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태양의원 연무장.
원래 있던 태청장원의 흔적은 이제 거의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곳이 있다면 바로 이 연무장 터였다.
다른 부분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았던 창천이, 유독 연석의 재질이며 크기, 마감까지 따져가며 새롭게 만든 곳.
매일같이 수련을 하기에 제 방보다 더 익숙한 곳이었지만, 창천은 이곳에 설 때마다 복잡한 감상에 휩싸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 갓난쟁이 시절부터 처음 검을 잡았을 때,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했을 때. 키가 두 배는 큰 어른들을 차례로 꺾고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을 때, 진검을 쥐고 비무에 섰을 때, 그 모든 것이 영원히 이어질 거 같았을 때.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생각해보면 그 순간에도 창천은 이 연무장에서 무릎을 꿇었다.
가족을 제거하러 왔던 자들을 피해 숨었다가 겨우 살아남았을 때, 이곳에 널려 있던 식솔들의 피와 사체까지.
가장 행복했던 순간부터 가장 처참했던 기억까지 모조리 이 연석 위에서 그려졌다.
“……다음.”
창천은 숨을 골랐다. 그의 앞에는 신생이 숨을 헉헉 대며 주저앉아 있었다.
“숨 고를 시간 정도는 주시라고요.”
“내려가서 쉬어라.”
“후우, 내가 성장통만 아니었어도 한 대는 더 때리는 건데. 내가 봐준 거예요. 알죠?”
“내려가라. 다음.”
신생은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는 어기적어기적 연무장 아래로 내려갔다.
본격적으로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제대로 먹지 못해 또래에 비해 키가 작았던 거지소년은 죽순보다 빠르게 자라기 시작했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귀여운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팔다리가 가래떡처럼 늘어 무공을 펼치기 어색한지 대련에서 실수가 잦았다.
신생은 그게 무척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걸 고작 마음에 안 든다로 치부할 수 있다는 것도 복에 겨운 소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전과 같은 삶이었다면 자신의 미숙함은 곧 생존의 위기와 결부되었을 테니까.
좀 서툴러도, 몇 번씩 실수를 해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삶.
신생은 지금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환경이, 이 환경을 조성한 스승이 너무나 좋았다.
“좀 쉬었다 하세요. 스승님도 걱정하시던데. 조금 있으면 밥 때예요. 밥은 먹고 해야 하지 않아요?”
“아직 한 식경은 남았다.”
그래서 소년은 창천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신생이 거지로 북촌 인근을 다니며 구걸하던 시절, 창천은 차라리 거지가 낫겠다 싶을 정도로 비루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랬던 창천이 스승을 만났다. 그리고 신생 자신의 삶이 변한 만큼이나 많은 변화를 겪었다.
어떤 변화냐고?
당연히 좋은 변화다.
폐허였던 태청장원은 말끔한 태양의원으로 변모했고, 다 부서진 연무장도 새것으로, 금왕공방에서 새 검도 맞췄다. 심지어 금태양은 창천이 자주 수련하러 가는 산 중턱에 작은 암자까지 지어주었다.
‘밥 안 굶고, 옷도 깨끗하고, 무당도 혼내줬고, 사랑하는 사람도 생겼고.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거 같은데 왜 저러는 걸까?’
신생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때문에 창천이 저렇게 목마른 짐승처럼 수련에 몰두하는지. 강함에 대한 갈망? 그거라면 이해할 수는 있다. 당장 신생이 여기서 창천과 대련을 하고 있는 것도 스승에게 더 보탬이 되고 싶어서였으니까.
사천당가에서는 보탬이 되긴 했지만 동시에 짐이 되기도 했다. 그게 신생의 마음에는 짐처럼 얹혀 있었다.
그래도 창천만큼은 아니었다.
창천은 정말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특히나 요새는 더더욱.
그런 신생의 옆으로 당당이 연무장에 올랐다.
“어린애는 이해 못 함. 그만 밥이나 먹으러 가셈.”
“뭐래요. 나랑 몇 살 차이도 안 나면서.”
신생은 투덜거렸지만 이내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바로 식당으로 몸을 돌렸다. 성장기에는 평소보다 훨씬 더 잘 먹고 잘 자야 한다는 것이 스승 금태양의 방침이었고, 신생은 그런 스승의 말을 잘 따르는 착한 제자였다.
“잘 지냈음?”
“올라왔으면 검이나 뽑아라.”
“간만에 보는데 인사도 안 하고. 뭐, 싸가지 없는 꼴을 보니 예전 같아서 좋긴 함.”
당당은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의 검을 뽑았다. 창천이 원래 그런 녀석인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 있었던 일은 녀석도 알 것이다.
그럼에도 검을 뽑으라는 건, 검으로 말하겠다는 뜻일 터.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님. 각오 좀 하셈!”
당당의 검이 힘 있게 쇄도했다. 평소 그답지 않은 정직한 돌진에 창천이 조금 놀란 듯 응수했다. 수련을 위한 대련이라 하기엔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가벼움을 덜고 무게를 더했다. 시야도 넓어졌군.’
‘이 자식은 대체 어디까지 깊어지는 거임? 한 수 한 수가 태산같이 무거움!’
한바탕 검을 교환한 후 두 사람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찬찬히 서로를 살피며 다시 견제하기 시작했다.
많은 것이 달라진 서로다.
전과 같이 생각해서는 큰 코 다칠 게 분명했다.
먼저 움직인 것은 당당.
다시 한번 정직하기 그지없는 검이 사선으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다만 한 가지가 달라졌다.
균형을 잡기 위해 뒤로 향했던 오른손이 여섯 자루의 비도를 뿌렸다.
검을 피하거나, 비도를 피하거나.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
둘 중 하나를 피한다는 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맞아야 한다는 소리와 같다.
창천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검이, 모든 궤적을 꿰뚫어보았다.
‘뭐, 뭐임?!’
순간 자신의 수가 전부 파훼된 것만 같은 기분에 당당은 서둘러 검을 물렸다.
그 결정이 찰나만 늦었다면.
당당의 옷자락 끝이 서걱 잘려 하늘을 날았다.
가슴께, 심장에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야! 너 미친놈임?! 나 죽이려고 했음?!?”
당당이 기겁하며 비명을 내지름과 동시에 하늘을 날았던 비도 열두 개가 연무장 바닥에 푸푸푹 꽂혔다.
‘잠깐만, 열두 개? 나는 여섯 개 던졌음?’
당당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당당의 도주로를 따라 박힌 비도들은 전부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제대로 덤벼라. 두 번은 없다.”
“하,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임?”
당당의 기세가 한껏 사나워졌다. 아까는 확연히 다른, 마치 생사대적을 눈앞에 둔 것 같은 일촉즉발의 기세에 창천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검을 쓸 수 있겠군.”
너무나도 오만한 말에 당당의 검이 분노를 내지른 순간.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광오한 하늘이 그 앞에 펼쳐졌다.
* * *
도대체 왜 저렇게꺼지 하는 건지.
이미 친선대련의 정도를 벗어난 싸움을 보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물론 저런 싸움에서 마약과도 같은 기분을 느낀다는 건 안다. 전생의 용어로 치자면 일종의 러너스 하이겠지. 신체가 극도로 지쳤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몸이 다량의 엔돌핀을 분비해 극상의 만족감을 느끼는 상태가 되는 거다.
그래도 정도가 있지. 저러다 한 명 죽겠다고.
“안 말려도 괜찮으려나.”
“확실히 평소보다 기세가 더 살벌하긴 합니다. 걱정되는군요.”
내가 무인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소릴 한 게 아니다. 보라고. 본 투 비 무림인, 무당의 대제자인 현건 녀석마저 염려하는 눈치잖아.
“근래 창천 소협의 검이 유달리 매섭긴 했습니다만. 화산지회도 결정되었고 창천 소협 또한 태양의원의 이름을 어깨에 짊어졌으니 그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남궁의 검을 정식으로 전수받으셨으니…….”
그래, 녀석이 수련에 매진할 이유야 많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열심히 안 해준다면 이리저리 얽힌 사람들이 억울해할 정도로 말이지.
그럼에도 너무 과하다는 거다.
거기에 당당 저 녀석은 왜 그 기세를 다 받아주고 있냐고.
아니, 한 술 더 뜨는 거 같은데?
“저거 진짜 말려야―.”
“괜찮네. 그냥 두시오.”
“소가주! 하지만 저러다 한 명 크게 다치겠다고요!”
“나를 믿으시게.”
한편에서 보고 있던 남궁은하가 다가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이라면 그녀의 말을 신뢰하겠지만 눈앞에서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무작정 납득할 수는 없었다.
“주화입마의 초입에 들어선 건 아니겠지요?”
내가 유달리 걱정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각 무공은 그 위력을 뒷받침하는 내공심법이 짝꿍처럼 존재한다. 하지만 창천은 그게 아니다. 왼손으로 오른손잡이용 검을 휘두르는 것 이상의 핸디캡을 지고 있는 상황.
주화입마의 영향으로 심기가 거칠어진 거라면 초기에 잡아야 한다.
“신의들께 보였으나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걱정 마시오.”
“그렇다면……?”
“그는 금 의원 그대가 아니니까. 그리고 당 소협이라는 자, 저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그 또한 같은 것이겠지.”
평소 남궁은하의 말은 직설적이고 간결해서 이해하기 쉬웠는데, 지금은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창천도 당당도 내가 아니라고?
그 말은 나와 같은 처지가 아니라는 뜻일 거다.
나는 피를 뚝뚝 흘리며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설마 그 얘기인가?
하지만 그 얘기라면 당당은 몰라도 창천은 해당되지 않는 거 아냐?
알 듯 말 듯 머리가 복잡한 찰나, 당당이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우습게 보지 말란 말임!!!”
누가 봐도 단시간 내에 힘을 한계까지 끌어낸 상황. 여기서 승부가 안 나면 정말 위험해질 거 같아 억지로라도 말려야겠다 생각했을 때.
“우습게 본 적 없다.”
창천의 검이 당당의 공격을 짓눌렀다.
“그저 그게 너와 나의 차이일 뿐이다.”
미쳤다. 압도적이다.
그게 내가 느낀 감상이었다. 끼어들려던 것도 잊고 그저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방계 핏줄이라는 것이 놀랍고, 또 아까울 뿐이다. 저 자질을 우리 남궁세가가 먼저 발견했다면 그 고생을 하지 않고도 더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을 텐데.”
자부심이 섞인 남궁은하의 말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제왕검법과 창궁무애검을 빠르게 자신의 것으로 흡수했다고 쳐도 벌써 저 정도로 풀어낼 수 있다니…….
“남궁은하, 쓸데없는 소리 마라.”
어느새 검을 집어넣은 창천이 쓰러진 당당의 뒷덜미를 붙잡아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당당을 휙 집어던졌다.
“어엇!”
내가 받아들려고 했는데. 창천 녀석이 노리고 던진 듯 당당은 정확히 현건의 위로 떨어졌다. 현건이 급하게 당당을 받아들고 나는 본능적으로 녀석의 맥과 호흡을 확인했다.
“내상을 좀 입은 거 같은데. 심하진 않아요. 바로 치료해야겠지만.”
“제가 본원에 모시고 가겠습니다.”
현건의 등에 업힌 당당은 그대로 축 늘어졌다. 완전 누더기를 만들어놨군.
물론 창천도 무사하진 않았다. 옷가지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간간이 핏기도 보였다.
도대체 뭐가 달라서, 뭐 때문에 대련을 이렇게까지 한다는 거야?
“다음.”
그렇게까지 하고 또 싸우겠다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남궁은하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금태양, 올라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