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이미 개회가 결정된 회의에 이렇듯 많은 문파의 대표가 모인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화산지회의 개회지.
큰 규모의 행사는 그 자체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다.
무당이 화산지회 예선을 그리 큰 축제처럼 키운 것만 봐도 그렇다.
해당 행사를 주최하는 이들의 명망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돈을 쓰게 됨으로써 그 지역에 미치는 경제적 효과도 어마어마하다. 지역에 도는 돈은 결국 그 일대를 지배하는 문파로 흘러들어 가게 되어 있으니 무림문파라면 누구든 제 지역에서 화산지회 본선을 치르길 바랄 것이다.
‘그렇다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야.’
금리는 앞줄에 앉은 이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길고 넓은 탁자를 둘러싼 첫 줄에 앉은 이들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 온 무림맹의 주축.
그리고 상단이나 의원처럼 무림맹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이들과 중견문파들이 그 뒤 둘째 줄에 앉았고, 이외 일인문파나 중소규모여도 나름 발언권을 지닐 만한 이들이 셋째 줄에 앉았다.
화산지회의 개회지는 아마 첫째 줄에 앉은 이들의 문파가 있는 지역 중 하나로 결정이 될 것이다.
화산지회 예선에 대한 관심과 흥행도 보통이 아니었는데, 본선은 어떨까.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꽥꽥 울고 있는데 첫째 줄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볼 뿐 섣불리 발언에 나서지 않았다.
거위를 잡을 깜냥이 되느냐도 중요한 문제니까.
소림이 괜히 예선 없이 대표를 선발한 게 아니다.
전 무림의 행사인 만큼 무림맹이 일부 지원을 하지만 무림맹이 그렇게 힘 있고 돈 있는 집단은 아니기에 지원은 미미하다.
결국 문파의 역량으로 행사를 이끌어나가야 한다.
자본도 투입해야 하고 인력도 갈아 넣어야 한다. 온 무림의 고수들이 모이는 그 난장판에서 질서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자파의 무인이 화산지회에 나가 승리할 수 있게 조력해야겠지. 그 전부를 해내는 것은 솔직히 무리다.’
그렇다. 본질을 보자면, 결국 화산지회는 비무대회다.
무림문파의 진정한 명예는 여기서 자파의 무인이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느냐에서 오지, 화산지회를 유치해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버냐가 아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지난번 화산지회는 무림맹에서 진행했어. 당시에는 그렇게 규모가 크지 않았다고 들었지만, 이번엔 다를 거야.’
이십 년 만에 봉문을 깬 남궁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자체만으로도 규모나 화제성 면에서 전과 비교할 수 없다.
무림맹이 자체적으로 감당할 수는 없을 테니 그 누군가는 이 일을 맡아야 하는데, 자파의 무인이 남궁가주와의 최종 비무대에 서기 위해 전력을 다해 지원을 해야 하니 이 일을 맡을 수 없다.
자가당착에 빠져버린 상황.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우리 곤륜이 화산지회의 개회지로 적합하다 사료됩니다만.”
곤륜파의 도사였다. 나쁘지 않았다. 곤륜의 제자들은 예선을 치르며 그 기량이 돋보이지 못했다. 차라리 한 걸음 빠져 실리를 취하려는 생각일 터.
“곤륜은 너무 멀지 않습니까? 그래도 중원무림의 행사인데, 곤륜산맥까지 가긴 좀.”
“화산지회 출전자들이 곤륜까지도 못 오면 출전 가능 여부를 다시 따져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출전자들만 화산지회에 갑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 점창은 어떻습니까?”
“곤륜이나 귀주나.”
“어허, 도장. 어찌 곤륜과 귀주가 같습니까? 그래도 귀주는 중원입니다?”
“거기 사람이 살긴 하오? 죄 귀양 간 자들밖에 없는 곳인데 화산지회 참가자들이 먹고 잘 곳이나 있는지 모르겠소이다.”
“하하, 그러는 곤륜은 수풀을 이불 삼고 노루를 잡아먹으라 하실 생각이신 거죠?”
곤륜과 점창의 대표들이 설전을 벌였지만 다른 이들의 표정은 미묘했다. 그들의 말마따나 곤륜도 점창도 접근성이며 기반시설 등 아쉬운 점이 많았다. 이제부터 준비할 수도 있는 노릇이겠지만, 그렇다 한들 썩 매력적이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 해남이나 모용도 처음부터 후보에서 제외되겠군요. 너무 중원 중심의 사고를 하는 게 아닙니까?”
해남검문의 대표가 따지고 들었다. 그는 불쾌하다는 듯 모용세가의 대표, 모용을을 보았다.
“모용공자도 한 마디 하십시오. 엄연히 같은 무림맹의 일원이거늘 위치가 중원이네 아니네 따지는 것은 너무 불합리하지 않습니까?”
모용을은 내내 표정이 썩 좋지 않다가 해남검문 대표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사실 그는 시작부터 금리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의맹회의 때 얼굴을 본 적은 있지만 자신을 저렇게 볼 만한 일이 있었던가?
금리는 그의 시선이 의아했다. 금태양과 사이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았는데. 실제로 금태양은 그가 의맹회의 때 우리 편을 들 거라고 확신 있게 말했었다. 그리고 결과도 그러했고.
남자가 아름다운 여인을 보며 열렬한 시선을 보내니 이성적인 관심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것과 착각할 수도 없게 적대적인 눈빛이었다.
금리라고 꼭 사내에게 호의적인 눈빛만을 받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모용을의 눈빛을 해석할 수 있었다.
‘미움, 열등감, 그리고…….’
천하제일금가의 여식으로 절대 꿀리는 입장이 아니었으나 신분제가 존재하는 이 세상에선 금리보다 존귀한 남자들이 분명 있었고, 그들은 금리가 어릴 때부터 끝없이 구애해왔다. 금왕이 그녀의 혼인을 금리의 자유에 맡겼기에 금리는 그들을 전부 거절했다. 딱히 마음이 가는 이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거절당한 남자들이 보내는 시선이 저랬다.
‘제까짓 게 뭔데 날 거절해! 제까짓 게!’
그들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금가장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금왕과 그녀의 아버지 금건양은 개의치 않았다. 신변의 위협을 받은 일도 있지만 표국의 호위무사들과 금리 본인의 무예가 범인은 넘어섰기에 큰 탈 없이 헤쳐나올 수 있었다.
‘저 이가 내게 관심을 표한 일이 있었던가. 그럴 만큼 자주 마주친 것도 아닌데.’
영문 모를 적의를 표출하던 모용을이 회의장으로 고개를 돌렸기에, 금리도 다시 모용을에 대한 관심을 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다른 분들께는 실례되는 말인 줄 압니다만, 화산지회는 그냥 비무대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화산지회가 가진 무게를 짊어질 만한 곳이 아니면 개회가 어려울 거 같습니다.”
그 말에 곤륜과 점창 대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반대로 말하면 입지고 뭐고 니들은 그만한 위치가 아니다, 하고 뭉개버린 거나 다름없다.
“허면 모용 공자는 어디가 그만한 무게를 짊어질 수 있다 여기시는 거요. 혹 모용가가?”
“아뇨, 저희 모용세가는 화산지회 개회에는 뜻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제 가문이 있는 요녕은 곤륜산만큼이나 중원에서 멀고, 점창이 있는 귀주보다도 척박한 곳이니까요.”
그 말에 한 발짝 물러나 있던 이들이 모용을에게 시선을 모았다. 모용가는 개회에서는 발을 뺐다. 그 대신 다른 곳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거렷다. 모두가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저는 남궁세가가 있는 안휘에서의 개회를 제안합니다. 어떻습니까?”
허어. 누군가 모용을의 말에 감탄을 내뱉었다.
개회를 욕심내고 있던 곤륜과 점창의 대표는 남궁세가라는 말에 그 즉시 짙은 패배감을 얼굴에 드리웠다.
‘중원에서 다소 동쪽으로 치우쳐져 있긴 하지만 곤륜이나 요녕만큼 먼 것은 아니다. 거기에 남궁세가. 그 독보적인 이름에 더해 이만한 일을 주관할 능력도 충분하지. 남궁세가가 아니더라도 안휘는 충분히 큰 도시고 상업적으로도 발달해 있으니 수많은 사람이 몰려도 도시의 기반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모로 문제점들을 단숨에 상쇄하는 훌륭한 조건이었다.
다른 문파들은 자파의 제자가 승승장구할 수 있게 조력해야 하지만, 가장 정점에 선 남궁세가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모용세가가 어째서……?”
“신기한 일이군. 남궁가의 봉문 이후 이십여 년의 세월 동안 모용가의 남궁세가에 대한 경쟁심도 흐려진 건가?”
“뭐, 우리로서는 손해 볼 일은 아니지. 남궁세가는 봉문하는 동안 안휘에 대한 지배력도 꽤 내려놓았으니 우리가 끼어들어 이득을 볼 수도 있겠어.”
“그래도 남궁세가가 가져가는 것이 보통은 아닐걸. 이십 년간 두문불출하느라 손해 봤던 걸 한 번에 회복하겠는데.”
금리의 옆자리에 앉은 이들이 수군거렸다. 대부분 무림과 깊은 연관을 지닌 상단, 전장, 표국 등의 대표라 돈 얘기가 제일 먼저 나왔지만, 사실 그게 핵심이기도 했다.
모용세가와 남궁세가의 경쟁은 대를 이어져 내려왔다.
헌데 모용가가 남궁세가가 봉문으로 피해본 것을 단숨에 회복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그 뒤에 숨어 있는 내막을 모른다면 당연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금리도 삼촌인 금태양에게 섬서사변의 뒤에 모용가가 있다는 소릴 듣지 않았다면 그들의 행보를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이번에는 섬서가 아니라 안휘의 힘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건가.’
자신의 그릇이 작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모용가의 욕심에는 그녀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금태양의 말대로라면 모용가주는 남궁세가를 이기기 위해 그 모든 일을 벌였다.
그런데 이제는 이겨버리는 게 아니라, 아예 남궁세가의 기마저 흡수해버리려 한다.
천하제일의 기를 전부 흡수한다면 모용가주를 막을 자는 없다.
‘이 제안을 다른 이들이 반대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삼촌이 원하는 곳으로 개회지를 끌고 가야 해. 하지만 이 분위기에서, 어떻게?’
이미 모두들 모용을의 제안이 명실상부한 최고의 제안이라고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곤륜과 점창 외에도 슬쩍 제안을 해보려고 했던 이들도 마음을 접고 남궁세가가 좋겠다고 말을 얹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모용을이 다시 금리를 직시했다.
“사실 이런 얘기는 남궁가의 대표와 해야 합니다만, 남궁가에서는 금 소저에게 자신들의 뜻을 위탁했다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맞다. 정확히는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은하가 그녀에게 대리를 부탁했다.
“소가주는 중요한 일로 태양의원을 떠날 수 없어 그리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가주는 개회지에 관해서는 ‘어디가 되든 상관없다’고 뜻을 밝혔습니다.”
실제로 남궁은하는 중요한 볼일 때문에 태양의원에 남았다. 무당에서 돌아온 직후 창천이 남궁세가의 검을 소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세세한 조정을 위해서는 남궁은하가 있어야 했다. 남궁세가는 모든 것을 남궁은하에게 맡겼기에 다른 대표의 파견은 없었다. 이십여 년간 봉문을 했음에도 녹슬지 않은 남궁세가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태도였다.
“허면 남궁세가가 이 일을 주관해도 아무 상관이 없겠군요.”
이대로 가면 모용세가가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된다. 막아야 했지만 금리에게 남궁은하의 대리인 그 이상의 발언권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무림의 행사고, 아무리 무림과 깊은 관련이 있어도 태양의원은 무림문파가 아니었다. 아니, 무림문파였어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자리한 이곳에서 입이나 벙끗할 수 있을 리가.
‘지금쯤 삼촌의 안배가 나타날 거라고 하셨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