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내가 친선전의 비무장에 도착했을 때, 그 비무의 결과는 나와 있었다.
“허억, 허억…….”
“더 하겠는가?”
“잠시만요, 촌각만, 후우…… 됐어요. 다시 갑니다!”
승패는 이미 결정됐다.
비무대 위에 서 있는 모습만 봐도 누가 승자인지는 빤했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인 적 없는 것처럼 고고하고 태연한 남궁은하와, 숨을 몰아쉬며 겨우 검을 다잡는 청하.
친선 비무라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면 넝마가 된 것은 청하의 무복이 아니라 그의 살갗이었을 거고,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것은 땀이 아니라 피였을 거다.
하지만 청화는 다시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눈앞에 붉은 꽃이 수도 없이 그려지는 거 같은 화려한 검을 펼쳤다.
……매화가 핀다.
비록 그 모습은 매화보다는 이름 모를 어떤 꽃의 생김새를 닮았지만, 화산에서 시작되어 홍령의 손을 거친 검이 청화의 손끝에서 새롭게 피어났다.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적어도 청화의 다음 대에서나 완성될 줄 알았는데, 그걸 이렇게 자신의 손으로 방점을 찍어버리다니.
“……힘이 아쉽군.”
함께 달려온 좌수검이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동의하는 바지만, 그래도 칭찬해주세요. 열심히 했잖아요.”
“탓하는 게 아니네. 그저 아쉬울 뿐이지.”
좌수검의 말마따나 청화가 그만한 파괴력을 갖췄다면 홍령검은 그야말로 완벽해졌을 것이다.
섬세한 그물은 잔챙이를 그러모으거나 자잘한 공격을 막아내는 데는 효과적이다.
하지만 강력한 한 방 앞에서는 맥을 못 출 수밖에 없는 것이 그물의 성질.
환검이 가진 본질적인 한계다.
더욱더 속도와 정밀함을 곁들여 상대를 속이거나, 섬세한 그물임에도 그 공격을 버틸 수 있는 힘을 갖추거나.
두 방향 중 한쪽을 택해 발전하는 것이 앞으로 남은 홍령검의 과제일 것이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더 하겠는가?”
“잠깐, 잠깐만요…… 허억…….”
“아니. 이제 그만두는 게 좋겠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경험만큼 숙고의 시간이 필요한 법. 그대가 내 검에서 얻어내야 할 것은 다 얻었다.”
“그, 그런가요. 허억…….”
“나 또한 많은 것을 깨닫게 한 승부였다. 사실상 그대가 이겼다. 일어나라.”
남궁은하가 검을 거두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세운 채 버티고 있던 청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청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그 손을 맞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청하는 포권을 취하며 친선전의 마지막 예를 취했다.
짝, 짝짝, 짝짝……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이미 한계에 다다랐는데도 계속해서 남궁은하에게 도전하는 청하의 모습.
일견 미련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한두 번일 때 혀를 차는 거지, 이렇듯 보는 사람마저 그 과정에 몰입하게 하는 싸움이라면 박수가 나올 만도 하다.
“뭐 하세요. 빨리 가서 부축해주시지 않고.”
“나 말인가?”
“당연하죠. 청하가 누구 때문에 저렇게 이를 악물고 했는데. 그 노력을 보고 스승이 칭찬 한마디 안 해주면 되겠어요?”
“스승이라니. 나는 그저―.”
“그럼 저 검을 익히게 도운 스승이 누군데요. 저에요? 어서 가세요.”
나는 옆에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좌수검의 등을 떠밀었다. 좌수검은 조금 당황하는 눈치더니, 이내 비무대에서 내려오는 청화 쪽으로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고 말을 몇 마디 건넸다.
주변이 시끄러워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청화의 눈에 눈물이 맺힌 것도 같고.
청화가 좌수검을 마음에 두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크게 놀란 건 아니다. 좌수검은 남자가 봐도 매력 있는 사내고, 가르치고 배우는 상황은 연심이 피어나기 좋은 조건이니까.
한 팔이 없다는 점, 나이가 청화 아버지뻘 된다는 점 등이 좀 걸릴 수 있겠지만 그건 청화가 판단할 문제다.
은근슬쩍 힌트를 주긴 했지만 좌수검이 그 마음을 받아들일지도 알 수 없고.
내 입장상 기분이 좀 미묘한 건 사실이지만……
친아버지를 연모하는 내 또래 여인이 있다는 게, 기분이 안 미묘할 수 없잖아?!
하지만 홍령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좌수검에게는 아직 남은 나날이 있다.
두 사람이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분이 미묘하다는 이유만으로 가로막을 수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
주사위를 던졌으니, 당첨이든 낙첨이든 결론이 나겠지.
지금 당장 내게 중요한 건 이쪽이다.
“그대가 태양의원의 금태양인가.”
“남궁세가의 소가주시겠죠?”
“그래. 남궁은하다. 내 사촌에게서 그대 얘기를 많이 들었지.”
내 주변에는 본회의에 참석했다가, 남궁세가의 등장에 깜짝 놀라 달려온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 대화에 끼어들어 남궁은하와 말을 트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저 말문을 잃고 말았다.
“우리 남궁세가는 그대들을 믿는다. 이 자리에서 공언컨대, 간악한 혈교의 무리는 남궁의 검이 내리는 판결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음, 이 말을 본회의장에서 해주길 바랐는데.
어쩌다 보니 무림인이 아닌 일반 사람들까지 남궁은하의 말을 들어버렸다.
나로서는 굳이 이 얘기를 퍼트리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니, 이득이라면 이득인 셈인가?
“남궁세가가 봉문을 풀고 무림에 복귀한다고 선언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곧 있을 무림맹 회의에 가주께서 참석하시어 이 일에 관해 말씀하실 거다.”
“허면 화산지회의 일월용봉전에 참석하신다는 거군요.”
“그렇다.”
남궁은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에서 와! 하는 함성이 터졌다.
“남궁세가가 은거를 풀고 모습을 드러낸다!”
“일월용봉전에서 화산지회 우승자를 상대할 천하제일인이 마땅치 않아 화산지회가 미뤄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야 볼만한 구경거리가 열리겠군!”
“그런데 왜 남궁세가가 하필 여기 와서 저 얘기를 하는 거지? 남궁세가와 태양의원 간에 무슨 관계가 있나?”
“남궁세가가 봉문한 게 끔찍한 병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던데. 태양의원의 금 의원이 그걸 고쳐준 거 아냐?”
“말 되는군! 엄청난 사건이야, 바로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알려야겠어!”
나와 남궁은하가 주고받은 말은 삽시간에 주변으로 퍼졌다. 거기에 약간씩 살이 붙어서 말이다.
아는 얼굴들이 몇몇 보이는 걸 보니, 하오문이 군중 속에서 내게 유리한 쪽으로 소문을 퍼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긴 했지만 오히려 내가 원하는 쪽으로 갔다.
“일단 들어가시죠. 마침 의맹회의가 진행 중이었는데 남궁세가도 참석해주시면 좋겠군요.”
남궁세가가 우리 편을 들었다.
이제 무림문파들은 내가 이끄는 방향으로 함께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 *
다시 돌아간 본회의장에선 사실 제대로 된 회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무림 최대의 미스테리였던 남궁세가의 봉문이 풀린 상황이 아닌가.
모두들 남궁세가가 왜 봉문을 했었는지, 정말 섬서사변과 관련된 일 때문에 봉문을 풀고 나온 것인지, 남궁가주가 다음 무림맹회의에 참석할 것인지만을 물어댔다.
“그것은 세가의 비사에 해당하는 일이므로 쉬이 말할 수 없습니다.”
“섬서사변이 봉문을 푸는 이유 중 하나였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곧 가주께서 무림맹주에게 서신을 보내실 겁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회의는 거의 청문회에 가깝게 흘러갔고, 남궁은하에게서 그 이상을 캐낼 수 없다는 걸 문파 대표들이 납득하고 나서야 끝났다.
태양의원의 정회원 승격 문제나 섬서사변 재조사 등에 대한 문제는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무시당했다가 아니라, 더 이상 거부감을 표출하지 못하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게 되었단 뜻이다.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의가 파한 후 나는 따로 자리를 만들어 남궁은하와 대면했다. 그 자리에는 나와 남궁은하 외에도 제갈다영과 창천이 자리해 있었다.
“별말을. 그대가 남궁세가에게 주기로 약조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뭐, 그건 동감합니다. 제가 드릴 게 워낙 커야죠.”
“대신 그 말이 허언에 그칠 경우 그대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오늘 받은 도움에 비할 바가 아닐 거다.”
남궁은하의 눈빛은 보통이 아니었다. 한 자리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거목을 마주했을 때의 기분이 이럴까.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 그 기백에 압도당해서는 아니었다.
“언니, 허언이 아니라니까요. 내가 다 알아봤다고 했잖아요? 거기에 가주께서도 금 의원의 서신을 받고 이건 진짜라고 하셨는데, 여기까지 와서 왜 그래요? 분위기 이상하게.”
이번 일에는 제갈다영의 역할이 컸다.
마의의 일로 인해 내게 실망하고 태양의원을 떠났던 제갈다영.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후 김진에 대해 추적하던 그녀는 김진과 나의 연결고리를 발견하고는 나와 태양의원에 대해 깊이 파고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창천의 핏줄에 대한 비밀을 캐낸 것이다.
그 부분은 정말 제갈세가의 저력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는데, 더 놀라운 건, 그녀가 그 사실을 어떤 정보적 무기로 쓰려고 묻어둔 것이 아니라 남궁세가로 가져갔다는 거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남궁은하,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거고.
“저도 거슬리지 않으니 걱정은 마세요. 소가주는 충분히 해야 할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지.”
창천의 불만 어린 뾰족한 말이 우리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녀석은 최근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았는데,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내 조카 금리 때문이었다.
큰 방향이야 내가 잡았지만 세부적인 사항은 금리가 다 챙겼으니 그만큼 바쁜 게 당연지사. 자연 창천 녀석을 만날 시간도 대폭 줄었을 거다.
거기에 최근 금리가 누구에게 유독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네가 창천인가.”
“그렇다만.”
내가 입을 열기 전에 남궁은하가 먼저 창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작게 고개 숙였다.
“세가의 방계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들었다. 가문이 봉문 중이어서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사이 그런 일이 있었다니. 그대의 부모에게 일어났던 일에 심심한 유감을 보낸다.”
“금태양. 이런 사과나 들으라고 날 여기 앉혀놓은 건가?”
저 녀석, 저 성격은 남궁세가 유전인 건가 했더니. 그냥 이놈이 싸가지가 없는 걸지도.
“그냥 좀 앉아서 잠자코 들으면 안 되냐?”
“쓸데없는 데 시간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나가서 순찰을 돌고 말지.”
“금 의원의 서찰에는, 그대가 남궁세가의 약점을 해결할 수 있는 증거라고 하던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창천이 남궁은하의 말에 움찔하며 엉거주춤하게 섰다.
“어째서 무당쯤 되는 대문파가 그런 실험에 손을 댔는지 말해준다면 앉을 텐가? 확증은 아니고 추측일 뿐이다만, 거의 사실에 가깝다 할 수 있을 터.”
“…….”
창천 녀석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바닥에 털썩 소리 나게 앉았다. 그리고는 한 번 얘기해보라는 듯 삐딱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얘기는 서찰에도 적지 않으셨죠. 저도 궁금하군요.”
“나도요, 언니. 혹시 그게 외가가 봉문을 한 이유랑 관련이 있어요?”
“그래. 나도 어른들께 전해들은 얘기지만…….”
남궁은하가 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 숨을 골랐다. 부드러운 연꽃의 호선을 닮은 입술이 달싹였다.
“이십여 년 전. 천하제일의 좌, 그 자리를 건 싸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