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태양아, 홍령을―.”
좌수검이 다급히 나를 불렀다. 그가 그런 식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어찌 보면 반칙이다. 하지만 나는 그 부름에 깃든 애달픔을 애써 모른 척했다.
“잠시만요. 제게 잠깐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당장 화령이 주고 간 정보를 정리하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나는 깊게 심호흡하고 그녀가 남기고 간 정보를 지금껏 알고 있던 사실들에 꿰어 맞췄다.
그걸 통해 충분히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면, 소중한 시간을 더 많은 정보를 얻는 데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나도, 좌수검도, 그 얼마의 시간을 확보하든 충분하다고 여기진 못하겠지만.
“정리하자면, 혈교는 모용세가가 만들어 낸 허상의 조직인 거고, 그 기반은 중원에서 도망친 술사들인 거죠.”
“과거 흡성대법과 천강시를 연구하다가 무림공적으로 몰려 도주한 자들이겠지. 그리고 그 술법을 이용해 섬서사변을 일으켰고―.”
잠깐만. 뭔가 놓치고 있지 않나?
뭔가 느낌이 그랬다. 분명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딱 한 가지, 그 빈 부분만 맞추면 모든 것이 완성되는데―
“……아.”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나?”
“아, 아, 아!”
퍼즐이 맞춰졌다.
모든 그림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 의원?!”
“흡성대법! 섬서를 초토화시킨 건 그걸 발전시킨 술법! 흡성대법은 타인의 기를 빼앗아 자신의 기로 만든다고 했잖아요?!”
“그래. 그게 어떻다는 거지?”
“그러면 섬서의 모든 사람과 자연지물에게서 빼앗은 기는 어디로 간 걸까요? 그냥 증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누군가가 그 기를 흡수했겠죠. 우리는 그 사람을 찾아야,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쉬운 답이에요. 누가 그 기를 손에 넣고 싶어 했을까요?”
“……!”
나는 사술 같은 건 잘 모른다. 이십여 년 전 그때,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보고 올 재주도 없다.
하지만 그랬을 거라는 당위, 개연성에 의한 추론은 할 수 있다.
“모용가주. 그가 섬서의 기를 손에 넣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아니, 그 사람이 아니면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남궁은하가 내게 말해준, 남궁세가와 모용세가의 일전, 그 비사의 시기를 맞춰보면―
“모용가주는 섬서사변을 통해 얻은 기를 가지고 남궁세가와 일전을 벌였을 겁니다. 체질적으로 무조건 남궁세가에게 질 수밖에 없는 모용세가지만, 압도적인 기라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을 거고, 그 결과―.”
모용가주는 체질의 벽을 꺾고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차례로 쓰러트렸다.
고작 오 초식, 세 명의 강자를 꺾는 데 그 정도만 필요했을 뿐이다.
허나 섬서 일대의 기를 전부 빨아먹은 괴물도 끝내 천하제일인의 아성을 꺾지는 못했다…….
“……이해가 안 가는군. 그렇게 해서 그자가 얻는 게 무엇이지?”
“무슨 소리예요, 좌수검. 얻는 게 없을 리가 없잖아요?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얻겠죠. 무림인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습니까?”
거기에 부수적인 이득도 있다. 모용세가는 요녕 땅의 패자지만, 그들은 중원으로 진출하고 싶어 한다. 이 부분은 모용을의 말로도 확인한 바 있다.
“그렇다 해도 납득할 수 없다. 그건 자신의 실력이 아니지 않나. 그 방식은 엄연히 사도다.”
으음, 좌수검 같은 사람은 그런 삶의 방식을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나 보군.
하긴 나라고 그 방식에 동감하는 건 아니다.
그저 그런 사람들을 전생에 겪어봤으니 아는 것뿐.
“본질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죠. 요녕은 머니까 중원 정파의 감각하고 생각이 좀 다를 수도 있고요. 아니면…… 그렇게라도 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거나.”
모용세가가 단순히 패자가 되길 바랐고, 그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면 구태여 혈교라는 가상의 집단을 만들어내지 않았을 거다.
선과 정의 따위 신경 쓰지 않을 거 같은 권력자들도 세간의 평가는 신경을 쓴다. 자신이 옳기를 바라는 것은 오히려 그른 수단을 쓰는 이들에게 더욱더 강하게 드러나는 경향이다.
모용세가는 세간의 지탄을 받을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했다.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손에 넣고 싶은 것은, 그저 천하제일이라는 자기만족과 그에 따르는 부수적인 이득만이 아닌 그 이상일 것이다.
“일단 모용세가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습니다. 좌수검, 일전의 조사는?”
“정반합의 일부가 요녕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금쯤 취합된 정보가 하오문에 도착했을 거다.”
모든 사실이 드러난 후, 나는 하오문의 정보망을 정반합에 연결시켜 버렸다. 정반합의 일부는 불편함을 드러냈지만 그게 더 효율적일 거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었다.
“은 파파와 도 방주에게 연락해주세요. 모인 정보를 가지고 앞으로의 일을 상의해야겠습니다. 이건 정반합 회주로서의 명령입니다.”
“알겠다. 지금 바로 움직이지.”
좌수검이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다시 쓰러진 홍령의 맥을 짚어보았다. 어딘지 붕 뜬 느낌이 들던 맥은 육신이 혼을 제대로 붙잡지 못하는 것에서 온 기이한 감각이었을까? 다행히 그 부분을 제외하면 홍령의 맥은 그저 밀린 잠을 자는 사람처럼 고요했다.
“여러 밀린 사정이 있나 보오. 아미타불.”
여태 침묵을 지키고 정좌하던 소림방장이 부처와 같은 미소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급해서 미처 신경을 못 써드렸네요.”
“괜찮소이다. 정반합 회의를 한다니 본승도 그 자리에서 자세한 사정을 들으면 될 일. 내 섣부른 판단으로 되레 시주를 곤란하게 한 것인가 싶어 마음이 불편할 따름이오.”
“그건 아닙니다.”
처음엔 좀 당황했지만, 오히려 그때 소림방장이 항마진언으로 사술을 멈춰준 게 전화위복일지도. 아니었다면 우리는 홍령의 남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화령과의 대화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얻으려 했을 테니까.
“허면 본승이 시주를 보러 온 이유를 이야기해도 되겠소이까?”
“아, 물론입니다. 화산지회 때문이겠지요?”
홍령 때문도 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소림에는 한번 방문해야 했다.
남궁세가가 다시 문을 열었고 화산지회 참석을 공언했으니 무림맹도 더 이상 이 일을 미룰 수 없게 되었다.
화산지회가 열릴 것이다. 그리고 나, 김진은 소림의 대표로 본선에 참석한다.
“사실 우리 소림으로서는 시주가 출전을 한다고 해도 도와줄 것이 없소이다. 자력으로 소림을 다시 일으킬 여력도 부족한 터……. 부끄럽게도, 모든 제반 비용 등을 시주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이외다.”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저는 화산지회에 갈 거니까요.”
정반합의 회주로서 가야 하는 명분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빼놓고서도 나는 화산지회에 가야 한다.
태양의원이 화산지회의 공식 의원으로 활동하게 될 예정이니까.
그러면 과거 호북 예선에서 태청의원 산하 의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화산지회의 비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환자들을 태양의원에서 도맡게 될 것이다.
명성 면에서도, 수익적인 측면에서도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금리가 이 일의 성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데다, 무림문파가 기반이 아니라는 점이 이번에는 오히려 장점으로 발휘될 거다.
다른 문파와 세가들은 화산지회에서 자파 무인이 명성을 날릴 수 있게 총력을 기울이게 될 테니까.
그런 와중에 그들에게는 부수적인 사업인 의원 일에 여력을 기울일 여유 따위는 없을 터.
이 파이를 먹어치울 준비가 된 건 우리뿐이니, 그 건은 확정이라고 봐야지.
그 자리에 내가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김진으로서 화산지회 참석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지만 어쨌거나 주와 부가 확실히 정해진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전 오히려 그런 소림의 대표일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뜻과 의지라면 천 년이 다시 가도 소림은 소림일 테니, 저도 이를 화산지회에서 보여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해해주어 고맙소이다. 허나 불자 된 도리로 그대를 진정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는 법. 잠시 본승을 따라오시겠소이까?”
나는 소림방장을 따라 전각을 나섰다. 우리는 다 타버린 소림 경내를 지나 유일하게 남은 대웅전 앞에 섰다.
사실 난 그리 대단한 걸 받을 거라 예상하지 않았다.
그냥 보내기 뭐하니 의미가 깊은 물건 정도 주지 않으려나?
소림의 제자가 아닌데 소림의 대표로 나서니,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염주 정도 주려나 싶었다. 그런 거면 굳이 여기까지 와서 줄 필요는 없을 거 같지만…….
“들어오시게.”
하긴, 종교의 신물을 주고받으려면 어느 정도 격식을 차려야 하는 법이지.
나는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부처님 불상 앞에 합장하고 자리에 앉았다. 방장은 내 앞에 서서 크게 세 번 절했다. 그리고는 불상 받침대에 손을 댔다.
딸깍―.
받침대 안에 비밀공간이 있었다. 방장은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검이다.
“받으시게.”
나는 선뜻 그것을 받아들지 못했다.
검집이며 손잡이는 평범했지만 이 검이 나온 장소부터가 남다르다.
필시 보통 아닌 내력이 숨겨져 있으리라.
“어려워할 필요가 없소이다. 그저 이름도 없는 검이니.”
원래 그렇게 말할수록 감히 입을 다물 수 없는 내력이 숨어 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차마 소림방장에게, 그것도 이런 분위기에서 그리 말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물었다.
“그렇다 해도 세간에서 부르는 이름마저 없는 건 아니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시주는 천룡팔부에 대해 들어본 적 있소이까?”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수호신이 아닙니까? 그들과 관련이 있는 검입니까?”
“허허, 그렇지는 않소이다. 다만, 이 검이 무림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불법이 흐려지고 세상이 혼탁하였기에, 세간에서는 이 검을 일컬어 팔부신검(八部神劍)이라 불렀을 뿐.”
세상이 혼탁할 때 등장하는 검이라니.
이거 봐, 엄청난 내력이 숨어 있을 거 같았다니까.
“이제 이름을 알았으니 받으시겠는가?”
“……귀한 검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소유가 되는 건 아니다. 이걸 진짜 내 소유로 받아버리면 나중에 둘째 형님 손에 이끌려서 소림의 제자가 되어버릴지도.
잠시 빌리는 검인 편이 내게도 부담이 없다.
“한번 뽑아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게나.”
나는 대웅전을 나가 팔부신검을 뽑았다.
검신은 반투명한 녹색이었다. 옥으로 된 검인가? 검면에는 뜻을 알 수 없는 진언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기를 살짝 불어넣자 검이 가벼이 공명했다.
그 소리가 마치 노랫소리와 같아서, 듣기만 해도 머리가 맑아지는 것만 같았다.
딱히 검에 정통한 편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검이 얼마나 명검인지 알 수 있었다.
“녹옥불장에 쓰인 옥과 한 몸이었던 옥으로 만들어진 것이외다. 검으로서도 손색이 없지만 파사(破邪)와 파마(破魔)의 힘을 가져 그 어떤 사술에도 맞설 수 있을 터이니, 원래도 시주에게 맡기려 했으나 앞으로의 일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구려.”
내가 그랬지, 꼭 무명이니 뭐니 하는 게 정작 더 엄청난 내력을 갖고 있을 거라고!
녹옥불장과 같은 옥이면 그 자체로 소림의 신물이자 장문신부나 다름없는 거잖아!
나는 속으로 소리 없는 외침을 내질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어마어마한 물건의 내력에 기가 눌릴 것 같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검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 팔부신검에 부족하지 않은 검을 펼쳐 보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