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연못 속에는 예상대로 비동이 있었다. 구멍 안으로 한참을 헤엄쳐 들어가자 수면이 나왔다. 수면을 박차고 나가자 어둑한 공간이 드러났다.
삼매진화로 화섭자에 불을 밝히자 주변이 밝아졌다. 곧바로 눈에 들어온 건 벽에 기대어 쓰러져 있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화령!”
나는 바로 화령에게 다가가 맥을 짚었다. 숨이 거의 끊어질락 말락 한 상태. 서둘러 비상약을 먹인 후 나는 고민했다.
여기에서 화령이나 기타 모용가의 비밀을 발견하면, 일단 두고 나는 돌아가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두고 가면 화령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
냐아―
그때 내 품에 숨겨놨던 금동이가 툭 튀어나와 쭉 기지개를 켰다. 이럴 경우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데려온 것이다.
“금동아, 부탁해.”
금동이는 젖은 털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비동을 나가는 수면을 보며 구루룽 소리를 냈지만 이내 첨벙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똑똑한 아이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 상황을 알려줄 거다.
그리고 나는 화령의 응급처치를 이어나갔다. 어느 정도 맥이 돌아오자 화령이 힘없이 눈꺼풀을 들었다.
“정신이 들어요? 납니다, 홍령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같이 가요.”
“아, 안 돼. 위험…….”
위험하다고? 화령의 경고에 나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하지만 사람의 기척은 느끼지 못했다.
“빨리 나가, 이건 함, 정…….”
고전적인 수법인 독이나 마비산의 연기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혈교의 진법을 깔아둔 건가?
“윽, 몸에 힘이.”
나는 과장된 소리를 내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정도도 예상하지 않고 들어온 게 아니다. 우리는 무당신의가 알고 있는 진법을 기반으로 체내의 생기를 빼앗아 가는 술법에 어느 정도 저항하는 대책을 마련했다. 그리고 나는 그 대비를 단단히 하고 온 몸이었다.
진법의 위력은 태양의원에서 술사들과 함께 테스트했던 딱 그 정도였다. 약간 어지럽긴 했지만.
“다, 당신은 대체……?”
“쉿.”
나는 화령의 손을 쥐며 그녀에게도 내 대비책의 힘이 작동하게 해두었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내 생각대로라면, 함정에 빠진 사냥감을 회수할 사냥꾼이 이곳에 돌아올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석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낯익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용을이었다.
“크흐흐. 이 함정에 걸린 게 정말 이 녀석이었을 줄이야. 아버지 말이 맞았군. 그놈들에게 그렇게 협조하는 걸 보니 뭔가 약점을 잡힌 게 분명하다고. 대체 어떤 약점을 잡혔기에 이런 사지까지 굴러들어온 거지? 멍청한 놈.”
모용을은 내게 다가오며 킬킬대더니, 이내 가면을 툭툭 건드렸다.
“난 말이야, 항상 네놈의 이 가면 안 얼굴이 궁금했어. 가면 안에서 날 얼마나 비웃고 있을지 말이야. 근데 이젠 입장이 반대네?”
녀석이 내 가면을 벗겼다. 순간 놀란 듯 녀석은 침묵했다.
“미친, 이 새끼가 그 새끼였어? 이 개자식이 날 놀려?! 내 이름을 멋대로 갖다 써?!”
모용을의 무자비한 발길질이 내 뱃가죽을 걷어찼다. 내공으로 배를 보호했음에도 북 터지는 소리가 났다. 모용을은 분에 못 이긴 채 나를 한참 동안 걷어차다가 숨을 몰아쉬었다.
“씨X, 이 새끼 진짜 그 멍청한 놈 친구 맞아? 거짓말한 거 아냐? 교묘한 새끼, 날 갖고 놀았어. 아버지가 쓸모 있으니까 살려두라고 한 것만 아니었으면 그냥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는 건데.”
“……같은 생각을 했네. 나도 널 살려두려고 했는데.”
“?!”
말을 뱉음과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에게 회심의 한 방을 날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주먹질은 녀석의 뺨을 간신히 스치고 지나갔지만 불의의 일격이었는지 모용을이 휘청거렸다.
나는 곧바로 검을 뽑아들고 녀석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놈을 제압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대비책을 세워뒀다고 해도, 역시 술법의 영향이 적지는 않은 것인지.
“하하하! 큰 소리를 치더니, 잡것이 어딜!”
당황이 가신 모용을이 반격에 나섰다. 곤란한 상황이었다. 화령은 중환자나 다름없었고, 나는 앞으로를 생각하면 힘을 아껴야 했다.
“아버지는 살려두라고 했지만 역시 네놈은 이 자리에서 처리해야겠어. 죽어라!”
그렇다고 날 죽이려고 달려드는 놈을 상대로 힘을 아끼네 마네 하는 생각을 하는 건 사치스러운 일. 나도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팔부신검이 고요한 울림과 함께 모용을의 검과 부딪쳤다.
“윽, 큭―!”
곤란한 상황이라는 건, 힘을 아낄 때나 그렇다는 거지. 제대로 재생의 검을 펼치는 내게 곤란하다는 건 아니다. 하물며 나는 여기 오기 전 무당신의의 내단을 완벽히 흡수한 상황.
“저 검은……! 아아, 화산이여……!”
뒤에서 화령이 무언가 북받친 듯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나는 못 들은 척, 검으로 모용을을 밀어붙였다.
“몇 가지 잘못 알고 계시는 사항이 있습니다, 본부장님.”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첫째, 일단 나는 약점을 잡힌 게 아냐. 정반합이 나고, 내가 곧 정반합이다.”
서의 검이 모용을의 소매를 잘랐다. 얇은 피부 가죽이 칼끝에 걸려 찢기는 느낌이 났다.
“둘째, 네놈 이름을 갖다 쓴 게 아냐. 그건 내 이름이기도 하니까. 너도 알잖아?”
“뭐, 뭐?! 네 녀석 설마!”
본의 검이 녀석의 검을 쳐냈다. 녀석의 가슴팍이 내 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됐다.
“너를 만나서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를 거다. 이제, 전생의 은원을 여기서 정리하자고!”
결의 검, 그 검이 녀석의 가슴팍을 꿰뚫기 직전, 놈이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더니 석벽 한 곳을 내려쳤다. 그러자 녀석이 열고 들어왔던 문이 열리고 이내 사람들의 발소리가 이쪽을 향했다.
“내가 혼자 온 줄 알아? 네놈이 그놈이었다니. 처음 수작질을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모용을은 악을 지르며 통로로 도망쳤다. 따라갈 것인가? 모용가 무인들까지 합세하면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나는 화령도 챙겨야 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녀석이 도망간 쪽에서 지독한 파육음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터졌다. 그중에는 모용을의 것도 있었다. 급히 따라가자 모용가 무인들과 모용을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크윽, 어디서 이런 괴물이……!”
그의 앞에는 창천이 서 있었다. 곧이라도 모용을을 절단 낼 기세였다.
“야! 죽이면 안 돼!”
내 말에 창천은 놈의 목을 베려던 검을 멈췄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네놈, 왜 나에게 반말이지?”
아? 맞다, 아까 모용을이 내 가면을 벗겨서 나는 현재 ‘김진’인 상태. 그리고 창천은 내 주변 사람 중 유일하게 내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금태양인가?”
“그래, 나야.”
목소리로 알아본 건지 창천이 내 이름을 말했다. 내가 긍정하자 녀석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너란 녀석은 가면을 벗으나 쓰나…….”
“아무튼 그 녀석 죽이면 안 돼. 아직 쓸 곳이 있어.”
나는 창천이 반쯤 제압해놓은 모용을에게 다가가 혈 몇 군데를 점했다. 혹시 몰라 다리 한쪽도 분질렀다. 일이 끝날 때까진 괜찮겠지.
“금동이가 제때 갔구나. 너도 제때 돌아왔고. 밖은 어때?”
“모용가주가 무언가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개회 전에 흥을 내보자며 비무대에 올라가 도전을 받는 중이다.”
“뭐라고?”
“그 소식을 들은 정반합의 노친네들이 다급한 표정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보군.”
그나마 다행이다. 다들 움직였구나.
“모용가주가 계획을 앞당긴 거야. 화령을 데려올 테니 길을 열어. 빨리 돌아가야 해.”
나는 다시 석실로 돌아가 정신을 잃은 화령을 업었다. 그리고 모용을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창천과 통로를 빠져나왔다. 통로는 모용가에서 약간 떨어진 곳과 이어져 있었다. 그곳의 문을 열고 나가자 은 파파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지금 내가 괜찮은 게 문제야? 상황은?”
“모용가주가 비무를 한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빠르게 모이고 있습니다요. 모용가 무인들이 근처로 달려가 소문을 퍼트리고 오고 있던 사람들을 더 끌어모으고 있고요. 개회식만큼은 아니어도 이미 모여 있던 고수들이 많아 상당수가 진법의 대상이 되리라 보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어.”
“도 방주와 좌수검이 갔습니다요. 하오문도 사람을 풀었지요. 진법의 거점이 될 만한 곳들로 달려갔으니 곧 진법을 파훼할 수 있을 겁니다.”
모용가주는 성급했다. 우리가 그의 계획에 대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시일을 앞당겨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우리는 모든 전력을 제때 불러 모으지 못했고 진법에 대응하는 것도 완벽하게 마무리 짓지 못했다.
모든 것이 뒤엉켜 혼란스러운 상황. 진법을 펼치기 시작한 혈교의 술사들만 잡아낸다면 그래도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이 될 텐데, 과연―
* * *
“크억!”
좌수검의 자비 없는 손속에 혈교의 술사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렇게 베어낸 것이 벌써 셋. 남현을 빙 둘러 넓은 둘레에 퍼져 있는 술사들을 잡아내느라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과연 제대로 일이 처리된 것인지. 좌수검은 어두운 얼굴로 검의 피를 닦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휘소, 뭔가 이상해.”
휘소, 그 이름에 움찔하며 좌수검은 고개를 돌렸다. 그쪽에는 자신을 따라온 홍령이 있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어째서 이 급박한 상황에 자신을 부득불 따라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진언문인가.”
홍령은 쓰러진 술사가 외고 있던 진언문을 보고 있었다. 화산은 도문이었기에 홍령 또한 도술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었다.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만 진언을 읽고 그 뜻을 파악할 정도는 되었다.
“이거 제대로 된 진법이 아니야.”
“……? 제대로 된 진법이 아니라니.”
“진언도 결국 문장이야. 이건 제대로 된 문장이 아냐. 천자문으로 치면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이렇게 쭉 늘어놓은 단어의 나열이라고. 여기 그려져 있는 진법 그림도 엉터리고.”
그 순간 좌수검과 홍령의 머릿속에 공통된 생각이 스쳤다.
“가짜군.”
“이건 함정이야.”
함정이라면, 무얼 위해서? 두 사람이 동시에 남현 쪽으로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모든 일의 원흉인 모용가주는 그곳에 있다. 진짜가 있다면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함정의 의도는―
“휘소, 가자! 모용가주는 시간을 벌려고 했던 거야!”
“우리를 남현 외곽으로 흩어지게 해 방해꾼을 떨어트려 놓은 거군!”
“그 사람이, 우리 아들이 위험해!”
홍령의 손이 좌수검에게 향했다. 좌수검은 그 손을 단단히 붙잡고는 그녀를 안아들었다. 정말 기억을 잃은 게 맞는 걸까, 그 급박한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 질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는 홍령을 단단히 안은 후 모든 일이 시작되고 있는, 그리고 그 모든 과거를 묻을 그곳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