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처음부터.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말해주게.”
남은 한 팔이 잘려나갔을 때도 이렇게 다급하고 애처롭지 않았는데.
“……홍령을 만난 건, 제가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다짐한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말했다.
이름과 의술에 대한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잊어버린 귀신, 홍령과의 첫 만남.
나를 구해준 대가로 내 몸에 깃들어 의술을 펼치게 해주었던 공생관계를 지나, 내가 의술에 뜻을 품게 되고, 집을 떠나면서 함께 겪었던 수많은 일들.
그러면서 조금씩 알게 된 홍령에 대한 정보들.
화산과 섬서사변, 그리고……
“―그때 당신을 불러 세운 건 내가 아니었어요. 그녀가, 홍령이 갑자기 제 몸에 강제로 빙의해 당신을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물었죠.”
그즈음에서 내가 아는 한 가장 심지가 단단하고 굳은 남자는 반쯤 무너지다시피 했다.
“휘소, 당신이 그 이름을 말했을 때, 홍령은 한참 동안 그리운 얼굴로 당신의 이름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어요.”
어려운 단어를 외우는 것처럼, 다시는 잊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때는 그 행동이 그저 기묘해 보였는데, 다시 돌이켜보니 내 마음마저 욱신거렸다.
나도 이런데 저 사람은 얼마나 아플까.
심상 속 화산에 가 그들을 만났다 했을 땐 자신도 그들을 안다며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제야 내 검의 뿌리에 어째서 화산이 있는지 알겠다며 아프지만 다행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항주에서 갑작스럽게 령주, 화령을 만났고 홍령을 똑 닮은 기이한 존재를 만났으며, 그 순간 내 곁에 있던 홍령이 사라졌다는 대목까지 털어놓았을 때.
“그 령주가 홍령의 사매, 화령이라는 건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화령.”
흥분으로 쓰러졌던 홍령이 갑자기 눈을 뜨더니 화령의 이름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눈빛은 고요했고 눈앞의 우리가 아니라 저 멀리 먼 곳을 보는 거 같았다. 표정도 원래의 그 다채로운 표정이 아니라 소름 끼칠 것 같은 무표정이었다.
“홍령? 괜찮아?”
“……홍령이 아니다. 화령이다.”
“?!”
내가 놀라 멈칫하는 사이 좌수검은 그 즉시 검을 뽑아 겨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서 허튼 수작이냐!”
“걱정 마라, 휘소. 네 말대로 이것은 소소한 사술에 불과하다. 사저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내 얘기를 전할 수 있도록 해두었을 뿐, 그녀에게 큰 해는 없을 것이다.”
“진정해 봐요, 좌수검. 얘기를 들어보죠.”
“하지만!”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할 수는 없잖아요. 목을 벨 수도 없고.”
나도 사술에는 조예가 없다. 이런 일에 대응할 때는 도사나 승려들의 도력이 큰 힘을 발휘한다고 들었지만, 함부로 소림승을 부르려 했다가 화령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뭣보다 홍령에게 큰 해가 없을 거라는 말은 진심인 거 같았다. 동굴에서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가 홍령을 대하는 태도에는 애정과 염려가 깃들어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런 방법까지 쓴 거지? 홍령은 당신이 위험하다고, 당신을 구해야 한다고 하던데.”
“그녀가 그랬나요. 다정한 사람…… 맞아요. 나는 지금쯤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금 내가 그녀와 연결된 게 아니라, 나의 혼을 조금 나누어 그녀에게 심었기 때문이고요.”
“그렇다면 시간이 무한정은 아닐 거 같은데.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지. 당신을 위험하게 하는 건 누구지?”
내 말에 무표정하던 화령이 잠깐 미소지었다.
“핵심 찾을 줄 아는군요. 모용세가예요. 그들이 우리를 끌고 가 억류했고, 나는 기회를 엿봐 홍령을 도망치게 했어요.”
“……!”
퍼즐의 빈 부분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남궁은하의 말을 들었을 때 어딘가 모르게 아귀가 안 맞는 부분. 그것을 지금 화령과의 대화를 통해 완벽히 짜 맞출 수 있을 거 같다는 예감이 든다.
“모용세가는 혈교와 무슨 관계지? 모용가가 중원의 타 문파를 이기기 위해 혈교와 손을 잡았나? 거기에 무당도 손을 잡았겠지? 그 셋이 한 편이라면 지금까지의 모든 얘기가 설명돼.”
이건 내가 세운 가설이었다. 이게 아니고서는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들을 하나로 묶을 수 없었다.
하지만 화령은 고개를 내저었다.
“전제부터가 잘못됐어요. 혈교는 모용세가와 손을 잡은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혈교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요. 그건, 모용세가가 중원에서 도망친 술사들을 데리고 만들어 낸 가상의 집단이에요.”
“―뭐라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른 건 내가 아니라 좌수검이었다. 검수의 검이 떨릴 정도라니. 얼마나 경악한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흡성대법을 연구하던 술사들, 그들은 정파 무림에게 공격을 받았고 생존자들이 요녕 땅으로 도망쳤죠. 모용세가는 그들을 받아들였어요.”
“흡성대법이라면―.”
“타인의 기를 흡수해 자신의 기로 받아들이는 술법이다. 격체전력이 자신의 의지로 내공을 전한다면 흡성대법은 그 반대다.”
“타인의 허락 없이 그 기운을 빼앗는 거군요. 그렇다면 그게 섬서사변의―.”
“맞아요. 모용세가는 무당과 손을 잡고 그 술법을 발전시켜 섬서를 초토화시켰죠. 처음에는 당가와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들이 거절했기에 혈교의 이름으로 무당과 손을 잡았어요.”
“잠깐만요, 그렇다면 무당은 그 일에 모용세가가 관련된 걸 모르고 있는 겁니까?”
“그래요. 내가 알기론 몰라요.”
“하지만 그들은 모용세가의 최대 숙적인 남궁세가의 약점을 연구했는데―.”
“혈교의 이름으로 무당에게 의뢰를 한 거겠죠. 거기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그건 전대 령주의 일이었을 테니까.”
“그것도요. 당신은 홍령의 사매라 들었는데. 어쩌다 거기서 령주를 하고 있는 겁니까?”
“그건―.”
순간 화령의 목소리가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흔들렸다.
그리고 탁, 탁, 탁, 규칙적인 목탁 소리와 불교의 진언이 들려왔다.
「옴 소마니 소마니 훔. 하리한나 하리한나 훔. 하리한나 바나야 훔. 아나야 혹. 바아밤 하아라 훔 바탁.」
겨울날의 차디찬 폭포수를 끼얹는 것 같은 진언 소리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그 울림이 다가올수록 화령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좌수검! 밖에 나가서 진언을 멈추게 하세요!”
“이, 일단은 여기까지, 다시 또―.”
화령은 그렇게 가까스로 말하고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내가 놀라 그녀를 받아들었고, 좌수검은 문을 벌컥 열었다.
“시주, 괜찮으시오? 사특한 기운이 느껴져 서둘러 달려왔소만―.”
소림 방장이 걱정 가득한 기색으로, 그러나 어딘가 단호한 신령함이 어린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나를 걱정해서 호의로 한 일인데 뭐라고 할 수도 없고, 하아.
아니다, 오히려 잘됐다.
“들어오세요, 방장스님. 마침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내 곁에 홍령이 있다는 것도 알아차린 그다. 방금도 진언으로 화령을 물리치지(?) 않았는가.
극과 극은 통한다고, 반대로 저 사술의 발동 조건이나 홍령의 상태 등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좌수검에게 했던 것보다는 간략한, 지금 상황에 대한 설명만을 한 후 반드시 화령의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한다고 말하자 방장 스님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일이었구료. 본승이 크나큰 실수를 한 모양이오. 방금의 진언은 강력한 항마진언이라…… 흐음.”
방장스님이 깊은 눈으로 바닥에 눕혀진 홍령을 훑었다.
“실로 기묘하구료. 한 육신에 두 개의 혼, 그러나 하나는 빛이 바랬고 하나는 조각난 혼이라. 거기에 이 육신에는 백(魄)이 깃들지 않았으니, 참으로 기이하도다…….”
“방장스님, 어떻게 그 조각난 혼을 다시 부를 순 없을까요?”
화령은 분명 더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다. 왜 우리에게 그 얘기를 전달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조차 듣지 못했다. 혈교가 사실 모용세가가 만들어 낸 것이고, 섬서사변의 배후 그 자체라는 걸 안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지만―.
“좀 전의 진언이 충격을 받았으나 소멸된 것이 아니니, 잠시 쉬면서 그 힘을 회복하면 모습을 드러낼 것이외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혹시 저 사술이 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까요?”
“어느 사람을 일컫는 것이오? 이 육신을 말함이오, 아니면 빛바랜 혼을 말함이오?”
“둘 다요. 그 혼이 육신의 주인입니다.”
“……아니, 겉보기에는 그 귀신과 같은 모양을 띠었지만 이것은 그 혼의 육신이 아니외다. 그 옛적 강시를 다루는 이들이 이와 같은 육신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바 있다 들었는데, 필시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 낸 육신이 아닌가 싶소.”
“그게 어떻게 다릅니까?”
물론 이 몸이 홍령의 원래 몸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은 파파가 그러지 않았던가. 아버지 금왕에게 복수 아닌 복수를 하려 찾아왔던 홍령은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그 시신은 화장을 해 잘 묻어주었노라고.
잘린 팔도 붙여본 나지만 완전히 타버린 육신을 재창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그건 전생의 현대의학으로도 불가능한 경지였다.
하지만 한 일대의 생기를 전부 빼앗는 술법이 존재하는 판에, 그것이 불가능할 이유는 뭘까.
“이 육신에는 혼백 중 백이 없소이다. 이는 육신의 기억이요 육신의 넋이지. 필시 그대가 알던 귀신은 기억과 인지에 어딘가 흐린 부분이 있었을 거외다.”
“……!”
“그런 경우 사술을 써서 억지로 다른 혼을 붙인다 들었소만, 이 육신에는 그러한 술법은 없구료. 허면…… 한때 유명했던 사파의 술사가 만들어 낸 천강시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아닐까 싶소이다.”
“그녀의, 홍령의 일부를 이용해 만든―.”
“좌수검은 알고 있나 보구료. 맞소이다. 그 방법은 생전의 강인한 무인을 강시로 되살려보고자 하는 시도에서 시작되었소이다. 머리카락, 뼈, 시신을 태운 재 등…… 그것을 이용해 강시를 만들면 특별한 술법 없이도 구천을 떠돌던 무인의 혼이 달라붙는다 하지.”
“그러면 그게 넋이 있는 거 아닙니까?!”
“넋의 일부가 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외다. 허나 그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소.”
방장스님이 안타까운 눈으로, 아주 가여운 중생을 보는 눈으로 홍령을 바라보았다.
“그리 긴 시일이 허락되지는 않을 터요. 이번에 곁을 떠나게 되면, 그 혼이 다시 시주의 곁에 머물 수는 없을 거외다.”
사술이, 화령을 불러서 얘기를 듣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겨우 되찾은 홍령이 또 떠나게 될 것이다.
다시는 만나지도, 대화를 나누지도 못할 곳으로.
영원히.
“조각난 혼이 활동하는 시간만큼 빛바랜 혼의 빛이 더 바래게 되겠지.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진 않아도 분명 영향을 미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