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이 자식 봐라?
나는 곧바로 연무장 위로 올라가며 검을 뽑았다. 팔부신검의 곧은 검신이 웅혼한 검기를 뿜어내며 녀석이 서 있던 자리를 갈랐다.
큰 굉음과 함께 잘 다듬어진 연석의 귀퉁이가 삶은 밤처럼 부서져 나갔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녀석의 흔적은 없었다.
“뒤냐!”
곧바로 몸을 돌려 날린 횡 베기에 놈의 검이 걸렸다. 창천은 쳇, 소리를 내며 곧바로 검격을 흘려보내곤 뒤로 물러나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고. 들어와!”
화가 난 듯 외쳤지만 머리는 차분했다.
창천은 지금 이상하다.
평소와 같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녀석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게 내가기공과 남궁세가 비전검법의 충돌로 인한 주화입마의 증상일 수도 있으니, 나는 녀석을 살펴봐야 할 의무가 있다.
처음 그 제안을 한 것도 나고, 녀석의 주치의도 나니까.
“네 녀석이 들어와라.”
“못 할 건 없지. 내 제안을 거절한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창천의 제왕검법이 내가 향하는 방위마다 검의 궤적을 어지러이 수놓았다.
권역에 들어가는 순간 그 검의 이끌림대로 따르지 않으면 강력한 제압을 당하게 되고, 그 이끌림을 따라간 순간 결국 그 검에 복종하게 되는 강력한 수비의 검.
창천의 제왕검법은 강했다.
그러니까 더 의심하며 달려들었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 존재들이 바로 무림인이 아닌가. 모용가주처럼 남을 희생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간단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창천과 희생이라는 말이 좀 안 어울리긴 하는군.
스스로를 갉아먹으면서 라고 해야 할까?
그럴 수는 있다. 사람이 살면서 그래야 할 때가 있긴 하다. 그러지 않으면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설 수 없어서 안간힘을 쓸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 이 녀석에게 그런 이유가 뭐가 있는데?
제왕의 검과 부딪친 팔부신검이 기이한 공명을 내며 창천이 제시한 길을 거역해나갔다.
완성된 제왕검법이라면 이렇게 저항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겠지만, 녀석의 내공은 아직 이걸 완벽히 펼쳐내기에 부족한 감이 있다. 독재에는 그만한 힘이 수반되어야 하는 법이니.
“이 수는 너무 빤해!”
거기에 나는 녀석과 수도 없는 대련을 치러왔다. 아마 창천과 가장 많이 검을 부딪친 사람이 나일 거다. 그 말은 녀석의 습관과 버릇까지 잘 알고 있다는 뜻.
제왕검법이라는 틀을 익혔어도 그것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습관과 버릇까지 고칠 수는 없다.
“윽―.”
나의 검이 창천의 방어를 파고들었다. 녀석이 급하게 물러서며 창궁무애검으로 내 검을 밀어내려 했지만 이미 공격은 유효했다.
“야! 피했어야지!”
“시끄럽다.”
“시끄러운 건 너고! 잠깐 멈춰! 지혈은 해!”
“속행한다.”
저 미친놈이? 나 분명 경동맥을 건드렸다고! 검 끝의 느낌이 딱 혈관 건드릴 때 그거였단 말이야!
수도에서 물이 새듯 녀석의 목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녀석은 점혈을 할 생각도 없는지 그대로 나를 몰아붙였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나는 창천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 방식대로 녀석을 상대하기로 했다.
나는 방어를 포기했다.
“금 의원!”
당황한 남궁은하가 내 이름을 다급하게 외쳤고, 창천의 검이 내 허벅지를 깊게 베었다. 그대로 나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요란하게 검을 내던졌다.
“허억, 헉…… 항복이다. 네가 이겼어. 이제 그만하자.”
“금태양, 대체 무슨―.”
창천이 당황하며 다가온 순간,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의 상처를 점혈로 짚었다.
“!”
“대련 끝났다, 이 자식아. 이제 치료하자.”
아예 내친김에 녀석의 맥도 짚었다. 주화입마가 아닌 건 알겠다. 그건 검을 조금만 나눠보면 알 수 있는 거니까.
어떻게 아냐고? 태양의원에서 제일 난동을 많이 피우는 환자들과 한 손에는 사랑을, 또 다른 한 손에는 평화를 쥐고 면담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꼼꼼하게 맥을 짚었지만 심기도 크게 문제가 없고 양호했다. 좀 전의 싸움으로 조금 흥분해있는 게 다일 뿐.
하도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날뛰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조카한테 차이기라도 한 줄 알았는데.
어? 생각해보니 요새 둘이 같이 있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소가주, 장 의원님에게 가서 특상 금창약 좀 갖다 주세요. 내가 부탁했다고 하면 작은 고약 하나 꺼내줄 거예요.”
“알았다. 다녀오지.”
잠깐 둘이 대화를 나누기 위해 남궁은하에게 심부름을 부탁했다. 사실 수술실 가서 꿰매면서 하는 게 더 낫긴 한데, 이 녀석이 지금 그렇게까지 말을 들을 거 같진 않았다.
“일단 간단하게 소독 좀 하자. 앉아, 목 아프다.”
“……네 상처부터 처리하지.”
“이건 허벅지 살 베인 거라 괜찮아. 그보다 네가 문제지.”
우리는 가볍게 옥신각신했지만 녀석은 아까와 달리 한풀 꺾인 기세였다. 아니, 한풀 꺾이다 못해 아예 풀이 죽었는데. 갓 딴 나물을 물에 데쳐도 이렇게까지 축 늘어지진 않겠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뒤늦게 사춘긴가?
“고작 친선대련에 배수진을 친 것처럼 피를 철철 흘리며 싸우는 이유가 뭐야? 그런다고 강해져?”
“……강해진다.”
“그렇게 강해져서 뭐 할 건데. 이기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을 거야? 젊은 나이에 실력을 입증하고 요절한 천재, 뭐 그런 게 목표야?”
나는 핀잔을 주면서 녀석의 목에 고도주를 들이붓고 알콜이 마르길 기다렸다. 금왕공방이 북촌으로 아예 이전하면서 품질 높은 고순도의 알콜만 얻어내기가 한결 나아졌다. 그래도 비싼 건 여전하지만. 내가 비상용으로 들고 다니는 건 그중에서도 최상급이다.
“자, 남은 건 마셔.”
녀석은 남은 고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오만상을 지었다. 알콜만 남기고 증류했으니 뭐 제대로 풍미 같은 게 남아 있을 리가 없다.
“더럽게 쓰군.”
“넌 쓰냐? 난 인생이 써서 달달하게 느껴지던데.”
“헛소리.”
“내가 보기엔 네가 하는 짓이 더 헛짓거리야.”
나는 품에서 휴대용 수술도구를 꺼냈다. 바늘에 실을 꿴 후 소독이 완료된 상처 부위를 살피며 바늘을 찔러 넣었다.
“창천, 져도 돼. 그렇게까지 무리할 필요 없어.”
녀석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나는 짐승을 위협하듯 쓰읍, 하며 입을 다물게 시켰다. 어딜 상처 꿰매는 데 말을 해?
“화산지회 그까짓 거, 성적 좀 못 내면 어때? 어차피 태양의원은 무림문파가 아니야. 네가 기권을 해도 그러려니 할 거라고. 뭐, 네 성격에 진짜 기권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지만.”
다행히 동맥의 상처는 심하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 집중해서 꿰맬 수 있는 정도. 빠르게 혈관을 봉합하고 살점을 이어나갔다.
“모용가주의 일도 있기야 하지만, 그거야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 남궁가주도 올 거고, 좌수검도 나설 거고. 모용을은 좀 귀찮을 거 같긴 한데. 그 녀석은 내가 처리할 수 있고.”
말하는 동안 피부 봉합까지 끝냈다. 홍령에게는 의원이 체질이 아니라 더는 어려울 거 같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간 노력한 게 어디 가진 않는다는 게 꽤 뿌듯하긴 했다.
“넌 혼자가 아냐, 창천. 태양의원을 시작할 때부터 함께였잖아. 혼자서 뭘 다 짊어진 듯이, 네가 뭔가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 굴지 말라고.”
봉합을 정리하며 녀석의 얼굴을 보자, 녀석은 그게 아니라는 듯 불퉁한 표정이었다. 이게 아니면 뭔데? 이거 외의 답은 난 모르겠다고.
“내가 헛소리하는 거 같으면, 제대로 얘기를 해. 나는 검을 쓰긴 하지만 무림인은 아냐. 네가 검으로 내게 뭘 증명해 보이려고 해도 읽어낼 수가 없어. 사람이면 사람답게 말로 하자.”
“……넌 역시 그런 식이지.”
“왜, 마음에 안 드냐?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이게 내 방식이야. 문제가 생기면 자세히 들여다보고, 책도 찾아보고, 여기저기 더 잘 아는 사람한테 물어보고. 그렇게 이유를 먼저 알아내고 난 다음 움직이지. 너처럼 모두가 칼로 꼬인 끈을 잘라버리는 게 아니라고.”
“내겐 그 이후를 그릴 수 있는 여력이 없었으니까.”
“그 이후?”
“너는 항상 미래를 보지. 그 점에서 너와 나는 달라.”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마 전생을 기억한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거다. 나는 이곳보다 더 발전한 세상을 안다. 기술은 물론이고 사회나 문화적인 면까지 말이다.
몸이 죽도록 아플 때는 거기까지 볼 수 없었지만 몸이 낫고 나자 더 그런 경향이 강했다. 여유가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당장의 일에 급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니까.
반대로 창천은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내가 아플 때도, 나는 나를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창천은 아니었지.
문득 남궁은하가 말했던 애매모호한 말이 이해되는 거 같았다.
“그는 금 의원 그대가 아니니까. 그리고 당 소협이라는 자, 저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그 또한 같은 것이겠지.”
당당은 그 전까지는 나와 같았다. 자신을 둘러싼 문제로 고통받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사천당가라는 배경이 있었고 당당은 그 이름을 사랑했다. 당가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당당이 무슨 사고를 쳤더라도 커버해줬을 것이다.
그랬던 당가가 망했다. 아주 폭삭.
당당은 그 망해버린 터전을 다시 일궈야 하는 책임을 짊어졌다.
그리고 창천은……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내 미래에 너도 있다고. 너 혼자 어디 날라버릴 것처럼 애기 하냐?”
“그건 네 미래지 내 미래가 아니다.”
창천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이해하지 못해.”
“야, 잠깐! 어디가?!”
“이대로는 안 된다. 여길 떠나겠어.”
어?!
상담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역린을 건드린 건가?
“가긴 어딜 가? 화산지회가 얼마나 남았다고―.”
“참석은 할 테니 걱정 마라. 거기서 보지.”
그렇게 말하며 창천은 갑자기 훌쩍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잠깐만, 진짜 간다고?
“야! 이 길치가 혼자서 어딜 간다는 거야?!”
“따라오지 마라.”
당황해서 뒤따라 가려는데, 창천이 냉랭하게 내뱉은 말이 나를 그 자리에 못 박았다.
“나는 아직 복수의 시작도 하지 못했다.”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태양의원을 벗어나 사라졌다.
남궁은하가 금창약을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나는 뭔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금 의원,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창천은.”
“……녀석은 갔어요.”
“가다니. 어디로?”
“나랑은 다른 길로요.”
창천이 무슨 생각으로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가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건 깨달았다.
우리는 같은 길을 걷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