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모용약방의 비동에서 빠져나온 직후 나는 곧바로 중앙 비무대로 향했다.
“다른 이들은 외곽으로 향했다. 진법을 파괴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그건 함정, 이에요.”
내 등에 업힌 화령이 곧이라도 꺼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의표를 찌르기 위해서 술법의 발동 시기를 앞당겼지만, 이 일대에 전부 적용될 정도로 완성하기엔 시간이 모자랐어요. 모용가주는 범위를 압축시켜서, 작게 만들 거라고 했어요. 그러면 시간이 단축되니까―, 쿨럭.”
“더 이상 말하지 마요. 창천, 우리는 바로 중앙 비무대로 간다.”
창천이 앞장서 길을 열었다. 화산지회 전 갑작스럽게 열린 이벤트 탓인지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용가주는 한 번에 신진 후기지수 다섯을 상대하고 있었다. 젊은 무인들의 기량도 뛰어났지만, 천하제이인이 이들을 데리고 지도대련을 하듯 가볍게 데리고 노는 모양은 또 얼마나 구경거리인가.
소문이 퍼진 건지 사람들은 더 몰려들고 있었다. 화산지회 본 대회도 이렇게 사람이 미어터지진 않을 거 같은데.
일대에 꽉꽉 들어찬 사람들 중 좌수검을 비롯한 정반합의 인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창천의 말대로 함정에 빠진 게 분명했다. 누구라도 빨리 사실을 알아차리고 와주었으면 좋겠는데…….
“저기, 저…….”
“가만히 있어요. 태양의원으로 데려다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서―”
“아니, 혈교의 술사, 저기―.”
화령이 힘없는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사람들의 함성으로 시끌벅적한 와중에도 화령이 가리킨 자는 한눈에 들어왔다. 이 와중에 무대를 보지 않고 무언가 괴이한 진언을 외고 있는데 눈에 띄지 않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최소 서너 명은 휩쓸릴 거다.”
“경상? 중상?”
“중상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전생의 퇴근길 2호선보다도 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여길 뚫고 지나가 놈을 잡으려 들면 칼부림에 최소 셋은 큰 부상을 입을 게 자명한 상황. 창천은 내 명령만을 기다리겠다는 듯 검집에 손을 올려놓고 놈의 동태를 주시했다.
[그 덜떨어진 아이에게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안타깝고 더욱 탐이 나는구나.]
순간 소름 끼치는 전음과 함께 무대 위에서 휘황찬란한 빛이 빗발쳤다. 모용가주의 한 수에 모두가 경악성을 내질렀다. 다섯 명의 후기지수가 그 한 수에 전부 치명상을 입고 자리에 쓰러졌다.
“이 정도가 현 무림이 보여줄 수 있는 수준인가? 화산지회라는 것도 덧없구료. 이 이상 내게 무림의 저력을 보여줄 수 있는 용기 있는 자는 없는 게요?”
모용가주가 자신의 기를 뿜어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 기는 주변에 자신의 존재감을 보이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우리를 향한 압력이기도 했다.
“헉, 허억!”
등에 업힌 화령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기를 두르며 상태를 살피고 나자 눈앞에 있던 혈교의 술사가 자취를 감췄다. 사람들 사이에 몸을 숨긴 모양이었다.
“아직 놓치지 않았어. 가겠다.”
“창천!”
“지금부터 뿌리는 피는 나의 책임이다. 너는 너의 길을 가라.”
창천이 한 발을 떼는 동시에 모용가주의 시선도 그를 따라갔다. 창천이 향한 방향으로 모용가주가 발길을 돌리는 순간.
“너는 그 나이를 처먹고도 성질이 여태 드릅드냐? 애들 데리고 골려주면 재밌어?”
모두를 압박하던 기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천하제일, 남궁우천이 깃털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중앙 비무대 위에 올랐다.
“이제야 주인공이 납셨는가.”
“혹시나 했는데 진짜 나를 부르려고 이런 판을 꾸민 게야? 하여간 너도 복잡하게 산다. 그냥 좋은 술에 젓갈 하나 안주로 놓고 잔이나 나누자 하면 알아서 갔을 것을.”
남궁가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허나 그 젓갈을 뭘로 담갔는지 알아버려서 이제는 장담을 못 하긴 하겠어.”
모용가주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그때 창천이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 술사의 옆구리에 검을 쑤셔박았다.
“크아악!”
“사, 사람을 찔렀어!”
“살인이다! 살인이야!”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비슷한 단말마가 퍼졌다. 방금 전 칼을 맞은 혈교의 술사와 비슷한 차림새, 거기에 칼을 쑤신 자들을 보니 정반합의 무인들이었다. 다행히 빠르게 함정임을 알아차리고 돌아온 모양.
“술도 찬도 없지만 손님이 왔으니 자리는 이제부터 시작을 하면 되겠지.”
허나 술사들이 쓰러졌는데도 모용가주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미소를 띤 거 같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이 세상의 법칙이 뒤흔들리고 역사가 새로 쓰여질 것이다!
그 순간 모용가주의 목소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어떤 신의 부름과 같이 들렸다. 세상이 일그러졌다. 갑자기 키가 커진 것 같았다. 아니, 내 키가 커진 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였다.
“허억, 헉…… 숨 쉬기가 너무 힘들어……!”
“몸에 기운이…….”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그리 약하지 않았다. 대문파의 제자도 있었고 은둔고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힘을 잃었다. 무공을 거의 익히지 않은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과거의 사변이 이랬을까.
하지만 그때와 완벽하게 같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있으니까.
나는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다. 나 이외에도 몇몇이 그랬다. 창천이 그랬고, 정반합의 무인들이 그랬고, 중앙 비무대 위 모용가주의 앞에 선 남궁가주 또한 그랬다.
그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은 듯 꼿꼿이 선 남궁가주를 본 모용가주의 두 눈이 떨렸다.
“어, 어떻게―.”
“그랬구만. 나까지 집어삼켜 유일무이한 괴물이 될 작정이었어. 허허.”
남궁가주가 안타깝다는 듯 웃음을 삼켰다. 그가 저지른 일들에도 불구하고 미운 정이라도 남아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그 순간 남궁가주는 그와 함께 쌓았던 모든 역사를 버리겠다는 듯 검을 뽑아 내질렀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이루어졌던, 천하제일의 좌를 가리기 위한 싸움.
한 번도 모용가주가 이긴 적 없었던 그 싸움은 이번에도 양상이 달라지지 않았다.
모용가주는 강했다. 남궁가주가 튕겨낸 검강에 연부장이 반파되고 그 기세에 휩쓸린 이들이 도륙당했다. 나와 정반합은 기겁을 하며 사람들을 범위 밖으로 내보내느라 뛰어다녔다. 남궁가주도 놀란 듯 눈을 부릅뜨고 모용가주를 막았다.
내가 타고나길 무인의 기질이 없다고 말하는 편이긴 했지만, 사람들을 나르면서도 순간순간 그 싸움에 눈을 뺏겼다. 그만큼 넋을 잃게 만드는 싸움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그 싸움의 여파에 휩쓸려 목숨을 잃을 수 있음에도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 아니, 기어서라도 그 싸움을 더 가까이서 보고자 하는 본 투 비 무인들을 억지로라도 끌어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나도 조금이라도 그 검을 눈에 담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겨우겨우 사람들을 범위 바깥으로 옮겼을 때.
“이로서 끝이로다!”
남궁가주의 외침과 함께 하늘이 반으로 갈라졌다. 하늘을 가른 검이 모용가주의 목을 베었다. 피분수를 쏟으며 떨어져 나간 목은 데구르르 굴러 비무장 아래로 떨어졌다.
어?
이렇게 쉽게?
물론 쉽지는 않았다. 남궁가주의 몸에도 상처가 많았다. 모용가주는 강했다. 그게 진실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피해만을 감수하고 상대를 처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서둘러 모용가주의 잘린 목을 향해 달려갔다. 어쩐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자를 처치하기 위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많은 노력을 했는데―
그때, 잘린 목의 입이 움직였다.
“우, 천…… 나는 평, 생 너를 이길 수 없었지…… 그렇게 짜, 여진 판이니까…….”
기이한 모습이었다. 제 목에서 흘러나온 피웅덩이 속, 동공에 초점이 없는 잘려나간 머리가 입술만을 달싹이며 목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나는 판, 을 뒤집을 것이다……! 이 원한을 힘으로 삼아 다시 태, 어나서……!”
모용가주의 몸과 머리에서 막대한 기가 빠져나가 어디론가 향했다. 그것은 강력한 태풍의 흐름과 같았다.
“쫓아라!”
“저쪽으로!”
“뭐가 어찌 된 게야? 그 친구, 죽은 게 아니냐?!”
당황한 남궁가주가 우리 뒤를 따라붙었다. 상당히 지친 기색이었다.
“일부러 가주 손에 죽은 걸 겁니다! 육신에서 혼을 분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죽음이니까!”
직접 죽음을 꾀해도 되겠지만 그 이상을 노렸다. 혈교의 술법으로 가장 원한 깊은 자의 손에 죽어 그 원한을 힘으로 바꾸는 짓까지.
우리는 남현의 북쪽에 있던 경계를 넘었다. 그리고 가파른 산의 지맥을 따라 내달렸다. 생기를 잃어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죽은 산 속, 그곳을 달리던 정반합의 무인 몇이 무릎을 꿇었다.
“크윽, 몸에 힘이……!”
“다리가 말을 안 들어…….”
원기가 짙어졌다. 그 말은 사람의 생기가 흩어진다는 뜻이다. 비책이 만능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쫓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저기, 저 앞에 있다!”
먼저 달려 나간 남궁가주의 외침이었다. 모용가의 무인들이 시립해 있는 곳. 그곳에는 낯선 인물이 그들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걸치고 새 검을 쥐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새 몸에 혼을 실은 모용가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황으로도 그랬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강력한 힘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는 자신의 힘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우리에게 닿자, 마치 우주가 나라는 작고 사소한 존재를 관조하는 거 같았다.
우주가 입을 열었다.
“새로운 시작이 있기 위해서는 과거를 치워버려야 하는 법이지.”
한 번도 무언가를 벤 적 없는 새 검이 눈이 시리게 빛나며 허공을 그었다.
“모두 내 뒤로!”
남궁가주의 비명과 같은 외침과 함께, 그 빛이 세상을 뒤덮었다. 눈을 뜨고 있으면 눈이 멀 것 같은 빛무리 속에서 나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남궁가주가 전력을 쏟아내 뒤에 있는 우리를 보호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찰나와 같고 또한 엉겁처럼 느껴졌던 순간.
겨우 눈을 뜨자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도 해본 적 없었던 장면이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진 남궁가주와, 오연하고도 실로 무료하다는 태도로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는 모용가주의 모습 말이다.
“이제야 알겠지. 타고난 체질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법칙 속에서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왜곡되었었는지 말이야.”
“자네는 정말이지, 쿨럭. 이렇게까지 해서 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무엇을 얻다니, 이 장면을 얻었지 않나. 정말 모르는 건가? 지금 자네가 잃어버린 바로 그것 말이네.”
모용가주는 무릎 꿇은 남궁가주를 향해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에게만 작게 속삭이듯이, 그러나 이 자리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그 저열한 핏줄의 법칙을 나는 다 부숴버릴 거네. 남궁의 이름을 가진 자는 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 없게 말이야. 그 열등한 피로 이 땅을 전부 적셔버릴 거라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내가 얻은 모든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