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일가를 이룰 정도의 경지에 오르는 사람은 범인은 이해하지 못할 독특한 구석이 있다곤 하지만 이건 좀 심하게 독특한걸. 남궁은하만 덜렁 밖으로 내보내서 모든 일 처리를 시킬 때부터 특이하다고 생각하긴 했다만…….
“어서 볼일 마치고 돌아가시지요. 금 의원을 보러 오신 거 아닙니까?”
“그랬던가? 맞다, 내가 얘 얼굴을 보러 왔었지. 그래도 사람이 뭔가 일을 하려면 한번 얼굴은 봐야 하지 않겠냐.”
“제대로 약속 잡고 오시지 않고요. 태양의원은 아직 짐도 못 풀었습니다. 이렇게 예의를 갖추지 않으시면 세간 사람들이 남궁세가를 어찌 보겠습니까?”
“너무 타박하는 거 아니냐? 은하 너도 내 나이 돼 봐!”
아니다. 가주가 특이해서 남궁은하한테 전권을 맡긴 게 아니라, 남궁은하가 자기 조부에게 맡길 수 없어서 자기가 다 짊어지겠다고 혼자 나온 걸지도.
“아이고, 사람들아. 여기 좀 보소! 어린 손녀딸이 다 늙은 쭈그렁쟁이를 구박을 하네, 아이고!”
응, 그게 맞는 거 같다.
갑자기 본 적도 없는 모용가주가 이해가 될 거 같기도 하고…… 진짜 질 만한 사람한테 져야 납득이 가지, 이런 사람한테 평생 동안 번번이 패했으면 나라도 인정 못 했을 거 같으니까.
“조부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어서 볼일 보고 들어가시죠.”
결국 남궁은하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체념이 익숙한 듯도 보이고. 나한테 그런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운지 얼굴이 좀 벌겋긴 하지만…….
“저 노인네 치매 아냐? 같은 헛생각은 마라. 정신머리는 멀쩡하니까.”
“그런 생각 안 했습니다.”
“안 하긴 뭘 안 해? 분명 이따가 은하한테 한번 물어봐야지 생각은 했을 텐데. 봐라, 은하야. 원래 사람을 볼 때는 약속을 잡고 만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대뜸 봐야 하는 법이야. 그래야 민낯이 보이지. 보나 마나 ‘저게 진짜 천하제일이라고?’ 같은 생각도 했을 거다.”
이 정도면 그런 쪽으로 생각하게 하려고 일부러 연기한 거 아냐?!
“본심을 숨기려고 노력은 하는 거 같은데 타고나길 교묘한 놈은 아냐. 좀 어리숙해. 검 또한 그렇겠지. 환검은 맞지 않아. 쾌검도 마찬가지고. 네 녀석은 자신을 꾸미는 게 어울리는 성정이 아냐. 정확히는 그걸 완벽히 꾸밀 수 있는 자질이 없어. 언젠간 무너지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중검을 쓰기에는 무게감이 부족하고, 어디 보자…….”
남궁가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내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당황스러웠지만 놀랍기도 했다. 검을 나눠보기는커녕 검을 뽑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한눈에 파악한다고?
내 스스로 느꼈던 단점, 그 고민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 내다니. 이게 바로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무인인가.
“그래, 네 녀석은 정직한 검이 제일이다.”
내 주변을 뺑글뺑글 돌던 남궁가주는 만족스러운 답을 찾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정직한 검. 검을 처음 배울 때처럼 가장 기본적인 검 말이다. 그때만 펼칠 수 있는 검이기도 하지. 사람은 조금만 배움이 깊어지면 금세 기본을 놓고 다른 걸 하려 들거든. 멋져 보이는 거 말이지. 하지만 제 것이 아닌 걸 하려고 들면 쉽게 꺾이기 마련이야. 그렇다고 정직한 검이 쉬우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 이 검이란 건 사람의 심성을 고스란히 반영한단 말이야. 남에게 정직한 건 그래도 할 만해. 중요한 건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거지.”
그 말에 얼마 전, 홍령과 대화를 나눴을 때가 떠올랐다. 무당신의의 내단을 두고 나 자신을 확신하지 못해 방황했던 그 시간 말이다.
“쉽진 않아. 어쩌면 완벽히 꾸미는 것보다 더 어려울걸? 어설프면 안 하느니만 못하지. 빤히 읽히고, 쉽게 꺾일 거 같고, 흠 하나 찾는 순간 무너지는 게 정직이야. 그런데 말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아느냐?”
“그럼에도 정직한 사람입니까?”
“그래!”
남궁가주가 손뼉을 쳤다. 단순한 추임새가 아닌 진짜 감탄이었다.
“이 질문에 정확한 답을 내놓는 놈은 처음이다. 그래, 네 이름이 뭐라고?”
“금태양입니다.”
“그래, 금왕의 아들이랬지. 그런 검이 무서운 거다. 수를 다 읽어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검, 꺾여도 다시 나아가는 검, 흠이 없는, 이미 그 흠을 인정했기에 되레 무너지지 않는 검.”
검을 논하는 천하제일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내가 걷고자 하는 길이 바로 그 길이다.”
한없이 가볍던 그의 기세가 갑자기 온 세상을 짓누르는 듯했다.
“같은 길을 걷게 될 자를 만나니 반갑구나. 내 검이 너의 길에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는 그 기세가 갑자기 산들바람처럼 가벼워졌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인사는 이쯤 하면 된 거 같으니 이만 가보마.”
“예? 조, 조부님!”
남궁은하가 당황한 사이 남궁가주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어디로 향한 것인지 신형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 귀에는 그의 전음이 들려왔다.
[나는 네가 고맙고 동시에 좀 밉구나.]
전음으로 들려오는 말은 아까처럼 아주 방정맞지도, 아주 진중하지도 않았다.
[모용가주는 좋은 친구였다. 그 아들, 그러니까 지금 그 친구가 몸을 차지하고 있는 현 모용가주, 그 애도 괜찮은 애였지. 친구가 죽었단 소릴 들었을 땐 슬펐고, 그 이후 이해할 수 없는 검을 펼치는 그 애의 모습도 안타까웠다. 인간 같지 않은 검이었지. 이유를 알 수 없었어. 헌데 네 덕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슬프구나. 앎이란 힘이요 동시에 고행이라더니.]
어쩌면 이게 남궁가주가 나를 보러 온 진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말하는 정직이라는 게 뭔지 조금은 알 거 같았다.
[그 보답은 성실히 하겠다. 남은 일은 맡겨두마.]
어쩐지 씁쓸한 말과 함께 마침내 전음마저 멀어졌다. 남궁은하가 벌겋게 물든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안하다. 직접 보았다시피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조부님이라.”
“그러게요. 힘드시겠어요.”
“……!”
“가주께서 정직해지라고 하시기에 한번 해봤습니다. 좀 당황스럽죠?”
“괘, 괜찮다.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소가주가 가주님을 많이 사랑한다는 것도 알겠더라고요.”
진짜 싫어서 부끄러워하는 거랑 사랑하지만 난감해하는 건 보면 티가 나니까. 내 말에 남궁은하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거의 홍시인데. 건드리면 터질 거 같은데.
“일단 들어가죠. 일단 짐을 풀고, 가주께는 정식으로 다시 한번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내가 남궁가주와 인사를 하는 동안, 일행들은 짐을 풀고 정리하고 있었다.
선발대긴 하지만 대회 시작 전에도 언제든 환자가 생길 수 있기에 의원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짐은 전부 챙겨온 상태였다. 말이 최소한의 짐이지, 감기부터 절상까지 대응할 수 있는 짐을 챙기다 보니 수레가 몇 대나 됐다.
금리가 같이 안 왔으니 모든 총괄을 내가 해야 하는 상황. 짐을 풀고 정리하고 확인하는 일까지 하면 하루를 꼬박 다 쓰겠다 생각했을 때.
“작약, 구기자, 황기 개수 맞고, 다음!”
“방 배치도 좀 수정할게요! 그쪽 연무장 옆방은 화산지회 참가할 사람들에게 주고, 애들 방은 주방 옆으로! 그래야 난방이 될 테니까요. 섬서의 밤은 추워요!”
“비단옷 보퉁이 어디 갔어요? 그거부터 찾아줘요!”
내가 손댈 것도 없이 이미 정리가 반 이상 진행되어 있었다. 그 많던 짐들이 태양의원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 배치로 정리가 되어서 쓰기에 편리해 보였고 방 배치 수정 등도 합리적이었다.
“홍령 소저가 일을 잘하네. 의외야.”
“태양의원에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모르는 게 없네요. 알던 사람처럼 편안하고.”
“금 의원님이랑은 무슨 관계려나? 저런 분이 우리 안주인이면 좋겠는데.”
왜 내가 전부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나만큼이나 태양의원의 모든 걸 아는 홍령이 있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금리보다 더 잘 알 거다.
“얘기 끝났어요? 자, 들어가서 이거 입고 나와요.”
“으응? 비단옷? 아냐, 남궁가주랑은 나중에 천천히 약속 잡기로 했어.”
“여기 오는 주요인물이 남궁가주밖에 없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 봤자 뭐 얼마나 빨리 오겠어. 우리야 사전에 준비할 게 많으니까 일찍 온 거고.”
“마찬가지로 준비를 많이 해야 하는 주요 인물이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홍령이 내 뒤를 가리켰다. 누군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모용을?”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녀석은 씩 웃으며 대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중간에 남궁은하와도 마주쳤지만 살짝 목례만 한 게 전부였다.
“나야 잘 지냈지. 너는? 저번에 소림에서 갑자기 인사도 없이 가서 걱정했잖아.”
“갑자기 일이 있어서. 다시 보니까 좋네.”
우리는 누가 보면 매우 친한 친구처럼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녀석의 눈은 어딘가 서늘했다. 그래, 네가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넘어갈 녀석은 아니지.
만만하게 봤던 내게 당해서 고독을 품었던 일, 내가 고독을 제거해준 척했던 일, 그리고 남궁은하를 사이에 두고 경쟁에서 밀렸던 일까지.
그 모든 것이 녀석의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고독을 제거해준 일에 제일 열 받았을걸.
보통 사람이라면 그 불편한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아무리 티를 안 내려고 해도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지금 모용을은 나조차 깜빡 속을 정도로 나를 대하는 게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타고나길 성품이 교묘해 자신조차 그 교묘하게 꾸며낸 것을 진짜 자기라고 믿어버리는 타입의 인물. 그게 바로 모용을이다.
“그런데 무슨 볼 일이야? 아직 기간도 남았는데 빨리 왔네.”
“우리도 미리 준비를 해야지. 태양의원만 공식의원이 아니잖아.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인사도 할 겸 와봤어.”
싱긋 웃으며 말하는 것만 보면 선의의 경쟁에 임하는 좋은 라이벌 같다. 당장 녀석의 진짜 모습을 모르는 우리 의원 사람들도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지 않나.
“인사도 할 겸, 그렇다면 진짜 목적이 또 있다는 거겠지?”
“하하, 뭐가 그렇게 급해.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여기.”
말은 그렇게 하지만 녀석도 딱히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는지 바로 품 안에서 나무로 된 편지함을 꺼냈다.
이런 건 공식 문서를 받을 때나 쓰는 건데. 목갑의 재질부터가 남다른 데다 경첩도 금으로 달려 있는 것이, 예복을 갖추고 받아야 할 거 같은 분위기였다.
목갑을 열어 서찰을 펴자 진중하고 묵직한 필체가 나를 반겼다. 장황한 인사말로 시작된 내용은 모 월 모 일 나를 정식으로 초대한다는 글로 마무리 지어졌다.
초대장을 보낸 이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모용가주였다.
“아버지께서 너를 보고 싶어 하셔. 내가 친구가 몇 없어서 그런가, 좀 궁금하신가 봐. 올 거지?”
오면 얼굴을 보게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당장 보게 될 줄이야.
남궁가주만큼이나 급작스럽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이유는 없지.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지만 한번 가보자고.
“좋아. 모용가주께 그때 뵙겠다고 전해드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