자른 것도 아니었고, 죽음을 앞둔 그의 반성이나 제발 죽이지 말아 달라는 호소도 듣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것도 제법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악의 최후가 굳이 화려하게 장식될 필요는 없다. 오래도록 여러 사람에게 그 끝이 시원했다며 회자될 필요도 없다. 그런 건 그저 악에게 비석을 세워주는 거와 같은 꼴이다. 누군가는 그걸 보며 더한 악을 꿈꾸게 되어 있다. 그럴 바엔 비루하고 조촐하기 짝이 없는 편이 낫다.

“장례식을 치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래야겠지.”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지금 얘기하는 장례식의 주인은 내 앞에 있는 시신의 것이 아니다.

“제대로 죽은 게 맞다면 그 생기가 이제 전부 섬서로 돌아갔을 겁니다. 그러면 화산에도 다시 매화가 피겠죠?”

“그렇겠지. 붉은 매화와 흰 매화가 어지러이 피어 절경을 이루겠지.”

“홍령이 가장 좋아했던 곳을 알려주세요. 그곳에서 장례를 치르죠.”

“한 곳이 떠오르는군. 두 그루의 나무가 얽히며 자란, 화산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는 절벽이지.”

“경치가 좋겠네요. 실력 있는 숙수들을 불러서 상다리 부러지게 음식을 차리고, 술도 좋은 걸 구비해야겠어요.”

“사람도 많이 불러야겠군. 홍령은 사람들을 좋아했으니까. 아마 장례식이라고 울고불고 하는 것보단 웃고 떠들고 노래하는 걸 더 좋아할 걸세.”

“흥이 많은 사람이었으니까요.”

우리는 모용을의, 모용가주의 그릇이 되었던 시신을 내버려 둔 채 비밀공간을 나섰다. 남현에서 멀리 떨어진 곳과 이어진 통로로 나오자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이렇게―.”

산기슭에는 빽빽한 덤불이 가득 차 있었다. 군데군데 자리 잡은 두툼한 나무 아래 녹음 짙은 그늘이 드리웠고, 그 사이로 한결 서늘해진 바람이 불었다. 어디선가 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함께한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 끝났는감?”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만요. 그래도 도련님이 어련히 잘 알아서 하셨겠거니.”

“스승님!”

“……흥.”

“끝임? 정말 끝?!”

“수고했네. 고생하였어.”

모두들 여상하게 말을 건넸지만 다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도 방주는 깨진 동냥그릇을 흉하게 허리에 매달고 있었고, 은 파파를 비롯한 하오문의 노인들은 흰 머리카락에 굳어버린 피가 염색이라도 한 듯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창천과 당당은 그래도 젊다고 그새 활력을 회복한 모양이었다. 신생이 울먹울먹한 눈으로 내게 달려와 한 팔에 매달렸다. 피곤한 낯이지만 미소를 띤 남궁은하가 다른 한쪽으로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그 외에 정반합의 무인들과 소림, 무당 등 우리와 함께했던 이들이 전부 나를 보고 있었다.

“다들 고생하셨고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대장정의 끝, 대단원의 마무리, 그 누구에게는 깊었던 한의 종식이고 누구에게는 새로운 시작.

뭔가 거창한 말을 해야 할 거 같은데 마땅한 게 생각나질 않는다.

“이제 우리, 밥이나 먹으러 갈까요.”

누군가 김이 샜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군가 하고 봤더니 도개걸이었다. 뭐 그런 시답잖은 말을 하냐며 투덜거렸지만 나는 그냥 빙긋 웃어 보였다.

“이런 시답잖은 말을 할 수 있는 하루를 살기 위해서 달려왔으니까요.”

어제는 죽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꿈꾼다.

너무나 당연했던 것이 불가능했던 사람들을 위해 달려왔던 지난 일 년여.

이제 상처에는 새 살이 돋을 것이다.

왜 나만 살아남았느냐고, 왜 자신이어야 했냐고. 그렇게 자책하며 살기 위해 밥을 넘기는 것조차 고역이었던 사람들은 다시금 맛을 느끼며 식사를 할 수 있을 거다.

악몽에 시달리지 않는 밤은 간만이겠지.

그렇게 다시, 과거에는 당연하게 누렸던 평온한 일상을 향해 나아간다.

앓던 병을 완치한 환자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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