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제가 알면 삼촌의 다음 계획에 방해가 되는 겁니까?”
“음, 그건 아냐. 하지만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기는 해.”
답답하지만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금리는 표정이 어두웠다.
그간 나를 대신해서 바빴으니 한숨 돌리라고 휴가차 보낸 건데. 잘못 선택한 건가.
물론 그런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무슨 휴가겠냐만은 일 핑계가 아니라면 금리는 절대 스스로를 쉬게 내버려두지 않으니까.
태양의원 대표로서 가는 자리지만 할 일은 아무것도 없게 만들어둔 건데 그게 되레 무능에 대한 스트레스를 준 모양이다.
금리처럼 유능한 워커 홀릭에겐 쉬느니 차라리 본인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에서 뛰어다니게 해주는 게 좋을지도.
“어쨌든 알겠습니다. 허면 저는 앞으로 있을 경쟁을 대비한 준비를 하면 되겠습니까?”
경쟁.
태양의원은 화산지회에 출전하지 않는다.
나는 김진으로서 소림의 대리인으로 출전할 뿐, 금태양으로서는 의원으로서 소임을 다할 거다.
그런 우리도 경쟁해야 하는 대상이 있다.
“모용약방이 공식 의원 자리에 끼어든 건 내 계획에 없었어. 미안하지만, 부탁한다.”
태양의원은 화산지회의 공식의원이 되었다. 원래는 태양의원 혼자 독점하려고 했는데……
내 계책이 효력을 발휘해 모용을의 마음을 돌렸고 그 결과 개회지가 섬서로 확정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쉽다고 생각한 건지 녀석이 모용약방도 공식 의원에 넣어달라고 주장했단다.
맹주는 화산지회를 감당하기엔 태양의원이 아직 규모가 작아서 어쩔 수 없었다는 등의 변명을 했다고 하지만, 아마 태양의원이 무림문파 기반이 아니라는 점도 녀석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이유 중 하나겠지.
이젠 슬슬 지긋지긋하다.
“오히려 좋은 기회라 생각합니다. 모용약방과의 비교를 통해 태양의원은 더욱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될 겁니다.”
그래, 아예 대놓고 비교를 시켜주자고.
지금까지 의원의 규모를 키우고 내실을 다져온 건 사실 이 순간을 위해서기도 했으니까.
이번 일을 통해 무림문파를 기반으로 하지 않았다는, 그래서 깊이가 없을 거고 믿을 수 없다는 꼬리표를 떼어버릴 거다.
“다른 의원들은 어때? 자신이 없고 그러진 않고?”
“농담이시겠지요? 최고의 실력을 보여주겠다며 다들 열의에 불타고 있습니다. 무림문파 중심의, 독점적인 의료체계에 불만을 품은 실력자들이 모인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그런 그들이 다른 쟁쟁한 무림 의원들을 제치고 무대에 서는 것 아닙니까.”
그래,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내가 한자리에 모았지.
나는 그들을 믿는다. 모용약방과의 보이지 않는 대결에서 그들은 태양의원의 기치를 떳떳이 세울 수 있을 거다.
“태양의원, 그리고 신 금가장의 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모용약방도, 구 금가장도 전부 이겨 보이겠습니다.”
경쟁 상대는 모용약방뿐이 아니다.
화산지회 준비에 필요한 제반사항은 상단과 표국, 전장, 장인들 등의 힘이 필요하다.
기왕이면 그들을 하나하나 계약하기보다는 이를 전부 갖고 있는 집단에게 맡기는 것이 편리한 건 두말할 것도 없다.
개별 계약에 들어가는 품이 줄어드는 건 당연하고, 업체들끼리 함께 일을 해야 하는 부분이 많은데, 개별로 계약하면 그들이 조율을 하는 데만도 상당한 피로감이 발생하니까.
그 계약을 신 금가장이 따내려고 했는데, 태양의원과 똑같은 이유로, 맹주는 또 하나의 업체를 선발했다.
바로 금건양의 구 금가장이었다.
“그리고 이것, 셋째 삼촌이 삼촌에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금리의 셋째 삼촌, 내게는 셋째 형님인 금감양을 말하는 것이다. 구 금가장의 대표로는 그가 참석했단다. 아까 보고 때 꺼내지 않았던 서찰이 내 손에 쥐여졌다. 나는 바로 내용을 확인했다.
「그래도 형제로서 의리가 있지, 누구 하나는 남아야 하지 않겠냐. 나머지를 부탁한다.」
그런가. 금감양은 구 금가장을 떠나지 않고 금건양과 운명을 함께하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그렇다는 건 아버지 금왕의 과거와 내 비밀에 대해서도 알았다는 뜻.
「감양이 동생 태양에게.」
그럼에도 서찰의 마무리는 이전에 받았던 것들과 같이 끝났다.
솔직히 약간 울컥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금리는 아직 내 출생의 비밀을 모르니까.
“태양의원은 그렇다 치고, 신 금가장은 어때? 정말 무한을 제치고 두각을 드러낼 수 있겠어?”
“고모님들이 오셨으니 해볼 만합니다.”
금건양은 지난번 내게 선언하고 간 이후 금왕상단 외의 사업체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야멸차게 굴었다. 전장의 돈을 전부 회수하고 장인들과 거래를 끊거나 가격과 기간을 후려쳤으며 객잔과 주루에 들어가는 모든 물건의 가격을 열 배로 올렸다.
독점 계약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금왕상단이 답도 없는 갑질에 들어가니 원성이 자자했고 무한에서는 형제들이 회동에 임했다가 밖에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욕을 하고 씩씩대다가 회의장을 뛰쳐나오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고.
금건양이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진양 누님이 달려와 눈물바람으로 하소연을 했고 금간양은 빡쳐서 무한 금왕공방의 시설을 전부 뜯어서 여기로 옮길 거라며 달려간 참이었다.
그나마 정반합의 일원이라 상황에 대충 감을 잡고 있는 금손양만 그렇게 됐다며 무한의 주루를 철수할 뿐이었다.
그들이 전부 신 금가장으로 흡수된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상단이야 원래도 태양의원이 가진 구매력이 있었으니까 그걸 기반으로 하면 됩니다. 부족한 부분은 하오문과 개방에 도움을 요청할 겁니다.”
“문제는 표국이야. 알고 있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금리도 인정했듯 그것이 신 금가장의 약점이다.
사실 우리는 금왕표국도 내쳐져 우리에게 붙을 거라고 예상했다. 아니면 표국은 금왕상단이 먹어버리고 우두머리인 금감양만 내치는 방법을 취하든가.
그럴 경우 인프라는 금왕상단이 가져가도 금감양을 따르는 표사들은 우리 쪽으로 왔을 거다. 표국 일이라는 게 그냥 말과 수레만 있으면 될 거 같지만, 은근히 소프트파워가 중요한 분야다. 오랜 세월 표행을 다닌 표사와 쟁자수들의 경험과 감은 중요하니까.
“차라리 잘됐다. 이번에 그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어.”
“사, 삼촌? 어딜 가시는, 그 일이라뇨?”
“따라와. 너도 같이 가자.”
금리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믿음직스럽고 모두에게 신뢰를 받는 총관이라고 해도 결국 태양의원은 나를 중심으로 모인 이들의 집단이다.
그 때문에, 반드시 나의 말만 따르는 이들이 존재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사람들이 그런 존재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태양의원을 벗어났다. 그리고 북촌도 벗어났다. 우리는 한참을 산보하듯 걸었다.
진짜 산을 올랐다는 뜻이다.
수풀이 우거진 지대를 지나자 마치 산적들의 산채 같은 작은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리가 깜짝 놀란 얼굴로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았다.
“의원 근처에 이런 산채가 있었다니……! 죄송합니다,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이건 산채가 아니니까.
“오셨습니까, 금 의원님.”
산적이라고 오해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은 허름한 차림새의 건장한 사내들이 하나둘 수풀에서 걸아 나왔다. 순간 긴장했던 금리는 그들의 면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금왕표국의 제7 표행단 분들이군요. 산적이 있는 건가 싶어 깜짝 놀랐습니다. 헌데 이분들은 무한으로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처음 태양의원이 개업했을 때, 의원의 경비부터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감양 형님에게 받아냈던 제7 표행단. 소유권을 양도받은 게 아니라 일종의 전속계약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함께 지낸 지도 꽤 됐다.
금왕표국에는 내로라할 전설적인 표사들이 많고 그곳에서 두각을 드러내기에 이들의 무공 자질은 그리 수위권은 아니었다.
물론 금왕표국이라는 천하제일표국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독립했다면 중소규모 표국쯤은 어렵지 않게 굴릴 수 있고, 그 전에 중견 표국들로부터 수많은 스카우트 제의가 왔을 만한 인재들.
그런 이들이 무한과 비교하면 변방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지내는 건 솔직히 답답했을 거다. 좌천된 기분도 느꼈겠지.
아무리 내가 대우를 잘해 준다 해도 태양의원은 본질적으로 의원이고 그들의 소속은 결국 금왕표국이라 어쩔 수 없는 벽 같은 게 있기도 했고.
내가 그들에게 물질적인 보상 같은 거 외에 특별히 챙겨준 게 없기도 했다.
그래서 당가에 갈 때 일부러 그들을 데리고 갔었다.
금왕표국에 의지하지 않고, 태양의원의 독자적인 표국을 만들기 위해서.
“곽 표두, 진행은 잘 되고 있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니지, 직접 보여드리는 게 낫겠군요.”
표국은 그냥 사람만 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무공만 뛰어나다고 될 일도 아니다.
그들은 상품을 운송하며 운송 중의 품질을 유지관리 하고, 긴 여정의 일정을 짜고 수행하며 조율할 줄 알아야 하며, 유사시에는 무기를 들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금왕표국은 이 모든 것에 뛰어나다. 그래서 그들이 중원제일인 것이다.
하지만 표국이 금왕표국만 있는 건 아니다. 이 넓은 중원을 어찌 한 업체가 독점할까.
그들이 커버하지 못하는 지역은 중견 표국이나 중소 표국들이 담당한다.
그중, 규모는 작아도 확실하게 차별화에 성공한 작은 표국들이 있다.
평균 이상의 표행 품질에 일정을 최적화해서 비용이 싸든, 품질의 유지관리에 탁월하든, 무조건 표물을 지켜내든, 무엇 하나 특별히 뛰어난 장점이 있는 곳들.
나는 내 표국을 그런 특별한 곳으로 만들 거다.
표사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수풀 속에서 무언가가 부스럭거렸다. 그 무언가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저, 저건……!”
웬만해선 놀라는 일이 잘 없는, 항상 이성적이고 차분한 내 조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짐승이었다.
황금빛 털에는 짙은 흑색의 줄무늬가 고목의 가지처럼 뻗쳐 있고, 형형한 금색의 눈은 마주치는 순간 오금이 털썩 꺾일 것 같은 존재.
비록 영물 급은 아니지만 무림인이 아닌 이들에게는 전염병과 더불어 가장 무시무시한 재해로 취급되는 그것.
“태호, 엎드려.”
그르릉―
거대한 호랑이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곽 표두의 말을 따랐다.
산의 제왕 호랑이.
태호라 불린 호랑이 외에도 몇 마리의 호랑이가 표사들의 말을 따라 움직였다.
“삼촌, 이건 설마……!”
“그래. 새 표국은 호랑이를 이용해 표행에 나설 거야.”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잊었어? 나 남해태양궁에 다녀왔잖아.”
그때 곽 표두 등을 데려갔던 건 단순히 친분을 다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에게 남해태양궁의 기술을 전수받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실종됐던 막내를 데려간다면 그 정도는 거래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