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보기보다 잔인한 남자군. 이미 한 번 실험대상이 되었던 자에게 똑같은 일을 시키려 하다니.”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겠지만, 이번엔 좀 다르죠. 시키는 게 아니에요. 창천이 선택하는 거지.”
나는 거북한 표정을 한 녀석을 돌아보았다.
지금의 제안이 싫거나 한 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당황한 거다.
“남궁세가가 그렇게 하기를 원해도, 창천이 거절하면 이 얘기는 없던 게 될 겁니다. 그러면 남궁세가는 좀 더 긴 시간을 돌아가야겠죠.”
이러나저러나 내게는 이득이다.
창천이 남궁세가의 두 비전을 전수받아 강해지면 그 자체로 태양의원의 명성과 이어진다. 거기에 녀석이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신체의 조절을 우리가 도울 테니, 그 과정에서 의학적 성장을 거둘 수도 있다.
녀석이 거절하면?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니, 리스크를 지지 않는 것도 이득이라면 이득이지.
“자, 이제 결정은 네 몫이야. 성공한다면 네가 원하는 강함을 가지겠지만, 그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 운이 나쁘다면 또다시 그런 일을 겪어야 할지도 모르고. 어떻게 할래?”
“……시간을 줘.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며칠이면 충분해.”
“그래. 그렇게 해.”
창천은 그렇게 말하곤 바로 방을 나갔다.
제 삶에 있어서 중대한 선택이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고민하는 게 좋다.
뭐, 거기에 녀석으로서는 이런 일이 처음일 테니까.
한 번도 스스로 원하는 대로 선택하지 못하고 남의 결정에만 끌려다녔던 삶이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나 또한 녀석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했으니까.
그런 녀석에게 처음으로 선택지가 주어진 거다. 살면서 처음 선물이란 걸 받아본 어린아이 같은 심정일 거다.
당당에게 기회를 주었던 것처럼, 녀석도 내 친구니까, 이런 기회를 한 번쯤 주고 싶었다.
고마운 줄은 알려나 모르겠네.
“……하하하. 하하하하!”
창천이 나간 후, 남궁은하가 갑자기 소리 높여 웃었다.
“뭐가 그리 재밌으십니까?”
“지금 금 의원님은 언니가 재밌어서 웃는 걸로 들려요? 어이없고 황당해서 웃는 거잖아요. 나참,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내놓은 걸로도 모자라서, 그 결정은 남궁세가가 하는 게 아니라 창천 소협이 하는 거라니. 솔직히 언니가 검을 뽑아도 모자란 상황 아니에요?”
“아니, 다영, 나는 재밌어서 웃은 게 맞다.”
“에?”
“조부님이 그러셨지. 세가 밖으로 나가면 남궁세가의 이름과 검의 예리함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라고. 그 첫 번째 경험을 하게 되어서 매우 유쾌하구나.”
“언니!”
“어느 쪽이든 집안으로서는 크게 손해 볼 일이 아니니 조급할 필요도 없지. 창천 소협이 결정을 내리는 동안 이곳에 머물러야 할 거 같은데. 신세를 질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이미 두 분을 위한 거처를 준비해놨습니다.”
“아직 그리 피곤하지는 않다. 그보다 이곳을 좀 더 둘러보고 싶은데. 아까의 행사들이 아직 끝나진 않았겠지?”
남궁은하의 눈이 반짝였다. 하긴, 거의 평생을 세가 안에서만 살다 처음 나온 거라고 했으니 호기심이 생길 만도 하겠지.
“의원들의 연구회도 밤까지 진행될 거고, 모든 일정이 끝나면 불꽃을 터트릴 겁니다. 축제 분위기를 즐기시려면 지금이 제일 적당하죠.”
“그렇군. 그대가 안내해주겠나?”
제갈다영도 있는데 굳이 내가? 제갈다영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의학당으로 가볼래요. 그때 만난 의생 친구들이 얼마나 성장했나 보고 싶거든요. 금 의원님은 언니를 안내해주세요.”
뭐 안 될 건 없긴 한데.
“좋습니다, 가시죠.”
어차피 남궁세가와는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하니까. 두 세력이 친분을 다지는 데 거래보다 좋은 것은 사적인 관계다. 오래도록 준비해왔던 일이 끝난 터라 피로가 조금 몰려왔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태양의원과 북촌 일대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아니, 오히려 낮 시간 때보다 더 많은 거 같았다.
친선전이 끝난 비무대에는 색다른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과거 나와 장 의원이 그랬던 것처럼 의원들이 실력을 겨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획한 건 아닌데, 의원들이 모여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갔는지.
“흥미롭군. 의원들도 이리 실력을 겨루는 걸 견식하면 견문이 넓어질 것 같군.”
“어떤 분야든 적당한 경쟁은 전체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법이죠.”
“그대는 어떤 일이든 판을 넓게 보는 모양이야. 당장 눈앞의 일보다는 일이 돌아가는 기본 원리를 보는군. 한 세력을 이끌어가는 장에겐 필수나 다름없는 덕목이지.”
“별 말씀을. 아, 간식 드실래요? 이런 거 드셔본 적 없죠?”
괜히 머쓱해져서 남궁은하를 노점 쪽으로 이끌고 갔다.
축제 분위기에 음식이 빠져서 쓰나.
북촌으로 내려가는 길도 거의 야시장 분위기가 되어서 온갖 간식 노점들이 줄을 섰지만, 태양의원 원내에 들어온 노점들은 퀄리티가 달랐다. 오늘을 위해 무한의 일급 숙수들을 데려왔으니까.
나는 간식 노점에서 탕후루를 두 개 집어 들어 남궁은하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그녀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백학의 날갯짓처럼 깜빡였다.
“탕후루라는 간식입니다. 과일에 설탕옷을 입힌 길거리 간식인데―.”
“먹어본 적 있다. 이 정도는 세가 안에서 만들 수 있으니까.”
아차.
봉문이라고는 했지만 외부와 교류를 전혀 안 하는 건 아니다. 특히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에 관련된 건 당연히 오고가는 게 정상.
상대를 무슨 탑에 갇혀 있다 처음 바깥으로 나온 공주님처럼 생각해버리다니.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민망해지려는 찰나, 남궁은하가 내 손을 잡았다.
“그래도 생각해줘서 고맙다. 잘 먹겠다.”
아니, 손을 잡은 게 아니라 내가 들고 있던 탕후루를 받아갔다. 그 과정에서 손이 살짝 스친 거다. 잡은 게 아니라.
평생을 세가 안에서 검을 수련해온 여인의 손은 단단했지만 부드러웠다.
탕후루 꼬치를 쥔 손가락은 곧고 길었고 검을 쥐기 위해서인지 손톱은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손톱에는 은은한 분홍빛이 돌았다. 혈색이 좋다. 남궁은하의 뺨도 비슷한 색이었다.
의원은 그것만으로 꽤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조화로울 때 신체는 건강한 상태가 된다. 그 건강함이 뿜어내는 에너지란 게 있다. 아름다움도 그러한 에너지 중 하나다.
“맛있군. 물론 아는 맛이다만, 같은 맛인데도 불구하고 유달리 맛있게 느껴진다. 이곳의 분위기 때문인가?”
“……그럴지도 모르죠.”
혈색이 좋은 손, 곧고 바른 자세, 살짝 상기된 뺨과 깨끗한 눈동자, 흐트러짐 없는 이목구비까지.
이렇게 누군가의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본 건 창천 녀석 때 이후 처음인 거 같은데.
“그래, 이 모든 것이 그대가 일궈낸 거란 말이지.”
남궁은하가 탕후루의 붉은 열매를 한 알 오물거리며 중얼거렸다.
“사실 이번 일은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전령을 보냈어도 되는 거였지. 나는 소가주라는 내 자리의 무게를 안다. 그럼에도 부러 내가 이곳에 왔다. 이 일에 대해 알아볼수록…… 그대가 궁금했거든.”
“어떤 부분이 그렇게 궁금했습니까?”
“같은 상황이었지만, 그대는 뛰쳐나왔고 나는 그러지 않았으니까. 나는 더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조부님의 뜻을 거스르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꿈꾸지 않았다. 헌데 그대는 달랐지.”
“……난 오히려 소가주의 세상이 궁금한데요.”
“내 세상이? 흥미로울 부분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만.”
나는 피식 웃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 세상이 원하는 완벽한 적합성을 갖고 태어난 게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할 만한 사람을 모으면 이곳 태양의원에서 저 멀리 사천까지 줄을 세울 수 있을 텐데.
하긴, 그런 입장에서도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
“서로가 서로에게 궁금한 부분이 많은 거 같은데, 함께 술을 기울이며 얘기를 나눠보지 않겠나? 여기 태양의원에선 특별한 약주를 파는 거 같아 궁금하던 차다.”
계획한 일도 다 잘 풀렸고, 이제 남은 건 창천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뿐이니까. 술 한잔하는 것도 좋겠지.
거기에 이런 미인과 술 한잔이라니. 사심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상대도 나에게 호기심이 있는 거 같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
“오랜만이구나.”
그러나 살짝 솔깃하던 마음은 내 앞으로 걸어와 인사를 건넨 누군가로 인해 가볍게 접혔다.
“……오랜만입니다, 큰 형님.”
금가장, 이제는 구 금가장이라 불리는 내 옛집. 그곳의 현 주인인 금건양이 내 앞에 서 있었다.
* * *
남궁은하를 돌려보내고 나는 금건양과 마주 앉았다.
“술맛이 좋구나.”
“제약당에서 만든 약주입니다. 최근엔 금왕공방 장인들이 손을 대서 품질이 더 훌륭해졌어요. 돌아가실 때 하나 챙겨 가시죠.”
“아니, 그럴 필요 없다.”
“하긴, 거긴 이거보다 더 좋은 술이 많긴 하죠.”
아버지 금왕도 술을 즐겼지만 큰형님도 술에 조예가 깊었다. 중원 전역의 명주들을 수집하는 게 그의 취미였으니까. 그의 술 전용 창고는 근처에만 가도 술 냄새가 짙어서 나는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술 냄새에 쓰러질 정도로 약한 몸이었으니까.
그래서 금건양이 더 어려운 상대였을지도.
나이 차이도 있고, 엄격한 성격, 거기에 가업을 물려받을 만한 저력이 있는 사람.
하지만 이젠 그와 눈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다.
그가 왜 이 시기에 여기 왔고, 왜 나와 대화를 하길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의 일에 대해 사과를 하려는 건 아닐 거다.
그건 그의 성격에 맞지 않으니까.
금건양은 상인이니까 나와 거래를 하러 왔나 싶기도 했다.
나와의 앙금이야 어쨌든 좋은 물건을 보는 안목은 있는 사람이니까.
술을 미끼로 말을 던져봤는데 단칼에 자르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거 같고.
내가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동안 금건양은 술을 몇 잔이나 비웠다. 내가 따라준 것도 아니고 자작이었다. 나를 무시하려고 이러는 건 아닐 텐데. 오히려 뭔가 큰 결심을 내뱉으려고 술을 들이켜는 거 같은―
“거래를 하고 싶다.”
“아버지의 위패는 안 돌려드립니다.”
“그건 애초에 거래의 대상이 아니다.”
금건양이 똥이라도 씹은 듯 얼굴을 구겼다.
“딱히 거래할 만한 게 생각이 안 나서 한 말입니다. 제가 가진 것 중에 형님이 탐을 낼 만한 게 있던가요? 그런 게 있어도 제가 거래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잘 모르겠네요.”
무한에서 있었던 그와 내 마지막 만남을 생각하면 솔직히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거 자체가 신기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나도 더 이상 꿀릴 게 없기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가 거래를 원한다고 해도 내가 내키지 않으면 거절할 수 있는 힘, 그게 내게 있으니까.
“금가장, 아니지, 이제 여기서는 무한을 구 금가장이라 부른다던가?”
“네, 저희가 신 금가장이죠.”
“그래. 구 금가장을 주마.”
에?
“대신, 내게 미래를 약조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