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개막식이라고요? 얼마 남지도 않았잖아요?!”
우리도 모용가주를 막기 위한 준비를 해오고 있었지만 그건 결승 이후를 염두에 둔 준비였다. 당연히 우리는 반도 준비하지 못했다.
“과연 그런가. 그대를 불러 결승 전까지라는 시간을 제안해 덫을 놓은 거군. 처음부터 그대와 손을 잡을 생각은 없었던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중의 덫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정반합과 함께하기로 결정하면 이 제안은 정보 교란의 효과를 얻는다. 우리는 결승에서 모용가주가 일을 저지를 거라고 굳게 믿었을 거다.
반대로 내가 정반합을 배신하고 모용가주와 손을 잡을 기미를 보였다면, 개막식의 일에서 나는 보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모용가주의 위력을 보고 두려움 속에서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겠지.
“저를 아버지의 아들로 굳게 믿고 있으니, 상인의 특성을 고려한 장난일지도 모르죠. 정반합에 정보도 흘리고 모용가와 손잡는 걸 고려하기도 할 거라고 말입니다. 일단 그거는 둘째치고, 전 다른 게 마음에 걸려요.”
“또 뭔데요? 불안하니까 빨리 말해요.”
“자신들의 의도가 들킬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모용약방으로 불러낸 이유.”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용약방의 준비상태를 보고 두 가지 사실을 엮어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내가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이어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모용가주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데도 블러핑 수단으로 굳이 나를 불러냈다.
거기에 무척이나 호의적이었지.
그 뒤에 어떤 본심이 숨겨져 있든, 겉으로 보기에 모용가주는 나를 원했다. 이럴 때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은 거짓 없는 사실이다. 거짓이 존재하는 것은 그 필요에 대가를 제대로 치르느냐 마느냐와 관련된 문제다.
“모용가주는 의원이 필요해. 그것도 아주 실력 있는 의원.”
내 진짜 실력이 어떻든 간에 나는 현재 사대신의에 버금가는 명성을 갖고 있는 의원이다.
거기에 또 하나.
“술법을 통해 만들어낸 육신을 살려 놓을 수 있는 의원 말이야.”
모용가주는 홍령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살핀 후 우리를 보내주었을 뿐이다.
“화령은 홍령이 모용가주 눈에 띄면 안 된다고 했어. 아마 모용가주가 홍령의 몸을 노릴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이미 한번 혼을 싣는 데 성공한 몸이니 타당한 추측이다. 하지만 모용가주는 딱히 홍령을 과하게 추적하거나 쫓지 않았다. 그 몸이 불안정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이미 그릇이 될 몸을 만든 거군.”
“우리는 이곳에 와서 만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부분도 오판이었어요. 벌써 많은 사람들이 그 몸을 만들기 위해 희생당했을 겁니다.”
“……요녕이군.”
“미친, 자기 땅의 사람들을 제물로 삼은 거임?”
“요녕은 척박한 땅이라 들었다. 거주민도 중원에 비하면 적겠지. 그들을 희생시킨다면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기반 자체가 흔들릴 텐데.”
“맞음,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음! 아무리 잘나봤자 혼자서 농사짓고, 옷을 만들고, 집 짓고, 측간 치우는 일까지 다 하면서 살 수는 없잖음! 그걸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당가도 있을 수 있는 거임!”
한 지역의 지배자나 다름없는 두 명문가의 후계자들이 언성을 높였다.
“거기에 그 땅의 생기까지 빼앗았겠죠. 사회적으로도 그렇지만 물리적으로도 살 수 없는 땅이 되었을 거예요.”
홍령의 차가운 어조에 방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모용가주는 요녕을 버렸어요. 그렇다는 건 중원을 자신의 무대로 만들겠다는 뜻이겠죠. 그걸 위해서는 자신의 그릇이 될 몸을 잘 보살필 존재가 필요해요.”
그래서 날 포섭하려 한 거다. 나는 경험이 있으니까. ‘홍령’을 관리해본 경험이.
“거기에 하나 더.”
나는 모용약방에서 보았던 또 하나의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모용약방에는 무인으로 보이는 이들밖에 없었다. 이게 왜 이상하냐고?
“아직 술법을 쓸 일이 남았는데 술사로 보이는 이들이 눈에 띄지 않았어요.”
“눈에 띄게 돌아다니진 않겠죠. 아니면 어디 멀리 숨어 있거나.”
“모용약방 내라면 모를까, 이 일대는 어디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없어. 저 북쪽을 넘어가면 숨는 게 아니라 그냥 거기 머무르는 거부터 불가능이야. 사람이 다닐 만한 곳 중 소림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지. 애초에 그들을 찾아내는 게 우리의 최우선 목표였다고. 하지만 소림은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어. 그렇다면 혈교의 술사들은 모용약방에 있어야 해.”
소림은 이 일대의 치안도 담당하고 있기에 사람이 오고 가는 것은 전부 소림의 관할 하에 있었다. 모용가는 중원에 들어오면서부터 금왕표국을 통해 이동했다. 큰 형님 금건양은 그와 관련된 장부를 전부 정리해 내게 비밀리에 넘겨주었다. 그 숫자를 고려하면 지금 모용약방에 내가 본 무인들 이상의 인원은 없을 것이다. 오차가 있어 봤자 한두 명 정도?
“몇 가지 가설을 생각해볼 수 있어. 첫째, 모용가주가 술사들마저 그릇을 만드는 재료로 써먹었다.”
“히익.”
“둘째, 술사들이 내분을 일으켜서 한쪽만 모용가주에게 붙고 다른 이들은 숙청당했다.”
“첫 번째는 그럴듯하다만, 두 번째 가설은 근거가 있나?”
“혈교의 수장이 우리를 위해 거짓말을 했거든요.”
섬서를 무대로 삼기 위해 나는 무당의 술사들과 소림승의 힘을 빌어 가짜 술법을 만들어냈다. 섬서에 가득 찬 원기를 이용할 수 있다는 엉터리에 모용가는 섬서 개회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
하지만 그곳에 술사는 화령 혼자가 아니다. 다른 자가 그것이 가짜임을 알고 모용가주에게 고했다면?
“대부분은 화령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지만, 화령이 오기 전 혈교의 술사들 중에는 화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도 있다고 했어요. 그들이 그랬다면……!”
화령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린 홍령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우선은 저들보다 빨리 준비를 마치는 게 중요해. 그리고 동시에 화령의 행방을 추적하는 게 우리에겐 최선이야.”
* * *
쥐를 통한 연락은 성공적이었다. 개방의 거지들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고 정반합의 인력들은 예정보다 빠르게 남현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일을 추진했다.
그들 외에도 사람들은 점점 늘었다. 분명 위험할 수 있으니 무림인이 아닌 이들은 구경을 피하라 알렸는데도 그것이 오히려 호승심을 자극한 듯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호사가나 구경꾼들은 물론이고, 돈 많은 부자나 정부의 관료 등도 물밀 듯이 몰려왔다.
장사를 염두에 두고 달려온 장돌뱅이들은 입이 귀에 걸렸다. 벌써 물건을 털고 서둘러 물건을 가지러 가는 이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그중 우리 태양의원만큼 특수를 누리는 이도 드물었다.
“줄을 서시오! 줄! 새치기하면 다시는 태양의원에서 물건 못 살 줄 아시오!”
“1인 1개 한정이에요!”
“오늘 판매는 끝입니다! 내일 서른 개 선착순 판매합니다!”
이렇게 불티나게 뭘 팔았느냐, 바로 내단이다.
보급형 내단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코 가격이 싼 게 아닌데 판매를 시작하면 반각도 안 되어 물량이 털렸다. 애초에 이걸 사려고 두 시진 전부터 줄을 서 있으니 할 말 다 했지.
“어휴, 겨우 샀네. 이걸 먹어야 좀 살 거 같다니까.”
“주의사항을 듣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내단은 못 샀으니 자양강장제라도 사야지.”
“그거라도가 아니야, 그쪽도 빨리 줄 안 사면 오늘 내로 못 살걸?”
몰려든 사람이 전부 무림인은 아니다 보니 생긴 해프닝이었다. 하루하루 기력이 남다르게 떨어지니 자양강장제와 내단이라도 먹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는 거였다. 그런 상황이니 화산지회 공식 의원인 우리 앞에 줄을 설 수밖에.
사실 그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선발대부터 물량을 넉넉히 가져왔는데도 순식간에 동이 날 정도였으니…….
“장 의원님, 내일은 몇 개쯤 나올 거 같아요?”
“다들 도와줘서 내일은 한 쉰 개는 될 거 같다.”
물량이 동났을 시점부터 빨리 장 의원부터 불러왔다. 후발대로 오기로 한 신의들도 함께였다. 어차피 그들은 정반합의 일 때문에라도 좀 더 빨리 오게 될 예정이었지만, 사실 장 의원은 안 데려오려고 했는데.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쓸데없이 걱정은. 이 정도는 아직 할 만해!”
무리해서 걱정한 게 아니라 다른 쪽으로 걱정한 거였는데. 모용가주가 예상치 못한 식으로 움직이는 상황에서, 가정을 꾸리고 새 삶을 살고 있는 장 의원이 자칫 휘말릴까 봐 걱정했던 거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안 하면 저 사람들 다 비실비실 앓을 거 아니냐. 뭐 좋다고 이리들 몰려왔는지.”
“그러게 말이네. 과거 화산지회 때에 비하면 몇 배는 사람이 많은 거 같으이.”
일을 돕던 민초신의가 거들었다.
“그래서 더 걱정은 되네만 저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라고 한들 들을 리도 없고. 우리가 힘내는 수밖에 없겠지.”
얼핏 듣기엔 내단을 열심히 만들어야 한다는 것처럼 들렸지만, 정반합의 일을 잘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리라.
“전 그럼 잠깐 돌아보고 올게요.”
이제 개막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정반합의 일원들은 창천만 빼고 전부 모였다. 녀석도 빨리 오라고 연락을 하긴 했는데, 보나 마나 길을 잃었겠지. 좌수검이 길잡이를 보낸다고 하니 늦지 않게 도착하긴 할 거다.
“이 바쁜 와중에 가긴 어딜 가?”
“옆집 장사도 잘되나 구경하러요.”
정반합은 혈교가 준비한 술법진을 찾으러 다니고 있다. 이를 사전에 파훼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무당의 술사들은 만약을 대비한 준비를 하고 있고, 무인들은 그 순간 벌어질 일전을 위해 검을 가다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오셨습니까, 금 의원님.”
“네, 가주님 계세요?”
모용약방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소가주님도 안 계신데. 들어가서 기다리시겠습니까? 바로 다과상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아뇨, 됐어요. 오시면 한 상 차려주려고 하실 텐데 그때 같이 먹죠. 후원 구경이나 하고 있을게요.”
그날 이후 나는 수시로 모용약방에 들렀다.
불길하게도 내 예상은 적중했다. 요녕의 정세를 살피러 파견했던 정반합의 무인은 끔찍한 소식을 전했다. 화령과 술사들의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정보는 덤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화령이 살아 있는 모습을 본 이들이 있다는 점 정도. 금왕표국의 표사들은 화령의 용모파기를 알아보았고, 그가 하인처럼 남루한 차림으로 모용약방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남현 일대에서 그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기에, 남은 것은 모용약방 내부뿐.
당연하게도 이 안을 몰래 염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게 가능한 사람이라면 남궁가주 정도였는데 그 인물은 나와 인사를 한 후 대체 어딜 갔는지 부탁은커녕 인사조차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해서 내가 직접 움직였다.
모용가주는 별 용건 없이 방문하는 나를 반겼고 우리는 여상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탐문했다. 모용가주는 내가 자신을 간 보고 있을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는 이 모용약방의 비밀공간에 갇힌 화령을 찾고자 함이었다.
“이 부근 어디라고 했는데.”
가장 유력한 곳은 이 드넓은 연못 아래.
금가장을 통해 손에 넣은 청사진에는 원래 연못이 없었다. 현장에서 관리감독을 한 이에게 물어보자 모용을이 직접 무인들을 이끌고 와 연무장이 될 자리를 팠다고 했다.
“좋아.”
원래도 규모에 비해 사람이 적은 모용약방이라 내 주위엔 사람이 없었다. 한동안 계속 방문하며 한편이 될 거라는 암시를 흘려줘서인지 감시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용가주는 모용을과 함께 황보세가를 방문하고 늦게 돌아오리라는 정보가 있는 상황.
나는 옷가지를 정리해 한 곳에 숨겼다. 안에는 수적들의 물건인 방수복을 입은 상태였다. 그대로 팔부신검만 챙긴 후, 나는 연못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