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홍령은 생각했다.
‘아아, 즐겁다!’
귀신의 몸이 된 이후로 검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금태양의 몸에 깃들었던 때도 있지만 그건 그녀 자신의 검이 아니었다.
검은 쓰러트려야 할 상대가,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의미를 갖는 것.
혼령의 상태로는 다시 검을 들 일이 없을 줄 알았던 그녀는 혼백의 기로 만들어진 검을 휘두르며 적을 향해 나아갔다.
자신에게 이런 기회가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불구대천의 원수를 상대하는 결전에서도 자신이 기여할 바는 적었으니까. 불안정한 몸 상태로 내공을 과하게 쓰면 영육의 분리가 빨라질 것이라며 금태양은 거듭 만류했었다.
하지만 죽은 자는 죽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회가 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리라 생각했고 그 결과. 지금 그녀에게 기회가 왔다.
이 싸움은, 오로지 그녀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다.
홍령의 검이 모용가주의 팔을 베었다. 영혼이 비명에 가까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찢겨졌다. 어차피 찢겨진다 해도 팔이 날아가는 게 아니다. 그저 영혼이 갖고 있는 힘이 약해질 뿐.
‘놈이 혼의 상태에 익숙해지기 전에 처단한다.’
혼이 갖고 있는 힘 자체는 모용가주가 더 강력했다.
그의 혼에는 죽기 전의 생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아마 그가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면 손가락 하나로 홍령을 짓누를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홍령은 일 년여 간 구천을 떠돈 탓에 영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금태양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이 일이 아니더라도 금태양의 곁을 떠나게 되었으리라.
[어, 어떻게, 어떻게 이런……!]
모용가주가 격한 비명을 토해냈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나. 홍령의 눈이 매서워졌다. 그녀가 지금껏 모용가주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약하게 한 지난 일 년여의 경험 덕분이었다.
자신의 영혼체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통제력.
홍령은 그 힘을 전부 모아 검에 담았다. 모용가주는 그 검에 실린 힘을 알아차린 듯 서둘러 도망쳤다. 하지만 홍령은 단 한 호흡 만에 그를 따라잡아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나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어.]
[대체 왜, 누구기에 이런!]
모용가주는 혼란스러웠다. 육신에서 떨어진 영혼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 곧바로 소천 한다. 깊은 한이 있다면 홍령처럼 어딘가에 붙어 지박령이 될 수도 있겠지만, 모용가주의 영혼은 육신을 떠나기 쉽게 술법을 적용했기에 그조차 어려웠다.
방법이 있다면, 재빨리 몸을 갈아타는 것뿐이다.
이를 위해서 최후의 최후까지 안배를 해두었다. 그 방법을 정말 쓰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그것이 있는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문제는 저 산발을 한 여인의 혼.
제대로 된 방향을 향해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운 자신에 비해 저 영혼은 너무나 자유자재로 자신을 공격해 들어왔다. 하나하나의 위력도 무시하지는 못할 수준.
도대체가, 정반합이라는 놈들이 귀신까지 부리는 것인가?
[내 이름은 홍령. 모든 꽃이 저문 화산의 마지막 검.]
자세한 사정을 헤아릴 여유는 없었다. 제 이름을 밝힌 영혼이 귀기 어린 눈을 빛내며 그에게 쇄도했다.
[너를 베고, 이 모든 세상을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게 하리라!]
* * *
찬란한 검격이 하늘을 수놓았다.
홍령의 검은 과거 화산의 검이었다. 나는 그 검을 알았다. 심상 속 화산에서 전부 배웠으니까. 재생의 검은 그 모든 것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검이었기에 기본이 되는 화산의 검도 배워야 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익힌 재생의 검이 검의 레벨로 치면 더 높다.
하지만 왜일까.
홍령이 피워내는 저 붉고 흰 매화 하나하나가 내 가슴을 저미는 것은.
저 혼신의 일격 하나하나에 홍령은 자신의 혼을 걸었을 것이다.
비유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그녀는 자신을 죽여 가며 상대를 향해 검을 내지르고 있을 것이다.
저 싸움을 눈에, 마음에 담을 의무가 있었기에, 나는 그들이 가는 방향을 따라 함께 달리며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홍령은 악귀처럼 모용가주를 밀어붙였다. 모용가주는 처음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도주하다가, 조금씩 영혼으로 움직이는 것이 익숙해졌는지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가 영혼을 움직이는 데 익숙해지자 홍령이 밀리기도 했다.
처음부터 승패가 결정되어 있는 싸움이었다.
가진 힘은 모용가주가 강할지 모르겠지만 홍령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소멸을 각오한 수준이 아니다.
각오가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이다.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챙기려는 자와 공멸을 결심한 이의 싸움이 어떻게 끝날지는 자명하지 않은가.
홍령의 검이 새하얗게 빛났다. 검신부터 홍령의 영혼체까지 눈이 시릴 정도로 빛이 났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것이 홍령의 전력이 담긴 일격이라는 것을.
“홍령!”
그녀의 검이 모용가주의 영혼을 베어낸 순간.
세상이 온통 백매화로 뒤덮인 것처럼 새하얗게 물들었다.
강력한 기의 파동에 영기를 느낄 수 없는 내 주변의 이들마저 눈동자가 흔들렸다. 영기를 느낄 수 있는 술사들은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뇌가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새하얗게 표백된 세상 속, 내가 아는, 그 친근하고 다정하고 때로는 장난스러웠으며, 같이 웃고 같이 슬퍼했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고마워요.]
홍령. 안 돼.
[당신을 만나서, 행복했어요.]
가지 마.
[나의 친구, 나의 동반자, 그리고 내 아들…….]
그럴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가지 마.
[그래도 한 번쯤은, 내가 지은 이름으로 불러보고 싶었는데…….]
무언가 흐린 소리가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이 바람 소리인지 아니면 끝에 가서야 부른 내 이름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소리가 눈물이 되어 내 눈가에 흘러내렸다.
“……그녀는 갔는가.”
좌수검이 물었다. 여전히 홍령이 몸담았었던 육신을 안은 채였다.
“후회 없이 모든 걸 쏟고 갔는가?”
“네.”
그것만큼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말할 수 있었다. 홍령은 그렇게 했다.
“그렇다면, 모든 게 끝난 건가.”
“아쉽게도 그건 아닙니다.”
전력을 다한 공격에도 모용가주의 혼은 소멸하지 않았다. 너무나 큰 힘을 갖고 있었기에 그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혼이 너덜거리는 영혼을 이끌고 화급히 어디론가 도망치는 것을 보았다.
“질기군.”
“원래 악이라는 것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둘 수밖에 없는가? 언제고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수도 있을 텐데.”
그토록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도 도망쳤다니. 모두의 얼굴에 피로감이 역력했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더 끈질깁니다. 걱정 마세요.”
* * *
모용가주는 정신이 없었다. 그만큼 그 일격은 강력했다. 지금껏 남궁가주에게 당했던 그 모든 패배를 깡그리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보다 더 강했다는 게 아니다. 심리적인 충격이 더 컸던 거다.
[홍, 령…… 그래, 마지막 자하신검의 이름이 그런 거였지, 쿨럭…….]
피 대신 영력을 토하며 모용가주는 허겁지겁 자신이 예비해둔 대안을 향해 날아갔다. 이 방법까지 쓰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마음에 안 차는 대안이긴 하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자신이 예비한 것을 찾아냈다.
“크윽, 윽…… 젠장, 금태양 그 개자식. 나를 이렇게 만든 걸 후회하게 해주겠어……!”
그것은 비밀통로 한 곳에 쓰러져 있던 모용을이었다.
창천과 금태양에게 당해 쓰러져 있던 그는 겨우 자신에게 가해진 점혈을 푸는 데 성공한 상태였다. 때문에 밖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모용가주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해두었는지도,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첫째에 비하면 아쉬운 게 많지만 어쩔 수 없지.]
영혼체의 손이 모용을의 머릿속으로 쑥 들어갔다. 그리고 모용을의 혼을 강제로 잡아당겼다.
“어? 어어?!”
[어서 나오거라. 그것은 나의 것이다.]
애초부터 모용갑과 모용을은 이런 상황을 대비해 키운 그릇이었다.
만든 육체와 영혼은 연결이 불안정하다. 하지만 핏줄이 이어진 육신은 훨씬 연결이 강력하다. 이미 한 번 아들의 몸을 빼앗았던 그였다. 손자의 몸을 빼앗는 데는 어떤 거부감도 없었다.
[이 핏줄의 육신은 반드시 남궁가 놈들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지.]
다시 한번 기틀을 닦으리라. 이 다음에는 만들어진 육신과 영혼의 연결을 강력하게 만들 방도를 찾아서, 다시는!
[을아,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 어서 내게 그 몸을 바쳐라!]
“아, 안 돼! 싫어! 이거 놔!”
그런데 예상 외로 모용을이 저항했다. 모용갑은 오래도록 술법을 적용시켰고 붉은 영약을 먹여 취약하게 만들었지만 모용을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이에 저항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주도권을 뺏기면 그대로 죽을 거라는 감각만큼은 확실했다.
“내, 내 몸이야……! 이거 놔! 뒈졌으면 뒈진 대로 죽어!”
[네 몸? 어딜 감히……!]
모용가주의 영기가 거칠게 불타올랐다. 그와 연결된 모용을의 혼이 지옥불에 떨어진 듯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고통은 모용을 그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아악, 아아악!!!”
[그것이 네 스스로 손에 넣은 것이라 생각하느냐? 네가 가진 그 모든 것은 내가 준 것이고, 내가 허락했기에 가능한 것. 그러니 내가 원하면 내게 바쳐야 하는 것이다!]
모용가주가 불길을 더했다. 모용을은 더욱 소스라치게 비명을 지르다가, 이내, 온몸에 힘이 풀려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불타버린 모용을의 영혼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못난 놈. 끝까지 말썽이군.]
또 쓸데없이 힘을 소모했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납득하며 모용가주는 모용을의 몸에 안착했다.
전신의 감각이 돌아오는 느낌 속에서 모용가주는 생각했다. 이번 일을 위해 모용가의 전력을 투자했다. 다시 재기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번에는 중원에서 일을 도모하자. 괜찮은 무재를 가진 여자를 찾아 가정을 이루고 대를 이어 모용가의 핏줄을 희석시키며 혼을 이동한다면 이번과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완벽한 여자를 찾자. 핏줄로 인한 약점 같은 건 없는 여자로. 처음에는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계속해서 최고에 최고를 섞어 개량하다 보면 언젠가, 언젠가는!
그런 다짐과 계획 속에서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설프게 붕 떠 있었던 아까와 달리, 모용을의 육신은 그의 혼에 착 달라붙었다. 마치 원래의 제 몸인 것 같았다. 혼이 가지고 있던 내력도 깃들었다. 이곳을 빠져나가기에는 충분할 거다.
그때,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예상한 대로군요.”
금태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