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목표와 방식을 정했으니 남은 것은 행동뿐.
세부사항을 빠르게 조율한 후, 도개걸과 은 파파는 서둘러 소림을 떠났다.
소림 방장도 자기가 아는 술사들에게 연락을 취해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정반합의 무인들에게 소림으로 오라 연락을 취했으니, 좌수검은 여기서 기다리면서 홍령을 지켜주세요.”
“……알았다. 그대는 바로 떠날 건가?”
“홍령의 상태를 좀 지켜보고요.”
사실 돌아가서 꼭 해야 할 일도 없었다. 의원에 관한 일은 화산지회 관련한 것까지 전부 금리에게 일임하고 왔다. 그 부분을 빼면 내가 할 일은 검을 가다듬는 거 정도?
정반합의 연락이야 내가 어디에 있든 받을 수 있으니 그 걱정도 없다.
화령의 술법이 끝난 홍령의 몸은, 여전히 붕 떠 있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크게 이상이 있지도 않았다. 아마 조금 시간이 지나면 일어날 것이다.
“여기 있었구나.”
“둘째 형님.”
절터를 서성거리던 내게 둘째 형 현금이 다가왔다.
소림에 귀의한 ‘무승’이자 나를 자신의 아들로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 사람.
내가 소림의 대표로 나가니 둘째 형님에게 어느 정도 지도를 받긴 해야 할 텐데 그런 부분이 좀 불편하단 말이지.
그래서 지난번 팔부신검을 받았을 때도 슬쩍 도망쳤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도망치긴 난감한걸.
“그래, 팔부신검을 받았다 들었다.”
“네, 비급도 받았어요.”
“읽어는 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반합이 모이기 전까지 비급을 훑어보긴 했다. 몇 번 비급을 따라 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무재가 탁월한 편은 아니란 말이지.
심상 속 화산에서 비급서를 읽고 체득하는 훈련을 받긴 했지만 척 본다고 그 묘리까지 짚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건 내가 더 잘 안다.
“방장께서 형님께 지도를 좀 받으라 하시던데요.”
이럴 땐 탁월한 과외선생이 하나 붙는 게 제일이긴 했다. 현금이라면 내가 굳이 대다라니경이니 뭐니 읽지 않아도 알아서 착착 맞춤형으로 설명해줄 테니.
“일단 한번 펼쳐 보거라. 그 검을 본 다음에 얘기하자.”
나는 망설임 없이 팔부신검을 뽑았다.
전에 쓰던 검도 괜찮았지만 망가졌고, 그 뒤로 임시 검을 쓰다가 만나게 된 이 검은, 뽑아 들 때부터 명검이라는 느낌이 전해졌다.
가볍고 거침이 없으며 내 공력을 받아들이는 데 전혀 무리가 느껴지지 않는 검.
나는 그 검으로 소림방장이 준 비급의 내용을 펼쳐나갔다. 그걸 보는 현금의 눈이 깊어졌다.
“어떻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낸 후 현금을 보자 그는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 대신 다음 주문을 말했다.
“이번에는 원래 쓰던 검법을 펼쳐 보거라.”
팔부신검으로? 화산의 검을?
하지만 실전도 아니겠다, 지도해준다는데 딱히 토를 달 이유가 없었다.
재생의 검이 팔부신검의 끝에서 펼쳐졌다. 확실히 명검이라 소림의 검법이 아니라도 펼치는 데 무리가 없었다.
검이 그래 봤자 검인데 무슨 검법을 가리겠냐 하지만, 같은 모양이어도 남의 검을 쥐면 바로 알아차리는 법이다. 전생의 학창시절 다 똑같은 삼선 슬리퍼를 신어도 내 것이 아닌 건 바로 아는 것처럼. 검에도 사용자에 따라 길이라는 것이 들고, 그 길은 가장 자주 펼치는 검법을 따른다.
팔부신검은 평생 소림의 검을 펼치는 데 쓰였을 텐데, 화산의 검을 펼치는데도 무리가 없다니…….
“그래, 그렇구나.”
재생의 검 서본결을 전부 펼치진 않았다. 그건 너무 힘들기도 하고, 형님이 바라는 건 그게 아닐 거 같아서다. 재생의 서만 펼쳐 보였지만 형님은 뭔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런 겁니까?”
“소림의 검은 굳이 익히지 않아도 되겠다.”
“예?”
“무에 예냐. 지금부터 새 검을 익힌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거늘. 너로서도 더 좋은 일이 아니냐.”
“그렇긴 하지만, 방장께서 이것저것 챙겨주셨는데. 그리고 저는 소림의 대표잖습니까.”
“엄밀히는 대리인이지. 소림의 제자가 아니니 팔부신검을 쥔 것만으로도 그 의미는 충분하다고 본다.”
진짜 그래도 괜찮나?
형님의 말대로 그게 내겐 좋긴 한데.
“걱정 말거라. 방장께서도 네가 방금 펼친 검을 본다면 나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 거다.”
“이유를 물어도 됩니까?”
“그 검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불법이 설파하고자 하는 바와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인세의 고통을 벗어나 부처가 되는 길, 우주만물이 다시 재생되는 길을 말하는 그 시작이 아니더냐?”
“……!”
놀랐다. 진짜 놀랐다.
이 검의 이름이 재생이라는 건 말하지도 않았는데.
역시 ‘무승’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다르다는 건가?
“또 다른 느낀 점이 있습니까?”
“또 다른 느낀 점이라…… 그래, 느리게라도 다시 회복하고 있는 섬서의 정경이 떠올랐다.”
미친. 더 놀라기도 힘들겠다.
그나저나 섬서가 회복하고 있다니.
“새싹조차 돋지 않던 땅이라 들었는데, 이십여 년 만에 풀이 자랐다더구나. 일전의 지기를 회복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는 셈이지. 적어도 백여 년은 지나야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되지 않으려나 싶다.”
“다행입니다. 아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백여 년이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니까요.”
“네 말이 맞다. 허나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조금은 그 시간을 단축시킬 수는 있겠지.”
반대로 말하면 모용가주가 백여 년의 지기를 흡수한 건가.
그 생각을 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한 사람의 극악무도함이 다수를 도탄에 빠트리는 건 쉽다. 아니, 그것도 마냥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도탄에 빠진 다수가 그 피해를 회복하는 어려움과 비교하면 어림도 없다.
정반합과의 회의에서, 우리는 모용가주가 또다시, 더한 잔악한 짓을 하지 못하게 막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이미 피해를 본 이들의 회복을 도울 순 없다.
섬서라는 거대한 지역의 기허라는 게, 물자를 풀어 지원하는 걸로 해결 가능한 일도 아니고, 가능하다고 해도 나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할 수 있다고 해도 내가 내 모든 걸 그곳에 쏟을 수는 없는 거다. 내 개인의 삶은 물론 연관된 다른 사람들의 삶도 책임지고 있으니까.
모용가주가 과거의 행적을 심판받고 온 세상으로부터 지탄받게 되더라도, 섬서가 갑자기 회복되거나 그러진 않을 거다.
그래서 사람들이 복수란 건 결국 허망함뿐이다라고 하는 걸까?
“인세에 있는 자가 그런 표정을 지어서 쓰겠느냐.”
그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났던 모양이다.
하긴, 그런 생각은 불가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겠지.
“형님은 그런 적 없으세요? 현세에 남은 미련이라든가, 모든 걸 무념무상으로 넘겨버리는 게 가능합니까?”
“그랬으면 이미 부처가 되었겠지.”
현금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아차. 나를 아들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한 거람.
“후회하고, 더 나은 길이 없었을까 고민하고, 그래도 다시 해볼 순 없을까 생각하고. 그런 번뇌가 있기에 인간이니. 나 또한 번뇌로 인해 불교에 귀의했지만 방장께서는 그 번뇌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셨지.”
“어떤 번뇌였습니까?”
현금이 하녀와 정을 통했던 건 불교에 귀의한 이후다. 그 전에도 출가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그러자 형님이 은은히 미소를 띠었다.
“너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지 않느냐.”
설마? 아버지 때문에?
생각해보면 둘째 형님과 큰 형님은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지 않다.
둘째 형님 또한 아버지의 지저분한 사업을 보면서 자랐던 것이다.
“혈육의 인연이라는 것은 참으로 질기고도 강하지. 불교에 귀의했음에도 쉬이 끊을 수가 없는 것이더구나.”
그 부분은 나도 동의한다. 홍령이나 좌수검과의 만남 또한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으니까.
“허나 핏줄로 이어져 있지 않아도 질긴 인연 또한 있으니, 참으로 세상사 알 수 없는 노릇이지. 무승이라는 이름으로 불려도 깨달음의 경지까지는 아직도 멀었나 보다.”
그러면서 현금이 나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설마, 다 아는 건가? 내가 자신의 아들이 아닌 것은 물론, 제 이복형제조차 아니라는 걸?
“근데 왜 번뇌를 받아들이는 거죠? 번뇌를 버리는 게 아니라요?”
나는 어설프게 말을 돌렸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말이었지만 일단 불편한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인간으로서 겪어야 할 희노애락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버린다면 그것은 부처가 아니라 미물이 되는 길이라 하셨지. 방장께선 그렇기에, 번뇌하는 인간이기에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바로 부처라 하셨다.”
……선택지를 잘못 고른 거 같은데. 차라리 그냥 혈통의 비밀 쪽으로 틀어버릴걸.
“네 고민이 일견 해답이 없어 보일지언정 포기하지 말고 붙들고 늘어져 보거라. 허면, 어찌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부처의 길을 말이다.”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서 빨리 끊고 튀어야겠다. 검 지도도 받았고(?) 고민 상담도(?) 받았으니 이제 충분해. 이 이상 여기 있다가는 본격 불법 강론이 시작되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인사를 한 후 빨리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저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흑단 같은 머리가 달빛에 찰랑이는 것만 봐도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소가주? 무슨 일이라도?”
남궁은하는 내가 떠날 때 같이 가겠다며 내가 신경을 못 쓰는 사이에도 소림 일대를 가벼이 유람 다녔다. 사람도 만나보고 근처의 명승지를 다니며 수련도 하는 거 같았는데.
“금 의원, 그리고 소림의 승려이신가. 마침 잘되었군.”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뺨이 약간 붉었다. 무언가에 살짝 흥분한 것 같았다.
“이 주변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수련을 하다가 독특한 곳을 발견했다. 굉장한 자연지기가 한 자리에 응축되어 있었는데, 혹 소림의 성지일까 싶어 함부로 발을 들이진 못했다.”
“그런 곳이 있어요? 어디쯤인데요?”
마침 나도 수련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자연지기가 응축된 명당이란 말에 귀가 솔깃했다. 소림의 성지라면 남궁은하는 몰라도 나는 혜택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아니면 좌수검과 무인들을 보내도 되고.
“여기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달려서 한 시진쯤이었던 것 같다. 수풀이 우거지고 사계절의 꽃이 한 번에 피어 있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지. 그곳을 발견한 순간 인세가 아니라 선계의 장소인 줄 알았다.”
“소림의 성지 중 그러한 곳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소만.”
어?
“잠깐만, 방향은요?”
“이쪽이다.”
남궁은하가 가리킨 방향, 그쪽으로 달려서 한 시진.
기이한 기분이 가슴께를 울렁였다. 나와 형님의 눈이 마주쳤다.
내가 생각하는 그곳이라면 거긴 소림의 성지는 아니다.
“태양아, 거긴 설마―.”
하지만 나도, 형님도 그곳에 가본 적이 있다.
“일단 한번 가보지요. 형님, 그리고 소가주. 함께 가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