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그런데 남해태양궁에서는 기술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것을 주었다.
곽 표두와 표사들의 목에 황금색의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반짝였다. 최상급 태양석으로 만든 그것은 소지자와 짐승의 친밀도를 높여준다.
그리고 내가 지닌 태양보도는 최상급 태양석 중에서도 선별된 특상품.
금동이가 나와 진양 누님을 잘 따른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호랑이뿐 아니라, 마소도 일반 표국에 비해, 아니, 금왕표국보다 훨씬 잘 다룰 수 있습니다.”
곽 표두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 어디에도 남해태양궁보다 짐승을 잘 다루는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태양석 목걸이뿐 아니라, 곽 표두와 표사들은 내가 사천 성도에서 일을 마무리할 때 태양궁 사람들에게 짐승을 다루는 다양한 기술을 전수받았다.
단순히 말을 잘 듣게 하는 걸 넘어서서 컨디션과 상태를 통제할 수 있는 모든 기술들.
본능을 넘어서 인간의 지시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표행을 이끄는 것은 사람이지만 표물을 나르는 건 대부분의 경우 소와 말, 나귀 등의 짐승.
물건의 품질관리도 일정 수행도 결국 이 짐승을 다루는 것과 연관이 있다.
아니, 절대적으로 이에 달려 있다고 봐도 좋다.
전생의 운송수단이 인력거나 마차에 달려 있던 시절과 대형 트럭이 등장한 시대의 운송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아직 발족도 안 한, 이름조차 없는 이 표국은 다른 이들이 인력거를 끌 때 트럭을 갖고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름은 당연히 태양표국이겠지요?”
“그렇죠. 잘 부탁합니다, 곽 국주.”
이제 우리도 표국이 생겼다. 남의 운송을 빌리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내 표국 말이다.
“아니, 무슨 국줍니까, 제가.”
그런데 다 된 밥에 곽 표두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금 의원님이 국주를 맡으셔야지요. 저는 표두면 됐습니다. 어차피 표행단도 하나인데 뭐 어떻습니까?”
“그래도 다른 표두들과 같을 순 없죠. 지금이야 하나지만, 신 금가장의 물량을 소화하려면 그걸로는 어림없을 겁니다, 대표두.”
대표두라는 호칭에 곽 표두가 호탕하게 웃었다. 어쩌면 그가 오래도록 꿈꿔왔던 이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새 표국의 이름은, 좀 뻔하지만 태양표국입니다. 마음에 안 드셔도 어쩔 수 없어요. 통일성이 있어야 하니까.”
“다른 이름이면 섭섭했을 겁니다.”
대표두는 그렇게 말하며 웃다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태양표국의 대표두 곽상도, 국주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그가 내 앞에 무릎을 꿇음과 동시에, 태호 또한 몸을 낮추었다. 표사들도 무릎을 꿇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또 하나의 집단이, 태양의 이름을 가진 시작의 깃발을 올렸다.
* * *
“……그러면 이제 내려갑시다.”
앞으로 태양표국이 해야 할 일들을 논의한 후, 대표두 이하 표사들은 드디어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짐승을 다루는 기술의 수련이 극에 달했으니 더 이상 이 산적산채 같은 곳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산 밑으로 향하려는데, 어디선가 단단한 각오를 담은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 소리를 들은 몇몇이 질린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이제 여길 내려가면 저 소리에 치를 떠는 일은 없겠구만.”
“웬걸. 나는 기술에 능숙해진 것보다 그게 더 기쁘네. 밤마다 이어졌던 습격을 생각하면, 어휴.”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습격이라니?
이 일대는 안전하다. 산적 산채 비스무리하게 보였던 표사들의 거처에 금리가 깜짝 놀랄 만큼 말이다.
창천 녀석이 훈련을 빙자해 죄다 잡아 족쳐버린 것도 있고, 의원으로 오는 길이 위험하면 안 되니까 주기적으로 개방이며 하오문에 청소를 의뢰한 탓도 있었다.
말하자면 이 일대는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한 지대란 말이다. 그런데 내 휘하의 사람들이 밤마다 습격을 당했다고?
“그게 무슨 소립니까? 습격이라니?”
“아, 모르셨습니까?”
“모르니까 물어보겠죠?”
“뭐, 백문이 불여일견 아니겠습니까. 직접 가보시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긴 했다. 상대의 정체를 알든 말든 말이다.
곽 표두도 제 칠각의 표행단도, 아니, 이제는 태양표국의 표사들이 된 이들도 결코 어디 가서 꿀리는 실력들은 아니다. 하지만 얘기를 들어보면 지독히도 시달렸던 모양인데, 이들을 대체 누가?
곽 표두가 씩 웃으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걸 보니 진짜 적은 아닌 모양인데……
그렇다면 더 오리무중이다.
한참 동안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자 기합과 병장기 소리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순간 나는 그 기합 소리가 꽤나 익숙한 목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소녀에서 여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는 한 사람의 기합 소리였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나직하고 단단한 또 다른 여인의 목소리도.
“좀 더 빨리!”
“다리가 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잖아요!”
“아직도 여기서 막히면 어떡해요?”
산 중턱에 위치한 너른 공터. 저 멀리 북촌 자락이 보이는 탁 트인 그곳에선 두 여인이 검을 맞대고 있었다.
“허억, 허억…….”
“아직 멀었어요. 다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시 검을 곧추세우는 이는 청화였고, 그 너머 검을 늘어트린 채 고요한 눈으로 청화의 검을 꿰뚫어보고 있는 이는 홍령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정반합에 속한 화산 무인 몇 명이 그들의 비무를 눈이 뚫어져라 견식하고 있었다.
아니, 저걸 비무라고 부르긴 좀 그렇지만…….
“청화 문주, 그 얼마 사이에 실력이 많이 늘었습니다.”
곽 표두가 마치 제 일인 것처럼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수련의 일환으로 밤마다 저희들을 습격해오셨는데, 하루하루가 다르더군요. 덕분에 저희도 많이 배웠습니다. 최근 며칠간은 다른 무인분들보다 무섭던데요.”
그렇게 된 거였군.
홍령이 청화를 가르치는 건 알고 있었다.
섬서사변에 대한 진실이 퍼지긴 했지만 아직 화산의 생존자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건, 특히 홍령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여러모로 곤란한 일이었으므로, 홍령은 태양의원이 번잡하다는 핑계로 좀 떨어진 곳으로 청화를 데리고 갔다.
겸사겸사 홍령의 부활(?)에 대해 알고 있는 몇 명의 화산 제자도 함께였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홍령은 그 시간 동안 실전된 ‘화산’을 남기고자 했다.
좌수검을 따르던 이들 중 입이 무겁고 자질이 뛰어난 소수가 선택받았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홍령이 모든 기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치기로 약조하고 그녀가 기억하던 화산을 전수받기로 했다.
내가 상당수의 비급을 그들에게 전달했었고, 심상 속 화산에서 익힌 것이나 홍령에게 들은 것도 전수했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온전하지 못하다는 건 나도 알았다.
그 수행에 청화를 끼워준 건 예상 밖이었지만…….
‘당신이었군요, 그 사람이.’
홍령과 청화의 첫 만남.
솔직히 나는 그 만남의 주역인 두 사람보다 더 긴장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두 사람은 좌수검이라는 한 남자의 과거와 현재였다.
좌수검이 청화에게 확실히 마음을 주었다는 신호는 없었지만 이대로 십 년, 이십 년,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청화는 자연스럽게 좌수검의 옆자리에 서게 될 테니.
그랬기에 홍령은 내게 청화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다, 당신이 홍령검의 주인이라고 들었어요.’
물론 청화는 그런 내막은 모른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자신에게 큰 힘을 가져다준 무공의 주인이 바로 홍령이라는 사실 뿐.
또 한 번, 빈틈을 찔린 청화가 저 멀리 내동댕이쳐졌다.
“백, 구십 팔, 번…… 크윽!”
청화가 검을 바닥에 찍으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구십팔 번. 청화가 무릎을 꿇은 횟수를 말하는 걸 거다.
“오늘의 백구십구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잠깐만.
오늘까지가 아니라 오늘만 백구십구 번째야?!
“아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홍령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거두었다. 압도적으로 청화를 제압한 그녀였지만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이 엿보였다.
두 사람의 비무 아닌 비무는 내공을 거의 쓰지 않은 채 진행됐다. 홍령의 몸 상태를 고려해서일 거다.
반대로 말하자면, 홍령은 한 줌의 내력만 가지고 청화를 넝마로 만들어 버린 거지.
저게 바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산의 검인가.
심상 속 화산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화산파 검의 정수인 재생의 검을 전수받은 나조차도 그 검의 궤적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저 정도라면 무당신의의 내단은 홍령이 복용하는 게 제일 나을지도…….
“왔어요?”
“응, 여기서 이러고 있는 줄은 몰랐네.”
“오, 오셨어요. 헉, 헉…….”
“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니니까 쉬세요. 잠깐 홍령이랑 얘기 좀 할게요.”
계획된 만남은 아니지만 홍령과 할 얘기가 있는 건 사실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두고 홍령과 걸음을 옮겼다. 이제 산을 내려가기로 한 표사들과 청화, 화산파의 무인들이 반갑게(?) 회포를 풀고 있었다. 사실 회포라기보단, 표사들은 자기들은 이제 끝이라며 자랑을 하는 거 같았지만…….
웃긴 건, 화산의 제자들이 표사들을 부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거였다.
처음 홍령의 지명을 받아 실전된 화산의 정신을 전수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결의에 불타던 이들이었는데.
오히려 제일 넝마가 된 청화가 웃으며 그들을 축하했다. 부러움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아직 부족하다는 갈증만이 엿보일 뿐이었다.
“괜찮아요.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홍령은 내 표정을 보더니, 별거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때 임무를 받고 나갔던 삼대제자들은 그리 뛰어난 실력은 아니었어요. 삼대제자 중에서도 주력은 본산에 있었죠.”
과거를 말하는 홍령은 더 이상 회한에 차 있지도 않았다. 다 털어버린 과거를 말하듯 그녀는 태연했다.
“그래도 얼마나 고마워요. 그때 그들은 능력 있고, 젊었고, 몇몇은 돌아갈 집도 있었어요. 지금 내 마음에는 안 차도 나름 대문파의 제자였다고요. 얼마든지 화산을 버리고 살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잠시 돌아서 그들을 바라보는 홍령의 시선은 실로 자애로웠다.
“그러니 나도 그 보답을 해야죠.”
“청화는 좀 어때?”
“자질은 형편없어요.”
“그래도 속가문 중에선 괜찮은 편인데.”
“내가 모를까 봐요? 나도 청화문을 구할 때 당신 옆에 있었잖아요.”
맞다, 그랬지.
그래도 그때는 청화의 실력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까지 짜진 않았던 거 같은데.
“그때는 그냥 당신의 조력자 중 하나로 생각했으니 그 정도면 나쁘지 않겠다 했죠. 그때 태양의원의 규모를 생각하면, 그 정도면 충분했으니까. 창천도 있었고요.”
“혹시 다른 쪽으로 마음에 안 차는 건―.”
아무리 홍령이 쿨하게 넘기려 한다 해도, 기억이 다 돌아온 상태에서 청화는 남편의 새 여자다. 그리고 내가 알던 홍령은 사실 그렇게 쿨한 귀신이 아니었다. 쪼잔할 때는 누구보다 쪼잔한 귀신이었다고.
“솔직히 청화의 자질이 창천이나 남궁 소가주 정도였어도 마음에 안 찼을걸요.”
“그렇지? 이해해.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쩔 수 없이―.”
“유일무이한 전승자잖아요.”
어?
“화산의 제자는 아니지만, 내 개인의 성취를 이었으니 어찌 보면 제자나 다름없죠. 아무리 대단해도 성에 안 찰 거고, 이를 데 없이 형편없어도 품을 수밖에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돼.
뭐긴 뭐야, 그냥 쪼잔한 놈이지.
아무래도 나는 내 친어머니인 존재의 그릇을 너무 얕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