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좌수검은 낭패라는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홍령의 정신이 좀 오락가락(?)할 거라는 사실은 이미 고지해 뒀다. 눈앞에서 같이 보기도 했고.
나를 처음 만났을 때는 이름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의술 외에 다른 부분들은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하나씩 자신의 전생과 관련된 것들을 떠올리는 그녀를 보며, 좌수검과 같이 있으면 그 속도가 배가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한 것도 사실.
기억나는 게 더 진전됐으면 진전됐지 퇴보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태양의원에는 내가 연락을 넣겠다. 서둘러 출발하는 게 좋겠군.”
“같이 안 가시고요?”
“그날까지 검을 다듬고 있겠다. ……그녀를 부탁한다.”
좌수검은 슬픈 눈으로 내 뒤에 숨어 있는 홍령을 곁눈질하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그래도 한 번 더 같이 가자고 해볼까 했지만, 내 소매를 꽉 쥐는 홍령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무당으로 갈 겁니다. 소가주는 어쩌실 겁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게 해다오. 마침 돌봄이 필요한 여인이 있는 듯하니 내가 뭐라도 거들 수 있을 거 같군.”
남궁은하는 나와 홍령이 어떤 관계인지 같은 것은 묻지 않았다. 나와 좌수검의 짧은 대화로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기라도 한 건지. 나로서도 구구절절 긴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내 입으로 상황을 정리하면 더 씁쓸해질 거 같으니까.
“좋습니다. 홍령, 지금 가야 할 데가 있어. 같이 가자.”
“날 두고 가지 마요. 당신 옆에 있을래요.”
우리는 빠르게 짐을 꾸렸다. 소림에서의 볼일도 끝났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 * *
무당에는 일전에도 간 적이 있지만, 그건 사실 진짜 무당에 갔다고 볼 수는 없다.
화산지회 예선이 열렸던 곳은 산 아래 번화한, 태청의문을 비롯해 다양한 의원들이 영업을 하고 있는 대도시다.
그런 곳과 무당의 도사들이 수련을 하고 있는 곳은 엄연히 떨어져 있다.
이번에 우리가 향한 곳은 바로 그런 산속이었다.
정확한 위치는 중간에 현건과 전서구를 교환하며 확인했다.
사실 이런 위치는 남에게 함부로 알려주는 게 아니다.
무당신의가 스스로를 벌하기 위해 면벽에 들어가긴 했지만 그곳이 그냥 널리고 깔린 산속 어딘가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무당 같은 대문파에서 쓰는 면벽동이면 모르긴 몰라도 무당에서 나름 성지라 불리는 명당이 아니겠는가?
그런 위치를 외부인에게 쉽게 발설할 리가 없다.
당장 내 대모인 마의만 봐도, 얼마 전이 되어서야 무당신의를 해치러 가지 않았나.
무당신의가 면벽에 임하고 있는 그 장소를 정확히 찾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다는 뜻이다.
그런 곳을 이리 쉽게 알려준다는 건 좌수검이 내가 찾아낸 발견, 그리고 면벽동을 찾아봐야 하는 당위성을 잘 전달했다는 거겠지.
“과연 무당이군. 그저 지나가는 길인데도 이리 자연지기가 풍부하다니. 가는 길이 아직 멀지 않았다면 그대로 주저앉아 운기행공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난 별로. 무당은 다 싫어요.”
“그런가. 홍령이 싫다니 그럼 그런 걸로 하겠다.”
“아냐. 그건 내 얘기고요. 은하는 은하 마음대로 해요. 무인은 강하면 강할수록 좋다고요. 선배 말을 듣도록 해요.”
“그렇군. 그 또한 홍령의 말대로 하겠다. 하지만 금 의원의 볼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그때 생각해보지.”
여기 오는 길은 소림에 달려갈 때처럼 발에 불이 났다 싶을 정도로 달려가진 않았다. 홍령을 무리시키고 싶지도 않았고, 현건과 속도도 맞춰야 했으니.
소림에서 무당에 오는 것보다 태양의원에서 무당에 오는 것이 더 빠르지만, 녀석은 해결하고 갈 일이 있다며 삼 일의 시간을 부탁했다. 전서구를 통해 위치를 전달받긴 했지만, 그 일대의 결계 등을 푸는 데는 자신의 힘이 필요할 거라며.
무당신의가 마의의 습격을 받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테니, 경계는 그때보다 더 심해졌을 거다. 신의는 자리에 없지만 그래도 무당의 자존심이 공격받은 거니까.
나도 무당을 들쑤실 생각은 없다. 들쑤신다 해도 지금이 아니라 다음 번이겠지.
의맹회의에서 충분히 그 체면을 물 먹이기도 했고, 당장 내 눈앞에는 무당이 아니라 모용세가가 있다.
무당신의의 일로 체면이 깎이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정파무림의 거두.
앞으로의 일을 잘 이끌어 나가려면 그들과 큰 트러블을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공교롭게도 아직 하루가 넘게 남았군요.”
그리 급하게 오지 않았다고 해도 사실 삼 일이면 무당과 소림을 왕복할 수도 있다. 보통 사람들이 아닌 무림인들의 속도 기준이긴 하지만, 어쨌든.
“기왕지사 미리 온 거, 달리 할 일도 없으니 주변을 살펴봅시다. 무당신의의 공력이 보통을 넘었으니 그 공력이 모인 장소라면 분명 눈에 띌 겁니다.”
“좋은 생각이다. 멀리서 관찰하는 정도라면 문제가 없겠지. 나는 남쪽으로 가보겠다.”
“홍령은 나와 북쪽으로 가죠.”
사실 오면서 남궁은하가 홍령을 잘 상대해주었다.
과거나 신분 같은 것에 대해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홍령으로 대해주는 그녀가 편한지 홍령도 남궁은하와 잘 어울렸다. 식솔이 많은 가문에서 소가주로 자라 다양한 나이 대의 여자 친척들을 상대해봐서 그렇다고 했는데, 그래도 더 이상 홍령을 맡겨놓는 건 미안한 일이지.
따로 물어봐야 할 것도 있고.
남쪽 방향으로 주변을 살펴보며 걷다가, 이 정도면 충분히 남궁은하와 멀어졌다 싶을 즈음. 나는 발을 멈추고 그녀를 불렀다.
“홍령.”
“왜 불러요?”
홍령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와 함께한 기억은 있지만 그 외에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 듯, 때론 아이처럼, 혹은 치매에 걸린 노인처럼 보이는 그녀.
“그 연기, 언제까지 할 거야?”
“그건 무슨 소리예요?”
“전부 기억났잖아. 나와 함께했던 기억은 당연한 거고, 귀신으로서 홍령이 아니라 화산의 매화검 홍령으로 살던 그 시절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잖아. 그런데 왜 아닌 척해? 왜 좌수검을 그렇게 대한 거야?”
처음에는 의심하지 않았다. 워낙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 여겼다. 귀신으로 존재하던 이가 만들어진 육신에 들어갔고, 또 그 몸에 화령이 술법을 부렸으니 그만한 부작용은 충분히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홍령도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지금까지의 상황이 있으니, 기억이 혼란스러운 것처럼 행동하면 모두들 믿을 거라고.
나를 포함해, 남편이었던 좌수검까지도.
“……어떻게 알았어요?”
홍령은 거듭 부정하진 않았다. 대신 내가 처음 보는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슬프고 쓸쓸하지만 무언가를 납득한 사람의 미소였다.
“무당은 다 싫다고 했으니까.”
“그, 그거요? 그게 왜요? 당신 곁의 귀신일 때도 나는 무당을 싫어했는데?!”
“그랬지. 하지만 그때는 왜 무당이 싫은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지. 단순히 도가는 무릇 파마와 파사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싫은 거 같다고 말했어. 왜 그들이 싫은지 알게 된 건 좀 나중의 일이었고.”
하지만 좀 전, 남궁은하에게 무당이 싫다고 말하던 홍령의 얼굴은 달랐다. 그것은 이유를, 근거를, 맥락을 아는 이의 궤적이 뚜렷한 불호였다.
동시에, 홍령은 말했다.
‘아냐. 그건 내 얘기고요. 은하는 은하 마음대로 해요. 무인은 강하면 강할수록 좋다고요. 선배 말을 듣도록 해요.’
자신의 과거가 뭉텅이 채 잘려나간 사람은 그런 배려를 할 수 없다.
저 존재가 싫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싫다.
그런 마음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저 싫은 것을 접하지 않았으면 좋겠는 게 사람 마음이다.
내 이유는 있지만, 그래도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좋으니까. 그렇게 말하려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전부 알고 있어야 한다.
뭐, 그 전에도 긴가민가한 부분은 있었다.
내 몸에 급하게 빙의해서 좌수검을 붙잡고 그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그때 홍령이 느낀 감정을 내 몸으로 직접 느꼈으니까.
그걸 아는 사람에게 ‘저 아저씨 누구? 무서워!’라고 가장해봤자 속을 수가 있겠냐고.
“진짜 다 숨길 거면, 내 뒤에 숨어서 그렇게 아련하게 좌수검을 보지나 말든가.”
“으아, 결국 그걸 들켰네요.”
홍령이 과장되게 큰 한숨을 쉬어 보였다. 끝까지 숨기려고 했던 사람이 낭패를 봐서가 아니라, 그래도 누구한테만큼은 비밀을 공유하고 싶었던 눈치였다.
“처음 이 몸에 들어왔을 때부터 알았어요. 이건 내 몸이지만, 내 몸이 아니라는 걸.”
홍령은 천천히 걸으며 말문을 열었다.
“언젠가는 떠날 거라는 걸 알았죠. 그 계기가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나는 도화선의 심지가 짧은 벽력탄이나 마찬가지예요. 알았지만, 화령에게 말하진 않았어요. 그 아이가 슬퍼할 테니까.”
“좌수검도 슬퍼할 테니까, 그래서 기억을 잃은 척한 건가?”
“그래요. 화령을 도와달라고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불렀지만…….”
나는 홍령의 뒤를 따라 걸었다. 좌수검의 얘기를 할 때 홍령의 표정을 보면 당장 무당신의의 면벽동이고 뭐고 홍령의 손을 잡고 좌수검에게 달려가고 싶을 거 같았다.
하지만 홍령이 먼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밝게, 활짝 웃으면서.
“그 사람, 여자 있죠?”
“어? 어떻게 알았―.”
“다 낡아빠진 검 손잡이에 새로 만든 술이 달려 있고, 머리끈 같은 것도 좋은 물건이고. 휘소는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남자거든요. 분명 그 사람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누군가가 있는 거죠. 난 알아요. 내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홍령은 웃는데, 왜 내가 울 것 같은지.
“나는 안 돼요. 나는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내가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버리면 휘소도 나를 따라서 영영 과거에서 살 거예요. 휘소는 앞으로도 오래오래 살아가야 하니까.”
“홍령, 하지만 그건―.”
“맞아요. 내 이기심이죠. 그에게는 선택권을 주지 않는, 나는 나쁜 여자예요.”
나는 홍령이 왜 내게 이 얘기를 하는지 이해했다.
그녀는 강하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던 반려 앞에서 자신을 잊은 척 연기하고, 그가 다른 사람과 새 삶을 살기를 바랄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비밀을 감추는 게 힘들어 나와 공유하길 바랄 리가 없다.
“어쩔 수 없어요. 이게 내 선택이니까. 그러니까 날 도와줘요. 응?”
그녀는 자신의 완벽한 연기를 위해 나를 파트너로 선택한 것이다.
“……알았어.”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원래부터 우리는 파트너였으니까.
그녀가 나를 도왔고, 내가 그녀를 도왔듯이.
우리는 그렇게 함께였으니까.
“너무 심각한 표정 짓지 마요. 그게 순리라는 거예요. 그래, 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에요? 내가 좀 알아도 되지 않아요? 설마 당신, 그게 누군지 모르는 건 아니죠? 당신 새어머니가 될 사람인데?”
“아니, 새어머니라니. 그건 좀―.”
“왜요? 맞잖아요? 잠깐만, 생각해보니 내가 당신 엄만데, 왜 나한테 반말해요? 내가 이렇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는데? 어? 태양아?”
일부러인지 아닌지 모를 말에 나는 그냥 울다가 웃어버렸다. 그러다 뿔난다는 말에도 웃음을,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파트너가 하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나의 이 다정하고 안타까운 어머니, 아버지에게, 사랑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