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나와 선발대는 먼저 남현에 도착했다.
“전에 왔을 때보다는 확실히 번듯해졌네요.”
사천으로 갈 때 잠깐 짬을 내서 이곳에 들른 적이 있다. 소림이 생존자들을 돌보던 그 마을 말이다. 그때는 정말 항주의 거지촌이 더 낫겠다 싶었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사람 사는 동네처럼 보였다.
“염려했던 것처럼 기가 흘러나가진 않는군. 확실히 이 땅은 회복 중이구나.”
“그래도 내공 한 자락 없는 일반인은 유달리 피곤해할걸요. 그리고 저기 보이는 저 경계 있죠?”
나는 손을 뻗어 저 멀리, 붉은 나무로 세워진 목책을 가리켰다. 마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지만 우리가 온 방향으로는 없었고, 그 반대쪽에만 마치 만리장성처럼 길게 뻗어 있었다.
“저길 넘어서면 무림인들도 이상을 느낄 겁니다. 혹시라도 저길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나는 남궁은하를 비롯한 내 일행들에게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선발대라고는 하지만 인원이 적지 않아서, 괜히 수학여행 지도하는 선생이 된 기분이었다.
“우린 이대로 대로를 쭉 따라가다가 비무장 바로 옆에 있는 장원으로 갈 겁니다. 거기가 태양의원 임시분원이 될 거예요. 동쪽에 있는 게 우리 거고, 반대편인 서쪽에 있는 게 모용세가가 쓸 모용약방이니 헷갈리지 맙시다.”
이미 사전에 고지한 바지만 일행 중 어린아이들이 있었기에 나는 한 번 더 크게 강조했다.
웬 어린애들이냐 하면, 무와 한의 친구인 바로 그 애들이다. 두 아이가 친구들을 보고 싶다고 해서 데리고 왔다.
후발대로 데려와도 되긴 하지만 애들을 인솔할 만한 사람들, 그러니까 그들 중 제일 연장자라 형님 노릇을 하는 신생, 원래 그들의 스승으로 무공을 가르쳤던 청화가 선발대에 있다 보니 같이 따라오게 됐달까.
거기에 그 아이들의 부모도 결국 태양의원에서 잡일을 하거나 밥을 짓는 등의 일을 했기에, 어디 맡기느니 데려오는 게 나은 상황이었다.
그런 식으로 가족 대부분이 태양의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번 일에 전 가족이 움직이는 집이 북촌에는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후발대에 속해 있었고 내 주요 일행 중 금리는 그들을 인도해오기 위해 태양의원에 남아 있었다.
“옛날 같진 않지만 그래도 확실히 공기가 다르네요. 킁킁, 아, 섬서 냄새.”
“그게 달라?”
“다르죠? 당신도 심호흡 해봐요. 표정은 딱딱해서는.”
“그냥 딴생각 좀 해서 그래.”
“딴생각? 천하제일 미녀 둘을 옆에 끼고 걸으면서 무슨 딴생각을 해요? 소가주, 들었어요? 우릴 양옆에 끼고 딴생각을 했대요.”
“괜한 소리 하지 마. 리 생각을 하고 있었어. 괜찮을까 싶어서.”
“아아, 다른 미인을 생각한 거 맞네, 맞아.”
“뭐라는 거야, 걘 내 조카라고.”
“흐응, 그렇긴 하지만요?”
사실 핏줄로 따지자면 아닌 게 밝혀지긴 했다. 하지만 형들도 진실을 알고도 나를 동생으로 생각하고, 나 또한 그런데, 조카라고 안 그럴까.
“걱정돼서 그래. 표정이 안 좋았잖아. 거기에 이젠 혼자 있고.”
창천이 그렇게 사라진 후, 금리는 확실히 상태가 이상했다. 바쁘게 일하다가도 문득 멍하니 하늘을 볼 때가 있었고 종종 숫자를 틀렸다. 빈 연무장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게 발견되기도 했다.
녀석은 잘 지낸다고 얘기를 해 줘야 했나?
그렇게 떠난 녀석이었지만 나는 곧바로 창천의 소식을 입수할 수 있었다.
어떻게 했냐고?
우습게도 녀석이 먼저 연락을 취했다.
물론 나한테 한 건 아니고, 정반합에게 했다.
정반합은 자기 행방이나 생존 여부를 주기적으로 합에 보고해야 했는데 녀석도 그 일원이라 연락을 지속했다.
그리고 정반합의 회주는 나지.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창천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에서 얼마만큼 시간을 보낼 것인지 간략한 암호를 계속해서 합으로 보냈고 은 파파가 연락을 취합해 내게 보고했다.
처음 그걸 받았을 때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나던지.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싶기도 했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단 낫다 싶어서 그냥 보고가 들어오게 내버려 뒀다.
“너무 걱정 마요. 알아서 잘하겠지. 조카라고는 해도 당신하고 몇 살 차이도 안 난다고요? 어떨 때 보면 더 믿음직스럽다고요.”
“걱정은 할 수 있는 거지. 뭘 하겠다는 건 아냐. 그냥 내버려 둘 거야.”
그래, 내버려 둘 거다.
아직도 창천의 마음을 백퍼센트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런 식으로 떠나놓고, 보고가 들어간다는 걸 알면서도 보고하고, 가장 최근의 내용은 슬슬 남현으로 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거였지.
그냥 녀석을 믿어보려고 한다. 홍령이 나를 믿고 기다렸듯이.
그거랑 별개로 내 조카 속상하게 한 거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거지만.
“또, 또, 또. 엉뚱한 생각 한다. 그냥 내버려 둔다면서요?”
“뭐야, 들려?”
“척 보면 척이거든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홍령은 그렇게 말하며 내 가면을 툭툭 치고 앞서나갔다. 생각에 빠져 걷는 사이 벌써 새 분원이 될 장원이 보였다.
“하나 물어봐도 되나.”
그리고 남궁은하가 불쑥 물었다. 어쩐지 지금까지 그녀와는 조금 다른 톤으로.
“그래서 두 사람은 무슨 사이지?”
“어 그게…….”
“대답하기 곤란한 건가.”
“당신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라서요.”
우리가 진짜 어떤 사이인지 아는 건 좌수검 외 극소수뿐이다. 아직 은 파파에게도 말 안 했다고. 은 파파는 아마 어디선가 나타난 홍령이라는 처자가 나와 친근하게 잘 어울린다는 이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보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을걸?
잠깐, 남궁은하도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건 곤란한데?!
“집안의 비밀 같은 건가 보군.”
“거의 근접했어요. 진짜 가족이거나 그런 사람들 외에는 말할 수가 없어서. 미안합니다.”
“그대의 가족이 된다면 들을 수 있는 건가?”
“에?”
찔러 들어온 남궁은하의 말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는 허파에 공기 빠지는 거 같은 소리를 내버렸다. 남궁은하는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대와 조부님을 뵈러 가고 싶다. 우리보다 일찍 출발한다 하셨으니 이미 도착해 계실 거다.”
“저, 저기, 그러니까 지금 소가주의 말은―.”
“어차피 한 번은 조부님을 뵙고 앞으로의 일을 상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그 상의해야 하는 일이 뭔데?! 둘 중 어느 쪽인데?
“소가주, 나도 당신을 마음에 두었지만 우리는 당장 닥친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지금 이거 나 갖고 노는 거지?
이런 면이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좀 재밌기도 하고.
“방금 그건 비긴 걸로 하죠.”
“좋다. 나는 그런 세련된 태도가 마음에 들어.”
그녀는 내가 어처구니없다고 따져 묻는 대신, 홍령의 정체를 말해주지 않는 것과 퉁치고 넘어가는 게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나도 그 부분은 좀 미안한 감이 있으니까 아무렴 넘어가야지.
솔직히 이건 남궁은하가 봐준 거다. 남궁세가의 명예에 흠집이 갈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서로 미묘한 교류를 하고 있는 남자가 다른 여인과 그리 친해 보이는데. 보통의 경우였다면 엄청 빈정 상하거나 비밀이고 뭐고 빨리 말하라고 했을걸.
“하지만 조부님을 뵙자고 하는 건 농이 아니다.”
“알고 있어요. 일단 짐 좀 풀고 찾아뵙는 걸로―.”
“저기 계시는군.”
에에?
남궁은하가 빠르게 발을 놀려 일행들을 추월해 나갔다. 우리가 자리를 잡을 빈 장원 앞에 초로의 사내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야, 금태양, 저 할배 뭐임? 저 고수는 뭔데?”
“쉿, 할배라니.”
가장 먼저 그의 남다름을 알아본 건 당당이었다. 신생도 있었다. 신생은 아이들과 떠들다가 내 쪽으로 다가와 내 소매를 꽉 잡았다.
겉보기로는 평범해 보이는 노인이다. 남궁은하의 조부인 걸 생각해보면 젊은 얼굴이었지만 아마 반로환동의 영향이겠지. 그 외에는 기세도 깔끔하게 갈무리해서 얼핏 보기엔 그냥 평범한 노인처럼 느껴졌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임?]
[사람보고 그거가 뭐냐, 그거가.]
[아니, 그렇지만. ‘천하제일’ 같은 게 사람처럼 느껴질 리가 없잖음?!]
당당의 말도 아주 틀리진 않았다. 천하제일이라, 영 감이 안 오는 수식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저 노인이 서른 해가 넘도록 그 수식어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인사하러 다녀올게.”
“너만 감? 일행들은?”
“나머지는 들어가서 짐 풀고 있으라고 해.”
“어어? 그래도 되는 거임? 야, 금태양!”
어차피 상대도 정식으로 방문한 게 아니다. 그랬다면 남궁세가의 사람들을 주렁주렁 달고 왔겠지. 하지만 남궁가주는 딱히 예복을 입은 것도 아니고 동네 마실을 다니듯 편안한 차림이었다. 아마 우리 일행 중 남궁은하가 있으니 손녀딸을 보러 온 게 아닐까. 그런 상대에게 인사를 하는데 이쪽에서 더 격을 차리는 것도 우습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담소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인사말을 건네자 남궁가주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금태양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주름진 눈이 나를 훑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고, 나를 중심으로 한 바퀴를 돌면서 훑고, 마지막으로는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신기한 아이구만. 뭐 이런 것이 다 있담?”
이, 이런 것?
방금 전까지 천하제일이 그것이네 마네 하긴 했지만, 갑자기요?
“조, 조부님!”
“왜 그러느냐. 신기한 건 신기한 거지. 탈태환골을 한 건지 골격은 그럭저럭 잡혀 있는데 어째 한번 죽었다 다시 태어난 골상이네, 이거. 어깨뼈가 좋은 걸 보니 태어났을 땐 나름 무골이었을 것도 같은데.”
그러면서 순간 남궁가주가 내 어깨를 잡고 우악스럽게 주물렀다. 피할 수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깨를 바스라트릴 것 같은 힘에 비명이 나오려는 찰나, 남궁가주가 손을 떼었다.
……어?
“젊은 게 너무 어깨에 힘주고 살면 금세 맛이 간다. 너는 뼈다귀가 볼 만할 것 같으니 잘 간수하고 살 거라.”
화산지회를 준비하며 스트레스를 좀 받느라 어깨가 뭉치긴 했는데, 장원에 도착해 침을 좀 놓거나 수련을 해서 풀 생각이었다. 근데 그걸 어깨 한 번 쥐어짠 걸로 풀어버렸다고?
“은하야, 안휘로 돌아가면 내 방 옆에 자리 하나 장만해 두거라. 이 녀석 뼈를 거기 둬야겠다. 아주 흥미로워. 하루 세 번 차를 마실 때마다 구경하기에 부족함이 없구나.”
“조부님, 몇 번이나 설명드렸잖습니까. 그건 본인의 동의가 필요한 일입니다…….”
“아, 그런가?”
“그리고 인사 받고 자기소개도 안 하셨습니다.”
“아차, 내 정신 좀 봐라. 미안하다. 이십여 년을 매일 보던 얼굴들만 봤더니 처음 만나면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도 까먹었군. 남궁세가의 남궁가주다.”
“조부님, 이름, 이름.”
“이름은 남궁우천이고. 이거 영 익숙해지지가 않아. 은하야, 이참에 그냥 이름을 가주로 개명할까?”
“조부님!”
“아니, 그렇잖냐. 내가 지금 햇수로만 서른 해 넘게 가주인데, 이제 와 이름이 뭐 중요하다고. 남들도 다 나보고 가주님, 가주님 하지 내 이름 부르는 사람이 누가 있어? 이참에 개명해야겠다. 화산지회 가서 개명한다고 선언해야겠어.”
……그러니까, 이 사람이 서른 해 동안 중원에서 검으로 그 누구도 꺾지 못한 절대강자이자, 모용가주가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꺾고 싶은 그 천하지존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