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그날의 일은 어느 곳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누군가는 치욕스러워서, 또 누군가에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서.
무림의 판도를 뒤집었을지도 모르는 그 싸움은 문자로 기록되진 않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왔다.
처음 그 싸움은 모용세가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천하제일의 자리를 두고 결판을 짓고 싶다, 모용가주의 전언은 그랬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평범했다.
수십 년 동안 중원제일로 군림한 남궁가주.
그에게 도전한 이들은 수도 없이 많았고 모용가주 또한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다만, 천하제일의 자리를 빼앗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점이 조금 달랐을 뿐, 그자체로는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허나 그 뒤에 몇 가지 조건이 붙어 있었지.”
모용가주의 제안은 이랬다.
‘개개인의 우열을 다루는 걸 넘어서, 가문과 가문의 힘을 겨뤄보자.’
모용가주 개인이 남궁가주에게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모용세가와 남궁세가가 겨뤄보자는 것이었다.
각 가주를 포함한 다섯 명을 선발해, 일대일로 겨뤄 승패의 숫자로 따지는 게 아니라, 이기면 상대의 다음 주자를 재차 상대하는 방식.
어느 쪽이 우월한가를 가리기에 이보다 더한 방법은 없었다.
단 한 명에게 전부가 패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방법이니까.
처음부터 강한 사람을 내보낸다, 중간에 가장 강한 이를 둔다, 마지막에 강한 자가 포진한다 등 다양한 전략이 가능했지만, 천하제일을 가리자는 명목 하에 가장 강한 자, 그러니까 각 가문의 가주가 마지막 순번을 맡기로 하였다.
“그 외에도 독특한 조건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가문의 사람들 중에서도 대전 참가자와 기타 소수 외에는 이 사실을 알리지 말 것. 그 누구도 배석시키지 말 것. 그 결과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 것 등.”
“진짜 특이한 조건이네요. 자신이 없었던 걸까요? 모용세가가 이길 자신이 있었다면 사람을 있는 대로 불렀을 거고, 이길 자신이 없었다면 왜 그런 싸움을 하자고 했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나 또한 금 의원의 말에 동감한다.”
“애초에 남궁세가는 그 제안을 왜 승낙한 거지. 납득할 수 없군.”
“그것이 바로 일인자의 책임이라는 거다. 창천룡은 그만한 위치에 있지 않아서 잘 모르나 보군.”
“!”
“워워, 창천. 침착하고, 계속하시죠.”
“……가주께선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가주, 그러니까 내 조부님과 당시 소가주였던 아버지, 그 외에 세 명의 강자가 대전을 하러 세가를 떠났다.”
그렇게 말하는 남궁은하의 목소리는 어딘지 쓸쓸했다.
“그리고 그들 중 두 명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지.”
“생사결이었습니까?”
“천하제일을 다루는 자리가 가벼운 친선비무일 리는 없지 않은가. ……그때 내 아버지도 유명을 달리하셨지.”
전대 소가주의 죽음.
제 아비의 죽음을 얘기하는데도 남궁은하는 덤덤해 보였다. 금태양은 그녀에게 어쭙잖은 위로를 하는 대신 물었다.
“모용가는 어찌 됐습니까?”
“그들은 단 한 사람, 모용가주만을 제외하고 전부 죽었다.”
싸움은 일방적이었다고 한다.
남궁의 무인들은 모용을 밀어붙였다.
첫 주자로 나선 남궁의 검이 모용의 검을 세 번째까지 꺾었다.
네 번째 싸움에서 패했지만 다행히 치명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남궁은하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준 장본인이었다.
그는 물러나 상처를 치료하며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다음 주자로 나선 이가 네 번째 모용의 검을 꺾었고, 그는 모용가주를 앞에 두었다.
“……지금 좀 납득이 안 됩니다만. 물론 남궁세가의 저력이 대단하단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실력으로 따졌을 때 남궁세가에서 넷째 가는 이가 모용가의 이 인자부터 다섯째 실력까지 전부 꺾고 모용가주와 붙었다고요?”
“그렇다. 나도 처음에 들었을 때는 허풍인 줄 알았으나, 가주께서도 확인해주신 바이니 확실하다.”
그렇게 말하는 남궁은하의 표정이 당당하거나 자랑스러워 보이지 않았기에, 나머지 사람들은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가주는 두 번째 주자를 꺾었고, 세 번째 주자를 꺾었고, 네 번째 주자를 꺾었다. 세 사람을 꺾는 데 고작 오 초식이 다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허황되기 짝이 없군. 아무리 모용가주이고, 무림제이인이라 평해진다지만, 각 가문에서 손에 꼽히는 실력자를 오 초식 내에 꺾는 건 불가능하다.”
“한 사람 당 오 초식이 아니다. 셋을 상대하는 데 오 초식을 썼다는 거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만큼 강했다고 한다. 숙조부께선, 모용가주의 신위에 대한 말을 할 때면 몸의 떨림을 멈추시지 못했다.”
사실 그런 일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일인 문파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문파의 장이 독보적으로 강한 곳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곳은 항상 중소형 이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삼 대 이상 이어지는 경우도 드물다.
오래 가려면, 모두가 성장해야 한다.
허리에 해당하는 중견층이 든든하고, 제일인을 뒷받침할 충분한 실력자들이 존재하며,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차기들이 육성될 수 있어야 대문파로 발돋움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인의 무력을 기반으로 한 문파는 무공을 독점하려 하고, 나누지 않기 때문에 항상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진다.
원 맨 팀은 항상 한계가 명확하다.
“모용가주가 강하단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정말 그런 게 가능해요, 언니?”
같은 오대세가의 일원인 제갈다영이 의문을 표했다.
“문파는 가끔 그런 기린아들이 나타나곤 한단 얘길 들었는데, 가문은 문자 그대로 가문이잖아요. 같은 핏줄이니 비슷한 역량을 지녔고, 솔직히 맘에는 안 들지만 문파 간 서열 같은 것도 거의 변하질 않잖아요.”
제갈세가는 그 무공에 있어서는 항상 오대세가 중 말석을 차지했다. 제갈다영이 말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세가의 우열은 쉬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거의 비슷하다 평해지는 곳은 있지만, 그들도 확 치고 올라가지 못하는 건, 핏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해서인 거다.
“자자, 마저 얘기를 들어보죠. 어쨌든 중요한 건 그거잖아요. 그렇게 강한 모용가주임에도, 남궁가주를 이기지 못했다.”
금태양이 한 마디로 남궁은하의 말을 요약했다.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얘기는 뻔했다.
남궁세가는 강하다.
그들의 체질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내공심법은 그들을 가장 강한 무림세가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무당은 남궁세가를 공략하기 위해 그러한 실험에 착수했다.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 소가주의 추측은 이거죠?”
* * *
남궁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천은 표정이 썩었고, 제갈다영은 두 가문 사이에 그런 비사가 있었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나는……
찝찝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뭔가 부족한데.
남궁은하의 추측은 아마도 맞을 거다. 그게 아니고서야 무당의 행동을 설명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만나본 무당의 인물들은 무당의 명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건 지금 태양의원에 머물고 있는 현건이나 무당신의도 다르지 않다.
그 두 사람은 보다 떳떳하게 무당이 명성을 떨치길 바라는 쪽이고, 현 장문인과 청운진인 등은 뒤에서 다소 손을 더럽히더라도 무당의 콧대를 세우려는 쪽인 거다. 추구하는 바는 같지만 그 방법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물론 무당신의가 과거 혈교의 제안에 가담했던 걸 생각하면, 과거의 그는 현 지도층과 생각이 같았던 거 같지만.
그런 점에서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무당이 도전조차 못 한다는 건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일 것이다.
무당신의가 과거 천하오강으로 불리긴 했지만 이번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내력을 다 잃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더욱 그렇겠지.
무당의 성격을 미루어보자면 남궁은하의 추측은 말이 되지만 당위가 부족하다.
일단 그 싸움에 대해 알아야 남궁세가에 대한 경계를 하든 말든 할 텐데, 애초에 그건 비밀에 부치기로 한 싸움이었잖아?
“근데 언니, 그게 왜 외가가 봉문을 한 이유랑 관련이 있는 거예요? 결과적으로는 남궁세가가 이겼잖아요. 오히려 내용을 보면 모용세가가 봉문을 해야 할 거 같은데.”
좋은 질문이다. 역시 제갈다영.
“아까까지 얘기도 그렇지만, 지금부터 할 얘기는 그 어느 곳에도 퍼져서는 안 된다.”
“……계속 이런 쓰잘데 없는 소릴 할 거라면 난 이만 나가보지.”
남궁은하의 사과에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던 창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까도 일어나려다가 붙잡히다시피 한 건데, 녀석치곤 오래 참았다.
하지만 녀석은 또 한 번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체질상, 우리 남궁세가의 핏줄을 이은 자들은 반드시 모용세가를 이기게 되어 있다.”
“뭐, 뭐, 뭐, 뭐라고요?!”
“그게 무슨―.”
과연, 그랬군.
“아까 다영이 말했지. 오대세가는 이미 우열이 정해져 있고 그 이상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다른 가문들도 그렇지만, 특히 남궁과 모용의 관계는 특히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정예들이 모용가주에게 무참히 패배한 거다.”
“기의 오행 때문이겠죠? 그 때문에 내가 창천을 치료한 일에 남궁세가가 큰 관심을 가진 거고요.”
세가의 무공은 그들의 체질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들 사이에는 본질적 우열이 형성되어 있으니까.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모용가주에게 이기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제 검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마지막에 남궁가주가 모용가주를 이겼다지만, 남궁가주는 위기감이 들었을 거다.
이대로는 안 된다, 라는 위기감.
그들이 기나긴 봉문을 한 이유, 그리고 봉문을 푼 이유.
둘 다 하나로 귀결된다.
“맞다. 그대가 창천룡을 살린 얘기를 들은 가주께서는, 그것이 남궁세가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일 거라 판단하시고 나를 보내신 거다.”
하여간 세상사 알 수가 없다니까.
처음 태양의원을 차리면서 창천을 치료했던 일이 돌고 돌아 이렇게 될 줄이야.
“뭐야, 뭔데요? 나만 이해 못 하고 있는 거예요? 언니, 나도 알아듣게 설명 좀 해줘요. 네?”
“제가 설명해드리죠. 각 무림세가가 특이한 체질을 갖고 있고, 그들의 무공은 그 체질을 극복하기 위해 수련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제갈 소저도 알고 있을 겁니다.”
“으음, 그거 나름 비밀이라면 비밀인데.”
제갈다영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말을 이었다.
“그래요. 뭐, 당신도 이제 우리 집안의 치부에 대해서 알고 있으니까. 우리 제갈세가는 탁월한 오성과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 태어나지만, 그 대신 이른 나이에 기억을 잃거나 미치광이가 되곤 하죠. 내력이 수위에 오르면 그 증상이 완화되지만요.”
아니, 그렇게까지 상세히 얘기해달라고 한 거는 아닌데.
대신 내 대모님이 왜 반쯤 미쳤는지는 알게 되었군.
“흠흠, 그런 체질적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몸을 구성하는 기의 오행 중 한 가지가 극단적으로 부족한 상황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건 창천 녀석을 치료하면서 알았죠. 모용가와 남궁가 사이에 우열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마 이것 때문일 겁니다. 한 가지 오행은, 다른 한 오행을 잡아먹으니까요. 당시 녀석은 무당이 어릴 때부터 가르쳤던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었는데, 결과만 말하자면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다른 방법으로 되살렸죠. 무당의 방식도 아니고, 남궁세가의 방식도 아닌 방법으로.”
“그래. 우리 남궁세가는 그 방법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