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뒤로 물러나라!”
남궁은하가 홍령을 잡아 뒤로 보냈다. 후다닥 뒷걸음질 치는 홍령을 받아들자 남궁은하가 검을 뽑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현건이 우리가 있는 동굴 안으로 진입한 순간, 두 자루의 검이 부딪쳤다.
오랜만에 보는 현건의 검은 전날에 비해 훨씬 강맹하고 예기가 넘쳐서 남궁은하가 없었다면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현건 뒤에 무당의 고수가 몇 명이나 더 따라오고 있지 않나!
이쪽에 나도 있고 홍령도 있지만 그래도 수적으로 열세.
만에 하나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목숨만 부지하면, 좌수검 등이 내가 어디로 향한지 알고 있으니 연락이 닿지 않으면 찾으러 오리라.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하며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금 의원, 오해입니다!”
남궁은하의 거침없는 공세에 애를 쓰던 현건이 나를 보며 외쳤다.
“우리는 대화를 하러 왔습니다!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흥, 검을 거둘 생각 없이 하는 말은 궤변일 뿐이다!”
내 대신 남궁은하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더욱 그를 몰아붙였다. 남궁세가 소가주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빛나는 검이 유성의 파괴력을 보이며 별처럼 빛났다.
남궁은하의 말이 맞다. 그들이 대화를 원했다면 남궁은하가 처음 검을 뽑았을 때 검을 들지 말았어야 했다. 현건이 검을 뽑은 것은 단순 호승심인가, 아니면 그저 검이 겨눠졌기에 검을 뽑을 수밖에 없었던 검수의 버릇인가.
다른 때라면 그럴 수 있다고 치부할 수 있지만 지금 상황은 현건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엇!”
“!”
그 사실을 현건도 알아차린 걸까, 순간 그가 검을 내렸다.
남궁은하의 유성과 같은 검은 현건의 목을 노리고 날아간 상태였다.
전의가 없는 자를 베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 그 사실이 남궁은하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는지 그녀의 검 또한 서둘러 궤적을 벗어났다.
그러나 예리한 검 끝은 완벽하게 목적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현건의 뺨을 거칠게 긁고 지나갔다.
강직해 보이는 그의 얼굴뼈 위에 그어진 실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금 의원.”
현건은 아예 제 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포권을 취했다.
“이러면 제 진심을 믿어주시겠습니까?”
검수에게 검은 자존심의 상징이다. 어떤 이들은 문파나 가문보다도 검에 걸린 자존심을 더 중히 여기기도 한다.
뭐, 그래도 온몸이 무기인 무림인이 날붙이 하나 안 쥐었다고 위협적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좋습니다. 변명을 들어보죠.”
어차피 우리에게 지금 상황보다 더 나빠질 것도 없다.
“금 의원의 서찰을 받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이건 무당이 명예를 회복할, 아니, 과거의 죗값을 조금이라도 치를 기회가 될 거라고 말입니다.”
현건은 정말 애가 닳은 표정으로 호소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의맹회의 직후 저는 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나도 현건이 그러지 않을까 생각했다. 무당의 명예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녀석이니까.
“하지만 그건 과거의 잘못이 드러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끝까지, 홀로 모든 걸 책임지시는 게 아니라, 모두가 함께 잘못을 짊어져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신의께서는 미래의 무당에 과거의 짐을 지우기 싫다고 하셨지요. 허나 드러난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해서 마음속 짐까지 덜어지는 건 아닙니다.”
“무당의 죄를 나눠 짊어지지 못해서 자존심이 상했다?”
녀석이 무엇보다 정당한 명예를 원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거기까지는 범인으로선 감히 헤아리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현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금 의원이 과오를 바로잡으려 나선 일에 무당이 그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다는 사실, 저는 그것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뭐라도 할 수 있다면 최소한 저 자신에게라도 부끄러움을 덜 수 있을 텐데. 그조차도 할 수 없다니. 그런 제안조차 받지 못하다니.”
으음……
차라리 죄책감을 나누지 못해서 자존심이 상했다는 쪽이 나을 뻔했는데.
내 입장에서 무당은 내 편이 아니다.
현건이나 무당신의라면, 글쎄, 심리적으론 무당보다 가깝긴 하지만 그들도 무당파가 아닌 건 아니고. 그들의 입장이나 나와 손을 잡은 이유를 따져보면 서로의 이득을 위해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사이라 보는 게 좋겠지.
그러니 내가 내 일에 무당을 끼우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현건 녀석은 무당이 정의롭게 명예를 회복하길 원하니 그 일이 섭섭할 수는 있다.
……우리가 아주 서로의 이득만 생각한 사이가 아니기도 하고.
“도장의 말을 믿어보죠.”
“금 의원……!”
하아, 지금 내가 한 발 물러나는 건 내 조카 때문이다.
만에 하나라도 창천을 밀치고 내 조카사위가 될지 모르는 녀석이니까.
그래도 짚을 건 짚어야지.
“하지만 그건 도장 개인의 생각입니다. 무당의 생각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거기다, 도장의 말이 진실이라면 저 뒤에 대기하고 있는 무당의 고수들은 대체 뭡니까?”
“저도 바보는 아닙니다. 장문인을 비롯한 다른 무당파 일원들까지 제 생각에 전부 동의하리라고 여기진 않습니다. 하지만 일부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요.”
“그렇다면?”
“금 의원의 서찰을 받자마자 저는 저와 뜻을 함께할 만한 분들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금 의원을 만나기 전 모여 얘기를 나누고자 했지요. 그래서 사흘 후 도착으로 약속을 잡은 겁니다.”
현건은 다소 애절할 정도로 자신의 사정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저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현직 장로부터 무당의 재정담당에 이대제자 중 무술교관을 맡고 있는 이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무당의 실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며, 평소에도 자신과 뜻을 같이했던 사람들이고, 이번 무당신의의 결정에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등등……
“금 의원도 생각해보십시오. 저희가 금 의원을 잡아 무당으로 압송할 예정이었다면 이보다 더 빠르게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약속장소도 진짜 신의의 면벽동이 아닌 다른 곳으로 지정했겠지요. 저 혼자만 들어온 게 아니라 저 밖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들어왔을 겁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데 더 의심하고 있을 수도 없다. 검을 내리지 않고 계속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던 남궁은하마저 검 끝을 미적지근하게 내리고 내 쪽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으니.
“그래서 내가 뭘 어찌하기를 바라는 겁니까?”
내가 졌다. 아니, 졌다라고 하기는 뭐하지. 어쨌든 우리 쪽에선 오해하기 쉬운 상황이었으니까. 오해를 풀었다 정도로 하자고.
“특별히 원하는 바는 없습니다. 그저 금 의원이 하는 일에 저희를 수족처럼 써주길 바랄 뿐입니다. 이 일에 무당이 한 손 거들었다 떠들고자 하는 것도 아니니, 이름이 크게 알려질 일이 아니어도 됩니다. 그저 후대에 우리가 이 일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전할 수 있으면 족합니다.”
떳떳함.
녀석이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마음.
“수족은 생각을 하지 않죠. 내가 어떤 일을 맡겨도 의심 없이 수행할 수 있습니까?”
“예. 그러하겠습니다.”
“그게 설령 무당을 해하는 일이라 해도?”
“……!”
“대답해보세요. 내가 만약 과오를 바로잡는 일에 필요하다고 하면, 현건 도장, 내가 당신에게 무당 장문인의 목을 가져오라고 해도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럴 만한 이유를 설명해주신다면.”
“수족은 생각을 안 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요. 저는 일을 맡김에 있어서 그래야 하는 당위도 이유도 알려드리지 않을 겁니다. 사전정보 하나 없이 그저 덜렁 임무만 주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하겠습니까?”
좀 과한 요구이긴 하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현건까지는 어찌 믿는다 쳐도 밖에 있는 무당의 고수들까지 백 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다.
거기에 무당 전체가 아니라 무당의 일부다.
그들에게 전달된 내 뜻이 무당 장문인 쪽에 흘러나간다든가, 만에 하나라도 여기에 모용가나 혈교의 간자가 아직도 남아 있어 그쪽으로 새어나간다면 그보다 낭패가 없다.
내가 그런 입장이라는 건 현건도 이해할 터.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나도 현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
“당신을 믿겠습니다.”
“!”
“금 의원이 대의가 아닌 다른 쪽으로 우리를 악용하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내 눈으로 보아온 금 의원과 금 의원의 뜻이 펼쳐진 태양의원을 보고 내린 결정입니다.”
현건은 아예 내 앞에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태양의원을 처음 시작했을 때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무당의 대제자가 내 앞에, 내 마음대로 자신을 써먹으라며 무릎을 꿇다니.
“그리고 무엇을 걱정해 이런 강한 조건을 내미는 지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걸 역이용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희를 부려주십시오.”
나는 현건에게 됐다고 손을 내저었다.
“대의를 위해서라지만, 그 또한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으니 하는 일입니다. 상하관계가 아니니 무릎까지 꿇을 필욘 없습니다.”
성의는 그 정도면 됐다.
“그러면 바로 내가 요구하는 걸 말하도록 하죠. 밖에 있는 고수들과도 함께 얘기합시다.”
“여긴 대화하기에 부적합하지요. 조금 떨어진 곳에 무당의 장원이 하나 있습니다. 손님들을 모시기도 하는 곳이니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당을 이용하는 건 원래부터 계획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곳 신의의 면벽동에 들어온 이후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스쳤다. 그냥은 쉽지 않겠지만 무당의 협조를 받는다면 훨씬 수월할 것이다.
* * *
무림맹 본회의장.
한동안 한산했던 그곳에는 오랜만의 회의로 인해 활기가 넘쳤다. 많은 문파와 가문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무림맹주가 손을 들어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허면 다들 참석하신 듯하니, 회의를 시작해봅시다. 이번 회의에서는 화산지회 개회 여부를 다룰 것이외다. 만일 개회가 확정이 된다면 그 세부사항 또한 조율을 해야 할 겝니다.”
무림맹주는 일인전승 문파의 장으로, 인품이 훌륭하고 덕망이 높은 데다 무림 외에도 관과 사이가 좋아 십여 년 전 만장일치로 추대된 인물이었다.
무림이 어지러운 시기라면 이보다는 보다 카리스마 있고 영도력 높은 이가 무림맹주가 되었겠으나, 지금처럼 난세보다는 평화에 가까운 나날이 이어져 온 상황에서 이보다 더 좋은 이가 없었다.
그 누구와도 척을 지지 않았기에 무림맹주가 되었다는 특성상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을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공정함을 기대할 수도 있다.
금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화산지회의 개회를 찬성하는 표결에 거수를 들었다.
참석한 대표 대부분의 손이 번쩍 올라갔다.
사실 개회는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남궁세가가 참석을 공표하였는데 화산지회를 반대했다간 남궁세가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허면 과반수로 화산지회의 개회를 결정하는 바이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 다음으로, 화산지회의 개회를 어디서 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구하고자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