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세상에 밝은 빛이 있다면 그림자가 있기 마련.
금태양이라는 한 젊은이가 중원에 이름을 떨치고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한다면, 또 다른 누군가는 그 그림자에 가려져 자신의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한 인연은 참으로 신비한 속성을 지녀서, 전생에 그러했던 것과는 또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니.
하고자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불운의 청년, 그 이름은 모용을이라.
“저 녀석이 왜 자꾸 남궁 소저랑…….”
모용을이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아직도 탄내가 남아 있는 공터에, 낡은 좌판엔 거지나 다름없는 서민들이 득시글거리는데, 거기서 산 두유가 뭐가 그리 맛있는지 금태양과 남궁은하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두유를 마시면서 도란도란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여자라고 생각했다.
모용을은 남궁은하에게 한눈에 반했다. 아름다움, 강함. 그런 것도 있었지만 사실 그 두 가지를 갖춘 여인은 무림에 그리 적지 않았다.
제갈세가의 제갈다영도 지모와 미모를 갖췄고, 태양의원의 금리도 상재와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아미파의 양진, 양원처럼, 비구니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더 두드러지는 순수한 미모가 강점인 이들도 있다.
그 이외에도 각 문파와 세가의 여걸들은 자신들의 미모와 실력을 만천하에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남궁세가다.
아비로부터 귀에 인이 박힐 정도로 들은 그 이름. 모용을은 모용세가라는 이름보다 남궁세가라는 이름을 더 많이 듣고 자랐다.
모용세가가 꺾어야 할 마지막 산, 영원한 벽, 남궁세가.
그런 남궁세가의 여인이라니, 이보다 더 매력적일 수 있겠는가?
마침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던 모용갑도 사라졌다. 이제는 자신이 모용세가의 장자요 후계자였다. 소가주라는 격도 맞으니 자신이야말로 남궁은하에게 적합한 상대였다.
그런데 왜 남궁은하의 옆에 자신이 아니라 금태양, 저 녀석이 서 있느냔 말이다.
“전생에도 현생에도 급도 안 되는 게 감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얼굴은 가면으로 가려 그 아래의 낯이 어떨지 알 수조차 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곤 고작 사람 고치는 것과 돈을 버는 재주가 전부다.
무공 실력이 썩 나쁘지 않다곤 하지만 그래 봤자 의원 아닌가?
자신처럼 오대세가의 일원인 것과는 시작부터가 다른 거다.
마치 그들이 전생에 그랬던 것처럼.
재벌가의 일원이었던 자신과 김진 녀석의 친구였던 놈. 그래 봤자 대단한 신분은 아니었을 거고, 고작해야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을 나와 회사 이름을 제 이름인 것처럼 내밀고 거들먹거리던 월급쟁이였을 텐데.
우득-
저 멀리, 금태양과 남궁은하가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하자 모용을이 이를 빠득 갈았다.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박탈감과 그것을 가진 자, 자격도 안 되는 자에 대한 분노가, 한때 금태양에게 고독으로 제압당했던 때 속에 쌓였던 억하심정과 뒤섞여 모용을의 심기를 마구 헤집었다.
그럴 때마다 모용을은 품속에서 작고 붉은 돌을 꺼내 삼켰다. 제 형인 모용갑이 이것을 과용해 폭주했지만 자신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 돌이 주는 강력한 힘은 불안 속에서 자신의 힘을 믿게 하고 안도감을 주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자신의 공력으로 차곡차곡 쌓다 보면, 금태양 저놈과는 비교도 안 될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때, 저놈의 사지를 찢고 저년을 범하리라.
그의 마음 속 밑바닥의 생각이 모용을의 눈빛으로 드러났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몸을 돌렸다. 지금 자신이 나서봤자 어떻게 해도 남궁은하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걸, 모용을은 잘 알았다.
“도련님. 본가로부터 전갈입니다.”
때마침 모용세가로부터 연락이 도착했다. 정확히는 모용가주의 연락, 그의 명령이다.
“무림맹으로 가라시는군.”
“화산지회의 개최를 반대하는 겁니까? 가주님께서 일월용봉전에 나설 수 없으면 그게 맞지요.”
“아니, 개최를 찬성하라고 하시는군. 대신 몇 가지 지시사항이 있다.”
“예?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남궁가주가 또 천하제일인으로서 나서게 될 텐데―.”
“아버지께서 생각이 있으시겠지. 가자.”
모용을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급하게 달려와 짐도 단출했으니 떠나는 데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그의 분노 어린 적개심만이 그가 가지고 돌아가는 유일한 것이었다.
* * *
“시주, 오셨습니다.”
소림승이 내게 달려와 다급하게 그 말을 뱉었을 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얼어붙었다. 그저 보고 싶었다고 말하면 된다는 다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갑시다, 금 의원. 어디로 가면 되는가?”
그때 남궁은하가 내 손을 덥썩 잡고는 소림승이 안내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검을 익혀 단단함이 느껴지는 손의 감각에 나는 다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이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빼애애액―, 붉은 깃털을 가진 홍매가 울며 하늘을 비행했다.
좌수검을 따르는 정반합의 무인들이 소림승이 안내한 전각을 둘러싸고 지키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자 그들이 전부 나를 돌아보았는데, 하나같이 표정이 기묘했다.
못 볼 것을 본 것 같은 사람. 경악이 가시지 않은 사람. 심경이 복잡하지만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
좌수검은 저중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나는 일대를 더 둘러보려고 한다. 아미승들이 운영하는 암자가 있다 해 관심이 있었지.”
남궁은하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놓아주었다. 덕분에 나는 별 말 하지 않고 그녀를 보낼 수 있었다. 무심한 배려에 속으로 감사하며 나는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좌수검.”
“……왔는가.”
좌수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내가 처음 그의 팔을 치료했을 때 봤던 그런 얼굴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 것은 불가능한데. 이게 왜 이렇게 된 거지?
본인이 납득할 수 없는 어떤 현상을 마주한 자의 혼란. 더할 나위 없이 바라고 마지않던 기쁜 일임에도 기뻐할 수 없는 이의 흔들리는 눈동자.
그 눈은 등 돌려 누워 있던 한 여인에게 꽂혀 있었다.
내가 들어왔는데도 그 등은 돌려질 생각을 안 했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호흡만이 그녀가 죽은 것은 아니란 걸 알려주었다.
“어디가 아픈 겁니까?”
“……그건 아닐 거다.”
좌수검이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맥을 짚었다. 손목에 힘이 없어 심장이 철렁했지만, 잠든 사람의 힘없음이지 아프거나 죽은 시체의 그것은 아니었다.
내게 맥 짚는 법을 가르쳐 준 그 사람의 맥을 짚어보는 기분도 기묘했다. 크게 이상은 없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붕 떠 있는 느낌의 맥이었다. 어디가 아프다기보단 잠이 든 것도 같긴 한데.
“처음 발견했을 때 이미 쓰러져 있었다.”
나는 낯빛도 살피고, 호흡의 간격도 살폈다. 얼굴은 그 전날 내가 비동에서 만났던 그 얼굴, 홍령의 얼굴이 맞았다.
그때, 고요히 감겨있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아.”
“정신이 드십니까?”
“……드십니까?”
“어, 머리를 다치셨나? 왜 내 말을 따라 하지?”
“다치셨나? 따라 하지?”
“괜찮으세요? 이름, 이름을 말해보세요.”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충격이 컸는지 홍령은 계속 내 말꼬리를 잡았다. 이름을 말해보라는 내 말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름이요? 아니, 당신 내 이름을 몰라요?”
이내 어처구니 없다는 듯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홍령이잖아요, 홍! 령! 내가 그동안 내 이름을 말 안 해준 것도 아니고, 그거 좀 못 봤다고 내 이름을 몰라요? 얼굴도 그때랑 똑같은데, 못 알아볼 이유가 뭐가 있다고!”
“호, 홍령?!”
“그래요, 나예요! 이제 좀 알겠어요? 어? 오랜만에 본다고, 드십니까? 다치셨나? 왜 이렇게 서운하게 말해요? 이제야 좀 마음도 안심되고 긴장도 풀리는데 괜히, 어? 어!”
“우, 울지 말고!”
홍령은 갑자기 두 눈에서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해서 소매로 눈가를 닦아주다가, 아차 하고 뒤로 물러나 좌수검을 보았다.
내가 아무리 그녀의 아들(?)이긴 하지만 이런 건 좌수검이 해야지.
그런데 좌수검은 그런 우리를 팔짱 끼고 바라만 볼 뿐이었다.
“좌수검?”
“왜 부르지.”
“아니, 그게, 그러니까…….”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라.”
아니, 뭘 계속하는데요?! 당신이 그러니까 되게 이상하게 들리잖아!
“근데,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대체 좌수검이 왜 여기 와 있어요? 저 사람이 날 찾으러 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너무 놀랐는데 기운은 없어서 죽은 척하다가 깜빡 잠들었지 뭐예요. 대체 내가 없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 저기 홍령.”
“게다가 좌수검하고 같이 있던 그 무인들은 뭔데요? 그 사람들, 화산의 검을 쓰던데? 혹시 그 무공들을 전수해서 벌써 그만한 무인들을 키워낸 거예요? 말도 안 돼!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 리가 없는데?!”
“일단, 그렇게 말하면 좌수검도 다 듣잖아. 이제 나한테만 들리는 게 아니라고.”
침착하자.
나와 떨어져 있을 때의 일을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도 좌수검을 못 알아 본다라.
과거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 건가.
“좌수검, 나중에 설명해드릴게요.”
괜히 좌수검을 보냈다. 나는 홍령이 예전의 기억을 계속 되찾고 있었으니까, 좌수검을 만나면 생전의 기억이 다 떠오를 줄 알았다. 그래서 감동적인 재회가 이뤄질 줄 알았는데.
정작 좌수검은 죽은 줄 알았던 아내를 다시 만났는데 그 아내가 자길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니.
“밀린 이야기가 많은 거 같은데. 나는 나가 있겠다.”
좌수검도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는데, 홍령이 그의 바짓자락을 덥썩 붙잡았다.
“?!”
“가지 마, 휘소. 도와줘. 화령에게 큰일이 생겼단 말이야.”
“화령? 그게 누구야?”
“……홍령의 사매다. 그 또한 섬서사변 때 죽었을 텐데.”
“아니야, 살아 있어. 나랑 같이 있었어. 그런데 나를 살리려고…….”
순간 머릿속으로 한 가지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내가 심상 속 화산에서 홍령의 검을 받았을 때, 그 옆에는 화령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또 한 자루의 검이 있었다.
그곳에 있는 검들은 저승으로 오지 못하고 이승에 남아 있는 이들이라고 해서, 홍령처럼 또 누군가가 구천을 떠도는 넋이 되었나 했는데.
살아 있었고, 홍령과 같이 있었다면.
“설마 혈교의 령주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화령이 혈교에 들어갔을 리가 없다.”
“아냐, 맞아. 나를, 날 살리려고, 허억, 헉―.”
“홍령!”
나는 급히 무너지는 그녀의 몸을 받아들었다. 좌수검도 몸을 낮춰 그녀를 받아 자리에 눕혔다. 흥분으로 인한 과호흡 증상이었다. 몇몇 경혈에 빠르게 침을 놓자 그녀의 호흡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일단 좀 쉬고, 그 다음에 얘기하자. 이제 여기 같이 있으니까.”
“그래요, 나 좀 더 자고…… 다시 얘기…… 쿠울…….”
홍령은 내가 들어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물어볼 말이 많은 것 같은 한 남자와 함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