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322화 (322/350)

322화

그렇게 말하고 나와 소림방장의 볼 일은 끝일 줄 알았으나……

“이것도 받으시게.”

방장이 품에서 꺼낸 것은 한 권의 비급이었다. 겉은 매우 낡았지만 지금의 흐름상 평범한 물건은 절대 아니겠지.

“과거 소림에도 검을 다루는 이들이 있었다 얘기를 한 적이 있었지. 그 비급이외다.”

“이렇게 귀한 것을…….”

“화산지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소림을 대표해나가는 만큼 조금이라도 익히고 나가주었으면 하는 이 늙은 승려의 바람이올시다.”

그거야 나도 거절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정반합의 수뇌가 모이려면 시간도 있으니까. 그때까지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는 대신 수련을 하면 딱이다.

거기에 수십 권도 아니고, 한 권이 아닌가? 그 안에 담긴 묘리까지 파악할 시간이야 평생을 들여도 모자라겠으나 얼추 따라만 하는 정도라면―

근데 방장이 품에서 계속해서 책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건 그 검법에 따르는 소림의 내공심법이고, 이것은 그 두 개의 무공을 불교 이론적으로 설명해놓은 서책인데, 이것만 보면 또 이해가 어려우니 전대 장문인께서 쓰신 해설서가 있는데, 이 해설서를 보려면 대다라니경을 이해해야 하는데, 또 이것을 본승이 쉽게 풀어 쓴 것이 이것이고―.”

착, 착, 착.

내 양손 위에 수권의 책이 후두둑 쌓였다. 명절에 집에 갔다가 돌아갈 때 “이것도 좀 가져가고, 저것도 가져가고. 김치는 안 모자라니? 배추김치는 있어야지. 갓김치는?”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이, 이제 됐습니다! 충분합니다!”

빨리 안 끊으면 이대로 대웅전 불상까지 받았을 뻔했다. 내가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자 소림 방장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품에 넣었던 손을 뺐다. 도대체 저 품에 책이 몇 권이 들어 있던 거야?! 도라x몽이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도.”

또 책을 주려는 건가 싶어서 움찔했는데, 소림방장이 착용하고 있던, 길게 늘어진 염주를 빼 내 목에 걸어주었다. 책을 한가득 든 상황이라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소림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와 마를 상대하는 싸움은 인간의 인지만으로는 벅찬 면이 많소이다. 부디 그 모든 것들이 시주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를. 아미타불.”

그렇게 말하는 방장의 태도는 너무나도 지극해서 뭐라 투덜거릴 수가 없었다. 합격목걸이 같다고 웃으려던 마음도 쏙 들어갔다. 소림의 대리인이니 그 느낌을 내길 바란다, 그 이상으로 이 사람은 나를 걱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 넘겨주시고 소림은 발 빼고 계시려고요?”

“무, 무슨 소린가?! 당연히 소림 또한 최선을 다할 것이외다!”

“이상하다. 최선을 다하는 게 책이랑 검만 덜렁 주시고 알아서 하라는 게 아닐 텐데…….”

나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소림 방장을 골렸다. 부담을 덜려는 것이기도 했고, 이제 또 우리가 그만한 사이는 되지 않나.

과거의 유산과 짐이 무겁고 아득하지만, 나를 뒷받침해주는, 함께 이를 짊어지려는 현재의 사람들.

그래, 이들과 함께라면 할 수 있다.

“크흠, 흠! 안 그래도 시주가 홀로 불도에 임하는 것이 염려되어 현금에게 시주를 지도해 달라 말을 해두었소이다. 지금쯤 올 때가 되었는데―.”

“자, 잠깐만요. 형님한테요?”

“저기 오는구료.”

“아,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일단 이건 가져가겠습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배움을 청하면 쓰나요! 독학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정 궁금하면 제가 찾아갈 테니 형님한테는 절대, 절대! 먼저 찾아오지 말라고 해주세요. 그럼 이만!”

그리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는 속도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진짜 친아버지를 알게 된 상황, 나를 제 아들로 착각하고 있는 둘째 형님을 보는 게 민망한 것도 있지만……

안 그래도 함께 부처의 큰 뜻 안에서 불자가 되자! 하는 태도를 시시각각 보이는 사람인데, 불경과 불도에 대해 배우기 시작하면 진짜 기정사실이 되어버릴 거라고.

“태양아! 어딜 가느냐!”

“급해서요! 나중에 봐요, 형님!”

소림 방장의 마음을 내 품 가득 안은 채, 나는 내 머리털을 지키기 위해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정반합이 한자리에 모였다.

좌수검과 은 파파, 도개걸, 그리고 내가 둥글게 모여 앉은 자리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역시나 개방의 도 방주였다.

“거, 진짜 생각도 못 했다. 그 모용가 망할 놈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그렇게 치면 저도 개방도에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어요.”

“아, 그건 내 명령이 아니었대도! 그 동네 놈들이 전대 당가주 발가락을 핥아먹던 거지, 내가 널 어찌 해보려고 한 게 아니야!”

“예예, 그건 아는데요, 방주께서 그간 개방 관리에 소홀하셔서 그 사달이 일어난 건 맞으니까요.”

“아이고, 내가 무슨 말을 말지.”

지난번 사천에 갔을 때 내 뒤통수를 거하게 때린 거지들 얘기였다. 그들 개별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당한 만큼 돌려주긴 했지만, 그래도 할 얘긴 해야지.

“어쨌든, 이렇게 모인 건 새로이 밝혀진 사실 때문입니다. 이미 전달한 바대로, 우리가 혈교의 행사라 알고 있었던 모든 일의 배후에는 모용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모용가의 힘을 키우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점이라면 그런 사달을 벌이면서까지 한 일이 남궁세가와의 일전이고, 이에 패한 후 남궁세가도 봉문을 했지만 모용가도 그에 준할 만큼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는 건데…….”

“그 부분에 대하여는 이 늙은이가 설명하지요.”

잠자코 듣고 있던 은 파파가 입을 열었다.

항주의 하오문을 통째로 맡긴 터라 얼굴을 본 지 오래되었는데, 전에 큰 무리를 한 것치곤 얼굴이 좋았다. 그 전까진 은퇴를 생각하고 있어서 오히려 생기가 없었나? 싶기도 하고. 역시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일을 해야 한다니까.

“모용과 남궁의 관계는 실로 오래되었습니다. 남궁세가는 대대로 천하제일을 배출했고, 모용은 항상 이에 도전하는 입장이었지요. 그게 한 이백여 년도 넘었지요.”

백 년이라.

전생에서 인간의 평균수명이 많이 올라 백 살까지는 능히 산다고 했지만, 그래도 이백여 년이면 최소 삼 대는 지나야 하는 시간이다.

하물며 여긴 평균수명이 전생보다 짧으니 대체 몇 대를 이어 전해져 내려온 라이벌인 건지 감도 안 잡힌다.

그렇게 긴 세월 항상 한 쪽이 지는 입장이었다면 그 한이 쌓일 법도 하군.

“거기에 이런저런 소소한 일들도 있었지요. 전전 대쯤엔 당시의 천하제일미를 두고 연적 사이였던 적도 있고. 그래도 역시 가장 화제가 되었던 일이라면 바로 전대에 있었던 일이지요. 모용가 소가주가 남궁세가 최고 기대주를 꺾었던 일이 있었더랍니다.”

“모용세가가 남궁세가를 꺾은 적이 있었다고요?”

“예, 그가 전대 모용가주입니다. 현 가주의 애비 되는 자인데, 드디어 모용가가 천하제일을 차지하나 말을 할 만큼 실력이 대단했으나 불행히도 그리 명이 길진 못했지요. 그가 꺾은 것은 당시의 적장자였는데, 이후 그는 비무에서의 상처가 심해져 죽고, 그 동생이 소가주 자리에 올랐습디다.”

“그게 지금 남궁가주인가?”

“그렇지요. 그때만 해도 아주 꼬꼬마였는데, 그 꼬꼬마가 또 절세의 무재를 타고나 열 살이나 더 나이가 많은 형의 원수를 쓰러트리고. 그때 큰 부상을 입은 건 아니었을 텐데 뒈진 걸 보면, 역시 홧병이 아니었을지. 홀홀.”

“잠깐만, 지금 족보가 너무 복잡한데. 정리 좀 할게. 그러니까 대를 이어 내려온 남궁가와 모용가의 관계에서, 현 모용가주, 섬서사변을 일으키고 그 기를 흡수했을 거라 추측되는 장본인은, 한 번 남궁세가를 꺾었지만 그 동생에게 다시 패한 자의 아들인 거지?”

“예, 그렇지요.”

“그리고 현 남궁가주는 형의 복수를 한 그 동생인 거고.”

정리하자면, 현 모용가주는 남궁세가를 한 번 꺾었으나 바로 역전당한 자를 아버지로 둔 거다. 그리고 그 패배 후 아버지가 죽은 거고.

그 일을 눈앞에서 봤다면 그만한 분노와 그만한 열등감이 있을 법도 하다.

“충분히 납득할 만큼 들으신 것 같으니, 이 늙은이가 도련님께 한 가지 묻겠습니다요. 모용세가를 어쩌실겝니까?”

“그걸 뭘 묻기까지 해? 당연히 쳐부숴야 하는 거 아닌가?”

성격 급한 도개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모용가에 대한 얘기가 시작됐을 때부터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태도였다.

반면, 좌수검이 반문했다.

“저 멀리 요녕에 있는, 남궁가주가 아니면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힘을 지녔을 거라 예측되는 자를 어떻게 쳐부술지 그 방법이 있는지 묻고 싶군, 도 방주. 또한, 그런다고 섬서가 회복이 될 수 있을지도.”

“갑자기 왜 그렇게 자신감 없는 태도야? 자네 검은 뒀다 국 끓여먹을 겐가?! 종남의 원수, 자네 아내의 원수가 누군지 이제야 명확히 밝혀졌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붙였던 왼팔이 또 떨어지기라도 한 게야?!”

“복수 그 자체로 전부가 아니란 말을 하고 싶은 거다.”

“뭬야?! 네놈 지금 네 아내가 돌아왔다고 너는 이제 됐다는 게냐?!”

“정반합의 시작이 무엇이었나? 과거를 규명하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아니었나. 도 방주, 그대의 말대로 하고자 한다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뿐이다. 겨우 되찾은 현재마저도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이야.”

“이게 진짜―!”

“그만!”

“아니, 금가야! 내 말이 맞지 않냐?!”

“태양아.”

“회주로서 명합니다. 그만하세요.”

보다 못한 내 만류에 두 사람 다 입을 착 다물었다. 도 방주는 여전히 성이 난 상태였고 좌수검은 그런 도개걸을 답답하다는 듯 보긴 했지만.

“둘 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논할 단계가 아니에요.”

“뭔 개소리야? 그러면 복수 말고, 뭘 해야 하는데?”

“모용세가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말에 복수를 성토하던 도개걸도, 미래를 생각하자던 좌수검도 낯빛이 변했다.

“그만한 일을 벌이고도 원하던 것을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남궁세가가 봉문을 하긴 했지만 모용세가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겠죠. 근데 남궁세가가 기나긴 봉문을 풀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제 도움으로 그들은 체질적인 문제를 극복하게 될 겁니다.”

“그걸 모용가 놈들이 알게 된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군.”

“네, 어쩌면 더한 일을 벌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럴 겁니다.”

천하제일인에 버금가는, 어쩌면 그 체질적 한계를 치우면 천하제일일 자가 새로이 꾸밀 음모.

그것을 막아내야 한다.

“과거에 대한 복수도, 미래를 위한 움직임도. 전부 그 다음에나 가능할 겁니다.”

“도련님의 뜻은 그러하군요. 맞는 말입니다, 홀홀. 허나 지금부터 그 새로운 계략을 파헤치는 것은 실로 쉽지 않겠고만요.”

“……화령에게 들으면 됩니다.”

“태양아.”

모용가주가 또 다른 계책을 꾸미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화령의 존재 때문에 더욱 강하게 굳어졌다.

이 모든 일을 해결할 열쇠는 그녀에게 있다.

“그러면 들어보자고. 지금 어디 있어? 바로 들으면 되는 거 아냐? 그걸 가지고 왜 여태 질질 시간을 끈 게야?”

도개걸의 말이 맞다. 나는 시간을 끌었다.

그 모든 것을 위해 얼마 안 되는 홍령의 남은 시간을 태워버릴 결심을 굳게 다지기 위해서.

“……미안합니다.”

그 말은 도개걸에게, 은 파파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고, 좌수검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고.

홍령과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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