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아아. 마치 머리에 작은 번개가 친 것만 같다.
“더 이상 의술을 발전시키지 못해도, 검을 쥐어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못해도. 당신은 계속 이곳을 꾸려나가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 부족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계속 해나가야겠지.”
“지금까지 한 거랑 별반 다르지도 않죠. 우리는, 아니 당신은, 계속 그 일을 해왔으니까.”
홍령의 말이 맞다. 나는 지금까지 멍청하게 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투덜거릴 게 아니었다.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건 나 자신이었다.
나는 이미 내가 하고자 하는 걸 하고 있었다.
“결정을 내린 모양이네요.”
“고마워. 덕분에 내가 해온 일이 뭔지 깨달았어.”
그래, 이 내단을 복용하자. 그리고 그 힘을 내 것으로 만들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지켜나가려면 힘이 필요할 테니까.
“호법 서줄까요?”
“청화의 수련을 계속해야 하지 않아?”
“오늘은 끝났으니까요. 그리고 몰아치는 건 이 정도면 됐어요. 밥도 잔뜩 먹은 다음에는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지금은 스스로 그 모든 것을 곱씹을 시간이에요.”
아아, 그런 거라면 나도 안다. 심상 속 화산에서 나도 겪어봤으니까. 물론 나는 심상 속이라는 특혜 아닌 특혜 덕분에 그 시간을 빠르게 단축했지만.
우리는 다시 아까의 장소로 돌아갔다. 며칠간 휴식이라는 말에 화산의 제자들은 태연한 척 하려 했지만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고, 청화는 고뇌에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모습을 보니 왜 홍령이 청화에게 그렇게 마음을 쓰는지 알 거 같군.
며칠 쉬라는 말에도 청화는 멈추지 않고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렸다. 홍령검의 구결이었는데, 뭔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제자의 배신에 충격을 먹고 쓰러진 청화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스승이기도 했다. 한창 배우고 성장할 때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던 청화에게 지금 홍령의 가르침은 단비와 같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둘 다 틀렸을지도 모르겠어.”
“틀려요? 뭐가요?”
“별 얘기 아냐.”
나도 홍령도 청화의 재능과 가능성을 그리 높게 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도록 묵은 배움에 대한 갈망과 필사적인 노력이라면 그 가능성을 넘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반쯤은 내가 발굴한 사람이나 다름없으니 그렇게 된다면 정말 지켜보는 보람이 있을 거다.
“어디가 좋아요? 이 근처에 내가 봐둔 괜찮은 비동이 있는데.”
“무슨 비동까지 가. 그냥 내단 하나 먹는 건데.”
“기왕 하는 거 물 좋고 공기 좋고 자연지기 풍성한 데서 하는 게 좋지 않아요? 겸사겸사죠.”
“둘이 뭐 그렇게 재밌는 얘길 하나?”
저쪽에서 눈에 띄게 수려한 외모를 하고 있는 이가 팔짱을 낀 채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마의, 제갈천우였다.
“천우, 왔어?”
“이 기집애가 왜 또 친한 척이야? 저리 꺼져.”
“또 튕긴다. 얘가 이래 보여도 지금 좋아하는 거거든요. 그치 천우?”
“그 이름 갖다 팔아먹은 지 오래 됐다니깐.”
“난 다른 이름 같은 거 몰라. 너도 같이 갈래?”
“어딜 가는데?”
“호법 설 거거든. 나 오래 깨 있으면 피곤하니까 네가 열 시진 정도 서주라. 내가 두 시진 설게.”
“미친,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리면서도 마의는 홍령이 팔짱을 끼는 걸 거부하지 않았다. 저걸 보면 마의에게 있는 대로 시달리고 있다는 하중도의 수적들이 못 본 걸 본 눈을 하겠는걸.
“그래, 그거 먹기로 한 거냐? 거 오래도 고집 부렸네.”
“마의에게도 얘기한 겁니까?”
무당신의의 내단에 대한 애기는 나름 극비였다. 마의가 우리 편이 아니라곤 할 수 없지만 여전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무당신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라 자기가 먹어야겠다며 난동을 피우면 곤란해지니 일부러 말 안했던 건데.
“당신이 하도 안 먹으려고 해서 상담 좀 했어요.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천우 말이 맞았고.”
대체 저 사람이 무슨 조언을 했기에?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의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말뚝 박고 뻗대라고 한 거뿐이야. 이 기집애나 외팔이 그놈이나 고집으로 치면 쇠심줄 같은 놈들인데, 그놈들 자식새끼는 오죽할까.”
“그래도 생각보다 빠르지 않아?”
“기른 놈 영향을 받았나 보지. 스무 살 되기 전까지 곧 뒈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놈이 아주 여유만만인 거 보면 돈이 좋긴 좋아.”
“말이 좀 심하신데요.”
“뭐가 심해? 이번에 뒈질 수도 있는데 다음을 생각하는 네놈이 등신인 거지. 이 기집애도 성질 많이 죽었어. 예전이었어 봐. 고민한다고 시간을 줘? 그 시간 단축해준다고 니 대가리 벌써 여덟 쪽으로 쪼개졌다.”
“야, 제갈천우. 적당히 하라잖아.”
“꼽냐? 꼬우면 한 판 붙을래?”
“좋아. 네가 이십 년간 내 검 맛을 못 봤지?”
마의와 홍령이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을 한복판에서 칼 뽑고 싸움이라니. 주변에 비 무림인 마을 사람들이 오고가는 판국에―
내가 당황해 두 사람을 말리려 하는 찰나, 뒤에서 쟁기와 곡괭이를 짊어지고 가던 사람들이 대수롭지도 않은 듯 말을 주고받았다.
“어이구야, 또 시작이네.”
“임자, 오늘도 내기할 텨?”
“나는 홍 씨 처자에게 걸지. 자네는?”
“나는 저 살벌한 미인한테. 오늘은 얼마나 걸리려나?”
“지난번에 한 식경쯤 걸렸으니 오늘도 그쯤 걸리지 않겠나?”
“밥 먹고 오면 승패가 나와 있겠구만.”
“밥값 걸고 하면 되겠어. 이만 가보자고.”
그들 외에도 사람들은 태평하게 자기 할 일들을 했다. 길쌈하는 아낙은 길쌈에 모래먼지 튄다고 저기 멀리 가라며 핀잔을 줬고 노점 상인들은 싸움 구경에 먹거리가 없으면 쓰냐고 서둘러 가격을 할인해 불티나게 장사를 해댔다.
그래, 뭐. 내공도 안 쓰고 저러고 있으니 딱히 큰 피해는 없겠다만……
“두 분의 비무는 이 마을에서 꽤 재밌는 볼거리가 된 지 오랩니다. 모르셨나 보군요.”
“현건 도장?”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기에 구경꾼들인가 싶었더니, 현건과 무당신의가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 외에도 도사의 복장을 한 노인 여럿이 함께였다.
나는 그 사람들이 누군지 알았다. 혈교의 술법을 분석하기 위해 온 무당의 도인들이었다. 아침에 인사를 하긴 했지만 사실 그때는 소림도 섞여 있었고 이후에 금리와 얘기도 해야 해서 잠깐 얼굴 좀 본 게 전부인데……
왜 저렇게 다들 나를 보며 활짝 웃고 있지?
“무량수불. 아침에 이어 또 뵙습니다, 금 의원.”
“아침엔 제가 좀 바빠서. 죄송합니다. 같이 차라도 했어야 하는데요.”
“아닙니다. 이 태양의원에서 제일 바쁜 분 아니십니까.”
도사들 중 제일 배분이 높은 태율도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아침에 만났을 때도 이 사람들은 내게 호의적이었다. 현건, 그리고 무당신의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라곤 하지만 개중에도 불만을 가진 이들이 있을 법한데. 하나같이 내게 큰 은혜라도 입은 표정들이었단 말이지?
“실은 따로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만, 저희도 할 일이 있고 의원님도 바쁘시니 이 자리에서 감사를 표해야겠습니다.”
“감사라니요?”
“금 의원님 덕분에 우리가 익혀온 재주가 드디어 빛을 보았습니다. 이보다 더 감사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 모르겠는데.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자 현건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이분들께서 무당 내에서 도술을 다룰 줄 아는 도인인 것은 금 의원도 알고 계실 겁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모신 거니까요.”
뭐, 엄밀히는 이들의 장인 태율도인이 현건과 뜻을 같이 했기 때문이었지만.
“도술은 도가문파의 근본이나 다름없지요. 허나 오랜 세월이 지나며 무공으로 얻은 힘이 득세하고, 이로 인해 도술은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습니다.”
아아, 그런 건가.
웬만큼 강력한 도술이 아닌 이상 내가기공으로 쌓은 공력을 이길 수 없다. 시전에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공격보다는 방어에 특화된 힘이라는 점도 그랬다. 무당신의의 거처에 깔린 진법도 큰 소리가 날까 봐 건들지 못했던 거지, 사실 그 제약만 아니었으면 진법을 깨는 것 자체는 팔부신검이 없었어도 가능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도술의 필요성은 점점 줄었을 거고, 이 명맥을 잇고자 하는 이도 손에 꼽았을 거다.
당장 눈앞에 내 또래의 젊은 도인, 즉 삼대제자 연배로 보이는 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 이를 방증했다.
누군들 무공고수에 멋진 무림인이 되려 하지, 하찮은 푼돈이나 받으며 귀신 쫓는 제령이나 하러 다니고 싶진 않겠지.
“하지만 도가의 근본이 도술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번 일로 무당의 도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지요. 태율 사숙께서는 그것에 감사를 드리는 겁니다.”
현건의 말과 동시에 늘어선 도인들이 어떤 기도문 같은 것을 읊으며 내게 인사했다. 포권이 아닌 것을 보니 저게 원래 도사들의 인사인 모양이었다.
딱히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저들에게 은혜를 베푼 게 되어버렸네.
“금 의원님이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건 저도, 다른 분들도 아십니다. 하지만 결과가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현건이 저렇게 말하는데 마냥 멋쩍어 하기도 뭐하군.
“여러분께 좋은 기회를 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진법의 해석도, 나아가 새 술법을 만들어내는 일도 잘 부탁드립니다.”
“여부가 있겠소이까. 소림에 뒤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소이다. 무량수불.”
소림하고 약간 경쟁이 있나 본데. 하긴 소림은 무승들도 불법에 통달해야 한다고 가르쳐서인지 무당처럼 술법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수준이 아닌 거 같더라고.
뭐, 적당히 건전한 경쟁은 서로의 발전에 좋은 법이지.
우리 계획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혈교의 술법을 파훼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저들이 잘해 주지 않으면 다른 계획이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이니 몇 마디 말로 의욕을 고조시킬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지.
“아, 금 의원. 좀 전에 당 소협을 만났습니다.”
“당당이 왔어요? 일찍 왔네. 지금 어디 있어요? 아, 아니다. 지금은 내단을 흡수해야 하는데―.”
내단을 복용하려고 했지만 당장 호법을 서준다던 홍령이 마의와 한바탕 투닥거리고 있으니 잠깐 시간을 내도 되겠지.
호법을 서줄 사람이야 찾으면 널리고 깔렸지만, 그랬다간 분명 삐질 테니까.
“결정을 내린 모양이구려, 금 의원.”
“네, 그렇게 됐습니다.”
“주인을 찾아간 게지. 덕분에 이 늙은이의 마음도 한결 가뿐하오. 고맙소이다.”
무당신의는 정말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 개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그러다가 우화등선하시겠는데. 아직은 안 되는데요.
“아, 신의의 그 내단이라면 저희가 세운 가설이 있는데―.”
“그 가설에 대해서는 좀 더 검증을 마치고 논하도록 하세. 금 의원, 친우를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예, 호법을 서준다던 사람이 저 상황이라 수련은 좀 나중으로 미뤄야겠네요. 당당이 어디로 갔습니까?”
“도착하자마자 연무장으로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