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317화 (317/350)

317화

……미래라.

뜬금없는 선문답 같았지만 나는 금건양이 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들었다.

“구 금가장을 주신다는 건, 섬서사변에서 아버지가 한 일을 책임지시겠다는 말일 거고. 미래란 금가장의 사람들, 그러니까 다른 형님, 누님들과, 오래도록 금가장에 자부심을 가지며 일 해온 사람들, 그리고 리를 비롯한 조카들을 말하는 거겠군요.”

“그래. 맞다.”

“왜 생각이 바뀐 겁니까?”

나도 잔에 술을 채웠다.

금건양과 이런 대화를 나눌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그는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던 유일한 형제다.

내가 아버지의 친자가 아니라는 걸, 아버지가 가담한 섬서사변 생존자의 아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아버지가 금가장의 재산을 내 병을 고치는 데 쓰는 걸 탐탁잖아 했다.

또한, 금리에게는 내가 금가장을 망칠 거라는 말을 반복하며 말했다.

내가 언젠가 그 비밀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낼 거라는 사실을, 그는 예견하고 있었다.

“……아니, 생각이 바뀐 게 아니라,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겁니까?”

생각해보면 몇 가지 탐탁잖은 부분들이 있었다.

무한에서의 일.

나는 조카 금리를 이용해 사당에 화재를 일으키고, 아버지의 위패를 빼돌렸다.

그 위패를 손에 넣어야 하는 이유가 있기도 했지만 금건양에 대한 반발심이 아주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그는 내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감금했으니까.

그 수법은 그리 교묘한 게 아니었다. 조금만 머리를 쓴다면 얼마든지 그 범인이 나와 금리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몇 번 금가장의 심복들이 태양의원에 얼씬거리며 사당에 있는 아버지의 위패를 확인하고 간 게 고작.

금건양은 그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금리를 내친 것부터 형님이나 누님들이 나와 거래를 하는 것, 금가장의 일부가 이곳 북촌으로 옮겨온 것, 아버지의 위패까지 전부. 계획적이었습니까?”

사실 모든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면?

특히 금리를 내친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는데 그 때문이라면 오히려 말이 된다.

아버지로서, 금리에게 과거의 죄를 유산으로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면.

“전부는 아니다. 끝의 끝까지 그런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하지만 태양의원이 커가는 걸 직접적으로 방해하지도 않으셨죠. 제 세력이 커지면 언젠가 그 일이 불거질 거라고 생각했으면서도.”

“……튀어나오지 않는 송곳이란 없다. 너도 살다 보면 알게 될 거다.”

“그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으나, 오게 될 거라는 걸 예견하고 있었던 거군요.”

나 참. 말이 거래지, 이미 납품확인서까지 다 끝난 일이잖아?

솔직히 남의 판에 이용당한 거나 다름없으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딱히 트집을 잡거나 판을 뒤엎을 생각이 들지 않는 건, 그가 이 거래를 통해 지키고자 하는 것을 나 또한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돌아가면 금왕표국과 금왕전장을 비롯한 나머지 사업체에 터무니없는 조건의 계약을 제시할 거다.”

“더 이상 금왕상단과 손을 잡는 것이 전혀 득이 안 되는 수준이겠죠?”

“그걸 넘어서, 무한을 떠나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릴 정도로.”

“금왕전장으로 치면 예치해놓은 돈을 다 빼는 방식이겠군요. 굳이 거기에 본점을 둔 이유는 금왕상단 때문이니까, 자금력을 보충해 줄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본점을 옮길 수도 있겠어요.”

“아버지 금왕에 대한 소문은 철저히 막을 거다. 돈을 뿌려서 헛소문이라고 주장하게 하고, 금가장의 재산을 노린 무림맹의 음모라고 떠들게 할 거다.”

“돈을 뿌려 막는 걸 보니 그 소문이 진짜긴 진짠가 봐, 라는 뒷말이 더 크게 돌 정도로만 말이죠.”

“형제자매를 박해하고, 터무니없는 사업에 돈을 쓰며, 충언을 하는 가신들을 내쫓아, 금가장의 새 주인이 미쳤다는 말을 덧붙이게 되겠지.”

“그런 전개면 여자도 껴야 하지 않아요?”

“리에게 그런 오명까지 안겨줄 수는 없다.”

이상한 데서 단호하기는. 뭐,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만.

“네 행보를 방해하려고 드는 자들이 있을 거다. 나는 그자들을 찾아 손을 잡고 자금을 지원할 거다. 유달리 의미 있는 정보가 있다면 넘기마.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내가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몰락하는 과정에서, 너희들은 한 오라기 연결된 끈도 없어야 할 테니까.”

그는 단호했다.

차라리 과거의 불명예를 밝히고 정면으로 돌파해 가자라는 말은 꺼낼 여지도 없었다.

내가 그러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금건양은 그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그리고 끝내 추잡하게 사라지겠지.

“용건은 이걸로 끝이다. 이만 가보마.”

“형님.”

“할 말이 남았더냐?”

“……그냥,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해라. 다신 이렇듯 마주 보고 얘기할 일 따윈 없을 테니.”

죽으러 가는 사람은 덤덤했지만 나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주먹만 몇 번 쥐었다 폈다.

내가 생각해도 다소 구차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묻지 않으면 후회할 거다.

그랬기에, 나는 입을 열었다.

“제가 큰형님에게 한 번이라도 진짜 동생이었던 적 있습니까?”

내게 그는 엄한 아버지와 같았다.

한없이 내게 자애로웠던 아버지 금왕과 달리 언제나 엄격한 눈으로 나를 대했던 그.

한 번도 그리 생각한 적 없다,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그렇다면 자신이 전부 짊어지고 사지로 갈 길을 준비한 저 사람을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걸까.

“네가 잘린 팔다리도 다 붙이는 신의라지. 남의 팔다리를 붙이면 깨물어도 아프지 않은 것이더냐. 그 모양이 검거나 붉어 밉다 해도 제 손발이 아닐 수는 없을 터.”

“……!”

“이제 정말 가보겠다.”

“형님, 전―.”

내가 미처 붙잡기도 전에 금건양은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따라잡으려면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미처 그러지 못했다.

이제 우리가 이런 식으로 만날 일은 다신 없을 것이다.

* * *

의맹회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의맹회의 본회의에서 원하는 바를 이끌어낸 부분이나 사람들이 넘치게 몰려온 것, 의원들의 연구회 발표가 큰 화제를 모은 것 등 우리가 계획한 바대로 잘 마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가 의맹회의 성공만을 위해 가열 차게 달렸으니까.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의맹회의가 끝난 후, 나도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첫 번째로는, 일시적으로 북촌을 방문했던 이들이 떠나지 않고 그대로 북촌에 눌러앉아 버리는 일이 속출했다는 거다.

“그들 중 대부분이 의원으로, 임시 치료소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이들이 많습니다. 의학생이 되기엔 나이가 있거나, 태양의원 가맹이 되기엔 여러 가지 면에서 조건이 맞지 않는 이들입니다.”

“조건이 안 맞는다면, 어떤?”

“기존 태양의원 가맹이나 직영의 영업 구역과 겹치는 경우가 다수이고, 저희가 가맹을 내주기에는 일대의 사람이 너무 적은 곳도 있습니다.”

가맹을 운영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도 적지 않지만 그 기준은 꽤 까다롭게 잡고 있다. 가맹 의원의 실력은 물론, 충분한 수익성이 나도록 여러 조건을 조율해야 했다.

결국 가맹을 한다는 건 돈 때문이 아닌가? 물론 우리의 경우, 돈이 아니라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가맹점을 많이 내줄수록 우리는 기본으로 받는 돈이 있어 양적 성장엔 도움이 되지만, 환자의 숫자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가맹 의원들은 수익성이 악화되기 마련이다.

그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기에 처음부터 기준을 빡세게 잡고 운영했는데, 그 때문에 후발주자로 나서지도 못한 이들이 북촌에 왔다가 아예 떠나질 않고 있는 것이다.

그냥 안 간다면 그건 별로 문제랄 것도 없지만, 그들이 의원을 차렸다면 조금 얘기가 달라진다. 건물을 사서 차린 경우도 있지만 아예 노점처럼 좌판을 깔아놓고 침을 놓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북촌에는 항상 환자가 넘쳐났지만, 의맹회의 이후엔 대기가 길어져 예약 후 며칠이 지나야 진료를 볼 수 있을 정도가 된 수준이라 그쪽으로 빠지는 환자도 제법 되는 모양이었다.

“실력이 아주 나쁘진 않은지, 이용한 환자들은 만족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냥 두면 화근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까지 실력이 좋으면 우리가 아예 영입하려고 했을 텐데? 그 정도는 아닌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신 가격이 저렴합니다.”

“우리도 비싸지 않은데 더 싸다고?”

확실히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생각을 달리했다. 슬슬 태양의원의 기조를 한 번 바꿀 때가 됐다. 오히려 지금 상황을 이용하면 큰 반발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이 참에 가격을 올린다.”

“예? 그러면 저희의 경쟁력이―.”

“그렇게까지 비싸게 받자는 건 아냐. 합리적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무리해야 할 수준. 거기까지만 올리자고.”

어차피 우리의 역량으로 몰려드는 환자를 다 받아들이는 건 무리다. 규모를 확장해도 되지만 이 이상의 확장은 오히려 손해만 생긴다.

“굳이 독점할 필요 없잖아. 이렇게 환자가 많은데. 오히려 그들을 잘 키워서 의료도시로 성장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걸?”

게다가 나는 이곳에 땅이 많았다. 지금은 농사를 짓거나 삼생초를 키우지만, 몇몇 곳은 땅을 메워 건물을 올리고 있었다. 그만큼 사람들이 계속 몰려오는 상황이었다. 그걸 팔거나 임대를 주는 쪽이 돈을 벌기엔 훨씬 수월하다.

“작은 건 나눠주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예를 들자면 불치병 연구나 새로운 치료법 개발 같은 거.”

“이를 연구회에 공유하면서 기술 교육으로 수익을 꾀할 수도 있겠군요.”

“맞아. 다른 의원들도 치료는 할 수 있겠지만, 의학당은 우리밖에 없으니까.”

결국 모두를 키우는 것이 우리가 잘되는 길이다. 높은 탑은 언젠가 무너지지만 주변이 두터운 산봉우리는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또 문파가 생겼습니다.”

“벌써 몇 개째지? 열일곱 갠가?”

“무관과 일인전승 문파들을 포함하면 오십 개가 넘습니다.”

두 번째 예상치 못한 일은 바로 이거다.

큰 문파는 아니지만, 나름 문파라는 걸 갖출 만한 규모의 장원들이 북촌 일대로 대거 터를 옮긴 거다.

“청화문주가 큰일을 했네.”

이 일이 벌어진 원인(?)은 바로 청화였다.

과거 무당의 속가였지만 이를 그만두고 태양의원의 일을 맡았던 청화는 내게 화산의 무공을 전수받아 이를 성공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의맹회의 친선전에서 선보였다.

청화의 성장에 가장 놀란 것은 그녀를 알고 있던 주변의 중소문파들이었다.

그들은 곧 청화가 어떻게 그런 실력을 손에 넣었는지 파고들기 시작했고, 그녀가 지속적으로 태양의원에서 내단을 공급받았으며, 어디서 얻었는지 모를 비급을 익혔다는 사실을 접수했다.

‘태양의원을 잡으면 열 계단 더 성장할 기회를 잡는다!’

그런 소문이 호북 일대에 돌기가 무섭게 몇몇 문파와 무관들이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그중에는 제법 쓸 만한 실력과 인품을 가진 이들이 있어 나도 주시하고 있었다.

화산의 생존자들이 언젠가 화산을 다시 재건할 수도 있겠지만 규모를 키우기 전까지는 곁가지에 해당하는 무공들까지 손댈 수는 없을 터.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쉽게 실전이 된다.

청화에게 그랬던 것처럼, 핵심에 속하는 무공 외에는 이들에게 주어 그 명맥이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이 오히려 맞을 거다.

……뭐, 그건 내 생각이고.

이에 관해서 홍령이 확실히 답을 준다면 마음이 편할 텐데 말이지.

“아, 그리고 소림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화산지회 때문에?”

“예, 그것도 그렇고, 이걸 발견했다고. 삼촌께 드리면 아실 거라고 하더군요.”

금리의 손에 들린 그것을 본 순간 나는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건 붉은 매의 깃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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