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홍령 안의 사술을 다시 발동시켜 화령에게 더 많은 것을 묻기로 결정을 했지만 바로 시행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정반합이 다 모이기 전까지 홍령은 침으로 재워둔 상태였고, 그 상황에서 사술을 다시 발동시키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봤자 반 시진 정도가 걸리는 것뿐이었지만.
그 잠깐을 이용해 나는 좌수검을 찾았다. 그는 소림의 불탄 경내에서 복잡한 상념을 털어내듯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좌수검.”
내가 그를 불렀음에도 그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재차 부르는 대신 그가 검을 거둘 때까지 기다렸다.
물 흐르듯 밤공기를 가르던 검이 서서히 기세가 잦아들더니, 이내 꽃이 지듯 자연스럽게 거두어졌다. 그제야 좌수검은 나를 돌아보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됐다.”
“하지만―.”
“그대 결정이 옳다. 홍령도 그리 말했을 거다. 화령을 구해달라고 했으니까.”
화산의 제자였던 그녀가 어째서 혈교의 령주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처음부터 모용세가의 간자였을까? 아니면 섬서사변 이후 그들과 손을 잡았을까?
어쨌든 그들은 한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모용가주가 새로 꾸밀 음모가 무엇이든 그것은 화령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질문을 가다듬을 겁니다. 그러면 최소한 얼마간의 시간 정도는 남을 테니, 좌수검이 홍령과 함께 시간을 보내십시오.”
그 시간이 대충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속을 제일 시끄럽게 하는 일이었다. 일 각인지, 한 시진인지, 반나절인지, 하루보다 더 긴 시간이 허락된 것인지. 소림 방장은 평범한 인간과는 다를 거라고 말했지만 그 시간마저 장담하지는 못했다.
“아니. 그대가 함께해라.”
“예? 하지만―.”
“이유는 아까의 답과 같다. 지금의 홍령은 그걸 바랄 거다.”
아.
그렇다. 홍령은 좌수검을, 휘소를 기억하지 못한다.
어렴풋한 그리움은 있지만 그게 누구인지 떠올릴 수 없다.
“그래도 당신의 이름을 불렀잖습니까. 아니, 같이 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시간에 혼란을 느끼는 것은 낭비다. 내가 함께하는 건 산 자의 미련일 뿐.”
좌수검의 의지는 굳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구태여 한 마디를 더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요. 홍령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어떻게 남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그건.”
“당사자의 선택에 맡기는 게 제일 낫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여기에는 좌수검도 할 말이 없었는지 그저 침묵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시주, 준비가 다 되었네.”
소림방장의 부름에 우리는 홍령이 누워 있는 사당으로 발을 옮겼다.
“잘 될는지는 모르겠구료. 한 번도 읊어본 적은 없는 진언인지라.”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죠. 부탁드립니다.”
“알았소이다. 시작하지.”
본래 전해지는 불경에는 없는, 방장들만 구전으로 전수받는다는 초혼의 독경이 나직이 울려 퍼졌다. 항마진언이나 파사, 파마가 결국 귀신을 쫓는 것이니 반대로 초혼을 시도하면 사술이 활성화 될 거라 판단한 거다.
그에 맞춰 나는 홍령의 몸에 꽂혀 있던 침들을 뽑았다.
가장 먼저 눈이 뜨였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후, 정확히 나를 바라보았다.
“홍령입니까, 화령입니까?”
“사저는 잠들어 있다.”
화령이다. 사술을 다시 재활성화하는 데 성공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이 깨어 있는 만큼 홍령의 시간이 사라질 겁니다.”
“아아, 그런가…… 그건 예상하지 못했군요.”
“그러니 답해주십시오. 모용가주가 또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겁니까? 남궁세가를 이기기 위해서, 또 섬서사변과 같은 일을 벌일 작정인 겁니까?”
내 질문에 화령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고민하는 눈치더니, 이내 결정을 한 듯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모든 것을 설명하려면 구구절절 너무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으니 이렇게 하지요. 내 손을 잡아요. 모든 것을 보여주겠어요.”
“그런 방법이?”
“혼을 나누어 넣었다고는 하나, 새로운 술법을 쓰는 것이기에 내 본래의 혼에도 영향을 미쳐 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홍령의 시간을 아껴주려면 어쩔 수 없지요. 모든 전말을 직접 말로 하는 것보단 나을 거예요.”
“방장스님, 괜찮겠습니까?”
덥썩 그의 손을 잡을 수도 있었지만, 혹시 모르니 나는 독경을 외던 소림방장을 돌아보았다. 이게 혈교의 간악한 술수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아주 안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방장은 독경을 멈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령이라는 술사의 본신이 여기 있는 것도 아니니, 혼의 조각이 벌이는 사술쯤이야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본승이 대처할 수 있소이다.”
“그러면, 해보겠습니다.”
나는 화령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 * *
여긴 어디지?
화령의 손을 잡은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던 건 기억하는데.
갑자기 내 앞에는 사막과 같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아니, 사막이라기보다는.
“아아, 안 돼.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어……!”
내 앞에 있는 것은 벌거숭이와 같은 험준한 산이었고, 한 여인이 내 발치에서 오열하고 있었다. 나는 한눈에 그녀가 젊은 시절의 화령임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여기는―
“내 화산, 화산이, 사저! 사형!”
벌거숭이가 됐다는 점만 빼면 이곳은 심상 속 화산과 거의 흡사했다.
화령이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으니 이것은 아마 이십여 년 전. 그때 화령의 기억일 것이다.
[맞아요. 이건 나의 기억입니다.]
화령?
[나는 당시 첫 강호행을 떠났었지요. 그러던 중 모산파의 도사들을 만나게 되어 술법의 신묘함에 푹 빠져 무림의 일을 잊고 살다가 뒤늦게 사변의 일을 접하게 되어 돌아왔어요. 하지만 화산에는 내가 기억하던 그 모든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지요.]
그러다 눈앞의 장면이 변했다.
이번에는 어느 산 속의 작은 사당이었다.
기묘한 문자가 새겨진 깃발을 등 뒤에 멘 노인은 제 앞에 오체투지를 한 화령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을 말하느냐.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사문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썼다고 믿고 싶은 것은 이해하나―.”
“아뇨, 도인께선 분명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그런 일을 시도한 술사들이 있었다고요. 그게 누군지만 알려주셔요.”
도인은 난감한 눈치였다. 그대로 장면의 시간이 흘렀다. 눈이 내리고 새싹이 돋고 꽃이 피었다. 그러다 갈색으로 물들어 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낙엽이 쌓이고 가지가 앙상해진 어느 날, 도인이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북동쪽으로 가거라. 나의 사형이었던 이가 그곳에 몸을 의탁했다고 하니, 가 사정을 말해 보거라.”
그리고 다시 장면이 어두워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홍령 사저와 화산의 무고함을 밝혀낼 다른 방법이. 하지만 그때 나는 그 방법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그들을 되살려내 그들의 입으로 직접 결백함을 듣고 싶었어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좌수검은 흐트러지는 정신을 다잡아 화산의 생존자들과 종남의 제자들을 모아 정반합에 합류했고, 그들과 함께 진실을 좇았다.
마의는 미쳐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미쳐버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실을 좇았다. 마의라는 별호를 받을 정도의 행보를 지속하며 혈교와 접촉을 꾀했고 그 결과 유의미한 증거를 손에 넣었다.
화령은 그들의 중간쯤 되었을 거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은 그녀의 이성과 감정을 흔들었고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
그 결과,
[나는 혈교를 찾아냈습니다. 마침 그들은 원래 령주였던 이가 숨을 거둔지라 새로이 이끌 자가 필요했고,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나는 령주가 될 수 있었지요.]
이해관계라면?
[죽은 자를 되살리는 일이요.]
다시 밝아졌다.
이번에는 전처럼 그렇게 환하게 밝지 않았다. 어두운 동굴 속이었으니까.
어두운 동굴 속에서도 붉은 피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동굴 벽 전체를 피칠갑을 해놓았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아래로 시선을 내린 순간, 구역질이 났다.
그곳엔 온통 시신이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 살아있었던 것 같은데, 말라비틀어진 것처럼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을 되살리는 데는 세 가지가 필요해요. 하나는 응축된 생기죠. 그 생기는 당연히 산 사람으로부터 가져와요.]
그 죽음으로 가득한 동굴 한가운데로 화령이 걸어왔다. 아무 감정도 없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가운데 무심히 놓여 있는, 주먹만 한 붉은 보석을 집어 들어 챙겼다.
나는 그 보석을 알고 있었다.
모용세가로 인해 퍼졌던 원인 모를 병. 그 병을 치료할 때 모용갑은 저렇게 붉은 약을 사용했다.
[그래요. 생기를 응축한 것이기에 그 성질은 영물의 영단이나 내단과 비슷하지요. 소량을 쓰면 어떤 병에든 효과가 있고, 일시적으로 강한 힘을 주거나 기분을 좋게도 만들어요. 허나 양이 정도를 넘어설 경우, 충분한 시간을 들여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지 않으면 빠르게 주화입마에 들기에 조심해야 해요.]
주화입마라면, 설마?
모용갑이 갑자기 폭주해 온몸이 터져나갔던 그걸 말하는 건가?
[맞아요. 아마 지나치게 과용했겠지요.]
지금껏 겪어왔던 일들의 이유와 의미를 알아가는 과정은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납득도 됐지만 동시에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이제 그 생기와, 그릇이 될 육신이 필요해요. 육신을 준비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요.]
두 가지? 강시를 만드는 거 외에 또 다른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것까지 알고 있다니 얘기가 빠르겠군요. 맞아요. 지금 홍령의 그릇은 강시를 만드는 기법을 응용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확실하고 간단한 방법이 있어요.]
장면 속 화령의 시선이 바닥에 널리고 깔린 시신들 중 하나로 향했다.
“이건 사저랑 좀 닮았는걸. 이번엔 이걸로 시도해볼까.”
……!
[강시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아요. 육신을 구성할 때부터 막대한 기를 필요로 하지요.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육신에 혼을 붙이는 건 훨씬 쉬운 일이에요.]
화령이 너무 대수롭지 않게 얘기해서 어디부터 문제인지 말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문제는 접어두자. 지금 내가 물어야 할 건 그런 게 아니다.
화령과 혈교는 이해관계가 맞아 손을 잡았다고 했다.
그건 혈교 뒤에 있던 진정한 배후, 모용세가의 이해관계와 일치했다는 뜻일 거다.
모용세가에서도 되살리고자 한 누군가가 있다는 건가?
[엄밀히 말하면 죽은 것은 아니었으니 다소 어폐가 있겠지만, 새로운 육신에 혼을 싣는 것이니 방법에 차이는 없지요.]
……잠깐만. 설마?
[전대 모용가주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남궁세가를 뛰어넘고자 했다더군요. 전대 령주가 제안한 것은 자질이 뛰어난 육체에 혼을 옮기는 것이었어요. 혼을 옮길 그릇으로 제 아들, 현 모용가주를 선택한 건 전대가주였죠. 그는 더 강해지기 위해 아들을 죽이고 그 몸을 빼앗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