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좌수검!”
깃털과 서찰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좌수검을 찾았다.
다행히 그는 다시 떠나지 않고 태양의원 내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에게 달려가 다짜고짜 홍매의 깃털을 쥐여 주었다.
“이것이 발견된 곳으로 바로 달려가 주세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진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나는 찾아야 하는 인물에 대한 간략한 정보만 말했다. 이십 대 중후반의 젊은 여자, 무림인, 그리고―
“이름은 어떻게 되지.”
“……모릅니다. 자세한 설명은 그 사람을 찾으면 하겠습니다.”
“알았다. 곧 출발하지.”
“정반합의 무인들도 데리고 가세요. 도움이 될 겁니다.”
좌수검을 따르는 이들은 과거 화산과 종남의 제자들. 그중 화산의 제자들이라면 뭐라도 더 실마리를 잡아낼지 모른다.
자세한 설명을 한 것도 아닌데 좌수검은 서찰과 깃털을 받아들고 바로 자리를 떴다. 그는 홍매가 간 방향으로 향할 거다. 소림이 그곳으로 사람을 보내 탐색할 거라 했으니, 나는 소림으로 가 그들이 추가적으로 찾은 정보를 확인할 예정이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건가요?”
곧바로 소림으로 출발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데, 청화가 내 옷깃을 잡았다. 좌수검은 그녀의 검을 지도하던 중이었다. 친선전에서 괄목 할 만한 성장을 보였지만 그걸로는 부족했으니까.
청화가 좌수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름 그 기회를 만들어줬던 나로서는 그녀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좌수검은 곧 홍령을 만나게 될 테니까.
물론 그것은 진짜 홍령이 아니지만, 홍령의 모습을 한 육신에 홍령의 영혼이 들어있다면 그걸 홍령으로 봐도 무리는 아니다.
그들이 어떻게 될지는 나도 알 수 없다.
“미안합니다. 나중에 설명할게요.”
나는 그렇게 청화의 손을 떼어냈다.
의맹회의의 뒤처리에 화산지회 개최와 무림맹 회의에 영향을 끼쳐야 하는 일 등을 두고 갑작스레 떠나야 하는 상황. 다행히 금리는 이번에도 내 상황을 이해해주었다.
“어차피 화산지회에서 소림의 대표로 나서시니 한 번은 들러야 할 겁니다. 이참에 가서 논의를 마치고 오십시오.”
뒤의 일을 맡아줄 사람도 있겠다, 그대로 출발하면 될 줄 알았는데―
“함께 가고 싶다.”
“나도 같이 가겠어.”
의외의 혹이 따라붙었다.
신생이나 창천도 아니고, 먼저 사천당가로 돌아간 당당은 당연히 아니었다.
내가 어딜 갈 때면 찰싹 달라붙던 금동이는 신생, 그리고 걸왕과 함께 좌수검 편에 붙여 보냈다. 홍매를 추적하는 데는 힘을 못 썼지만 사람을 추적하는 일이라면 뭐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남궁 소가주, 그리고 모용을 너, 내가 어딜 가는지 알고?”
의외의 혹은 남궁은하와 모용을이었다.
더 어이없는 건, 두 사람 다 내가 어딜 가려고 하는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어디든 상관없다. 기왕 가문의 대문을 나섰으니 보다 많은 경험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따라 나설 뿐.”
“창천을 지도하는 건 어쩌고요? 남궁가주가 제 제안을 수락해서 소가주가 두 가지 비전무공을 지도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구결을 전수하는 일은 이미 마쳤다. 큰 방향을 제시하니 알아서 달려가더군. 오히려 내가 곁에 있는 것이 거추장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중간 중간 한 번씩 방향을 다시 짚어주긴 해야겠지. 그 사이 시간이 비니 상관없다.”
“모용을, 너는? 무림맹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나?”
모용을은 무림맹 일대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둔 상태였다. 말하자면 모용세가 본가의 별장 같은 느낌으로. 모용약당이라는 현판을 걸었다는데, 모용세가가 대뜸 무림에 진출할 수 없으니 약당이라는 형태로 우회를 한 거다.
현판을 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책임자인 녀석이 계속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건지.
“크흠, 남궁 소저께서 첫 강호행을 하시는 거나 다름없으니 여러모로 곤란한 점이 많으실 거 같아서 같이 가려는 거야. 너도 나름 볼일이 있을 테니까, 남궁 소저의 안내는 내게 맡겨놔.”
골치 아프네.
며칠 전이었다면 이 미묘한 상황을 나름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남궁은하는 내게 호의적이었고, 그 시선 속에 나를 남자로 보는 눈이 없잖아 섞여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런 그녀가 싫지 않았다.
어차피 남궁세가와는 계속 인연을 이어나가야 하는 상황.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점점 사이가 발전하겠지 싶었는데……
남궁은하와 그런 사이가 되고자 하는 게 나뿐이 아니었다.
모용을 이 녀석.
남궁은하에게 한눈에 반하기라도 한 건지 계속해서 남궁은하를 졸졸 따라다녔다. 남궁은하가 그에게 관심이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에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면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이 악연과의 사이에서 줄다리기라도 해보겠으나―
“목적지는 소림. 최대한 빠르게 갈 겁니다. 밥도 안 먹을 거고, 물도 안 마실 거고, 잠도 안 자고, 볼일도 안 볼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면 따라오시든가요.”
“나는 괜찮다.”
“소림으로 가는 길은 풍광이 수려하다 합니다. 가다가 좋은 곳을 만나면 태양이는 먼저 보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모용을은 전날 우리가 잠시 친했던 그때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나는 그 팔을 잡아 내리며 표정을 굳혔다.
“그러면 바로 출발합시다.”
* * *
“오셨습니까, 시주. 이리 빨리 도착하시다니. 낯이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요. 어찌 됐습니까?”
나는 정말 말한 그대로 달렸다. 생존에 필요한 그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소림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긴 하지만 사실 이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질 정도로 공력이 약하진 않다. 그럼에도 낯빛이 나빠 보인다는 건, 그만큼 이 일이 마음을 흐트러트리고 있다는 거겠지.
“안 그래도 방금 전 좌수검께 연락이 왔습니다. 그분을 찾으셨다고.”
“……그걸로 끝입니까.”
“자세한 것은 돌아가 묻겠다, 그리 적혀 있었습니다. 여기.”
내가 소림으로 향할 거라 했기에 좌수검 또한 소림으로 올 것이다.
태양의원도 나쁘지 않지만 그곳은 지금 중원 전역의 관심이 쏠려 있는 곳.
그곳에 여러 비밀을 가진 존재를 두는 것은 적합하지 않았다.
서찰 속 좌수검의 필체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평소의 힘 있고 간결한 필체와는 달랐다.
영원히 가슴에 묻어야 했던 아내를 다시 보게 된 그의 혼란이 그 글씨에 다 묻어나오는 거 같았다.
“오실 때까지 좀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걱정이 됩니다.”
“……일대를 좀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승려의 권유에 나는 발을 떼었다. 그의 제안은 어디 들어가서 잠도 자고 밥도 먹고 휴식을 취하란 뜻이었지만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홍령이 돌아온다.
항상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형태는 아니지만, 많은 비밀을 알게 된 지금, 처음 시작을 함께했던 그녀가 돌아온다는 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
그녀를 보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그 이름을 불러야 할지, 아니면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는 어머니라는 말로 그녀를 불러야 할지.
지금까지 살면서 겪어본 적 없는 혼란이 나를 휘감았을 때.
“금 의원. 괜찮은가.”
단단한 손이 내 팔을 붙들었다. 남궁은하였다.
“소가주, 아, 여긴―”
“원래 반야원이라는, 소림에서 운영하는 의원이었다 들었다.”
넋을 놓고 정처 없이 걷다가 어느새 여기까지 왔나 보다.
“모용을 녀석은 어쩌고 혼자?”
“모용 공자는 차를 마실 만한 다원을 찾겠다고 갔다.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이 지금은 의원이 된 모양이더군.”
맞다. 제갈세가가 운영하던 융중다원은 지금 태양의원이 임차해 쓰고 있다. 그 일은 녀석이 무림맹으로 압송되어 간 이후에 일어났으니, 업종이 바뀐 줄도 모르고 남궁은하를 데려갔던 모양이지.
“낯이 좋지 않은데. 무슨 일 있는가? 아, 아니지. 이런 건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되는 건데 내가 경솔했다.”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아니, 얘기를 좀 들어주겠습니까?”
“그래도 괜찮은가? 극비인 일 때문에 급히 달려온 것 같았는데.”
물론 디테일을 다 얘기할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의 일 때문도 그렇지만, 아직 좌수검한테도 안 한 얘기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궁은하에게 선뜻 얘기하겠는가.
뭘 모르는 사람한테 말하는 게 더 편하단 말도 있긴 하지만, 그것도 믿을 만한 얘길 해야지. 귀신에 대한 얘기를 그렇게 편히 털어놓을 수는 없다.
“그냥 좀, 대면하기 쉽지 않은 상대를 만나야 해서. 긴장되고 낯선 기분이 드네요.”
“보통 쉽지 않은 상대인가 보군. 간담이 큰 금 의원이 그렇게까지 말 할 정도라니.”
“제가 간담이 커 보입니까?”
“이 불에 탄 터만 봐도 그렇다만. 아무리 이곳의 의원들이 재물을 착복했다 한들, 이미 한 번 화재로 곤경을 겪은 소림에게 또 불을 내겠다 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간이 크지 않으면 누가 간이 크겠나?”
“하하. 그건 그렇네요. 뭐, 정확히는 그들의 비리 때문이 아니라 이곳 건물에 있던 질병의 원인들 때문이었지만.”
“웃었군.”
“예?”
“그대는 그리 여유로운 표정인 것이 보기 좋다. 사내라면 응당 세상을 발아래 둔 것 같은 여유로움과 패기가 넘쳐야지. 허나 그리 불안해하는 것도 나쁘진 않구나.”
……뭐지.
뭔가 반대가 된 거 같은데.
하지만 불안한 마음이 사실이기 때문일까, 그런 남궁은하의 배려가 싫진 않았다.
덕분에 마음이 좀 편안해지기도 했고 말이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나 그대라면 잘 헤쳐 나갈 것이다. 나 또한 처음으로 세상 밖에 나와 이렇듯 잘 돌아다니고 있지 않나? 만에 하나 일을 그르친다 한들 어떠한가? 그르친 자리에서 나아가면 그만 아닌가. 저기 소림의 승려들이 이 불탄 터전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남궁은하가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소림승들이 좌판을 깔아놓고 뭘 팔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릇을 들고 와 사가는 것을 보아하니 음식이나 음료인가? 그러고 보니 뭔가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고. 줄지어 서 있는 걸 보니 제법 인기도 많은 모양인데.
“콩을 끓여 두부와 두유를 만들어 팔더군. 물어보니 제법 맛이 좋아 멀리서도 사러 오는 모양이다. 벌써 세간에는 소림방장의 두부가 보양에 좋다 하여 상인들이 없어 못 파는 물건이라 하더군. 허나 중생들도 이를 맛볼 수 있어야 한다고 적당한 가격에 이리 팔고 있다 한다. 두유 한 잔 들겠나? 내가 사지.”
설마, 전에 소림승 하나가 자기들 나름대로 자구책을 발견했다고 했던 게?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천년소림에서 두부를 만들어 팔다니. 그리고 그게 생각보다 되는 장사라니.
나는 고개를 돌려 소림의 성전이 있던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흉물스럽게 타버렸던 절터는 깔끔하게 정리되었고, 타고 남은 자리 위에 건물을 복원하는 공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소림이 타버렸을 때 저들이 직면해야 했던 막연함과 암담함.
평생 한 번도 세가 밖으로 나가본 적 없던 남궁은하가 맞닥뜨린 불안감과 긴장.
그 감정들이 지금 나의 감정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거다.
“여기, 아직 따뜻하다.”
남궁은하가 잔에 담긴 두유를 건네주었다. 그 온기가 손에 닿자 혼란으로 가득하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맛있군요.”
“도움이 된 것 같아 다행이군.”
남궁은하가 별빛처럼 웃어 보였다.
홍령을 만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는데, 생각해보면 내가 할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다신 못 보는 줄 알았다. 보고 싶었다.
그 말이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