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내 말과 함께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의 이름은 불편함이다.
무당처럼 그 일에 가담하지 않은 이들도 그랬다. 화산의 몰락으로 득을 본 게 없어도 그렇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예상한 바다.
좌수검을 위시한 이들이야 본인과 관련된 일이니 발 벗고 나설 수밖에 없고, 나도 처음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깊게 들어갈수록 나, 그리고 홍령과 관계가 있어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게 아니라면, 저런 반응이 정상이다.
본인과 관련된 일도 아닌데, 그때 유의미한 일을 하지 못했다고 자신들의 기반까지 갉아먹으며 헌신하는 소림이 이상한 거지.
그러니 실망하지도 않았다.
여기까지 분위기를 끌고 오는 것이 내 계획이었으니까.
“……관련된 이야기를 무림맹 회의에서 다루면 되겠군요, 아미타불.”
아미의 대표가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장의 골치 아픈 문제를 무림맹 회의로 떠넘기는 것이다.
그나마도 내게 호의적인 아미의 대표니까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허허…… 그러면 될 거 같군요. 허나 무림맹 회의가 언제 열릴지 확답을 할 수 없으니, 이 문제는 각자 돌아가 천천히 상의해보면 될 거 같습니다그려.”
“맞습니다. 화산지회가 결정되어야 어찌할 텐데 참, 여러모로 난감한 문제가 많군요.”
난감하게 웃으며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는 상황. 혈교의 위협이라고 해봤자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이 아니니 그럴 수밖에 없지.
보통 사람들에게 정파 무림은 협과 의기가 있어 의롭지 않은 일이 있으면 모두들 분기탱천해 일어난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현실은 이렇다.
나만 아니면 된다.
섬서사변 전에도 이랬는지, 아니면 그 이후에 유독 심해진 건진 모르겠지만……
“진정하세요, 좌수검.”
좌수검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걸 보면 그 전엔 그런 척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니면 섬서사변으로 직격타를 맞은 문파들이 그런 분위기를 선도했던 걸지도.
……홍령이 보고 싶은걸.
[이 이상 분위기를 어떻게 끌어갈 생각인지 물어도 되겠나. 이자들은 틀렸다. 눈앞에 이익이나 손해가 없다면 움직이지 않을 거다.]
[계획이 있어요. 있는데…….]
이 순간,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준비한 조커, 와일드카드가 있다.
근데 왜 안 오지?
사전에 주고받았던 연락에 의하면 이미 도착하고도 남아야 하는데.
더 이상 시간을 끌면 기껏 만들어놓은 분위기가 흐지부지될―
벌컥―!
속으로 초조해하고 있던 차, 회의실의 문이 예고도 없이 열렸다.
“누구냐, 무례하다!”
“의맹회의 중임을 모르는가!”
몇몇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쳤다. 사실 상대가 누군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거다. 불편한 상황에서 화제전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
“다영이 아니냐? 네가 여긴 웬일로―”
그리고 그중 한 명, 제갈세가의 대표가 불쑥 들어온 누군가를 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난입자는 바로 제갈다영이었다.
“숙부님, 인사드려요. 그보다, 큰일이어요. 지금 밖에 친선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나요?”
“친선전에? 무슨 일이기에 회의장에 쳐들어와 이리 소란이란 말이냐?”
모두의 시선이 제갈다영에게 모였다.
그리고 제갈다영은 내게 잠깐 눈을 맞췄다가 다시 모두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남궁세가요, 남궁세가가 와 있사와요!”
* * *
제갈다영이 의맹회의 본회의장을 향해 뛰어가기 전으로 시간을 약간 돌려보자.
의맹회의에는 정회원들 외에, 각종 연수와 연구성과 발표에 참석하려는 의원들, 이때를 기회 삼아 큰 맘 먹고 방문한 환자들도 많았지만, 사실 대다수는 이 큰 행사를 구경하러 모인 이들이었다.
“한 표에 최대 280배! 일확천금의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그리고 이때다 싶어 장사를 하려 모인 이들도 있었다.
친선전을 대상으로 한 도박에는 금왕전장 분점이 은밀히 돈을 댔기에 판이 컸다.
토너먼트식이 아니라, 한 명의 참가자가 올라가 계속해서 도전자를 받고, 패하면 다시 그 도전자가 도전자를 받는 식으로 진행되었기에 오히려 토너먼트보다 열기도 컸다.
“청화! 청화문주 소홍령검이 또 이겼다!”
“청화문은 최고다!”
“한 판만 더 이기자! 그러면 난 대박이야!”
그리고 이 친선전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청화문의 문주 청화였다.
과거 무당파의 속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제자였던 이에게 사기를 당해 모든 것을 빼앗겼던 전대 청화문주.
전대 문주의 딸인 청화는 금태양의 도움으로 빼앗겼던 이권들을 되찾았다.
그리고 청화문을 무림문파로서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다가, 지금은 금태양의 제안으로 태양의원의 의원들에게 호신술을 가르치는 일종의 무공교관 일을 하고 있다―, 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냐.’
비무대 위에 선 청화는 깊게 심호흡했다.
벌써 세 명의 도전자를 꺾었다. 그녀를 만만히 보고 덤볐던 도전자들이 몇 합 겨루지도 못하고 패배한 탓인지 쉽사리 비무대에 올라오는 자는 없었다.
‘부족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검을 선보여야 하는데.’
청화문의 청화검에, 화산의 매홍검을 더해 만들어진 검법. 홍령검.
원래대로라면 남의 비전을 훔쳐 익혔으니 큰 죗값을 치러야 했겠지만, 금태양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 검을 더 발전, 승화시켜 널리 알려주기를 바랐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평생 한 번쯤 복용하는 게 소원이었던 상질의 내단을 무한정 제공받은 데다가, 홍령검을 극상까지 끌어올리라며 붙여준 지도교관이 그 유명한 좌수검이었다.
요새는 나머지 한 팔마저 떨어졌다가 금태양이 수술로 붙여준 일화가 더 유명했지만 청화는 그 이전부터 좌수검을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청화문의 전대문주가 종종 그의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본명은 휘소. 종남을 이끌어갈 기대주였고, 당대에 내로라하는 후기지수였으나 항상 큰 무대를 연인인 홍령에게 양보해 진신전력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사내.
‘그러나 이 애비는 말이다, 항상 그가 천하오강 중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단다. 그 일만 없었어도 말이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전대문주는 술을 마시면 젊은 날 휘소와 그 친구들을 만나 큰 도움을 받았던 얘기를 꺼내곤 했다. 그랬기에 더더욱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런 이의 지도를 받는데 결코 대충할 수는 없었다. 이건 청화의 인생에 다시 없을 기회였다.
한때 청화검문의 공세에 무력하게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소녀는 이를 악물었다.
아름다움이 물이 올라 여인으로서 정점을 찍어갈 때다. 허나 청화는 그런 것은 아랑곳 않고 밤낮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녀를 잘 알던 사람들도 흠칫 놀랄 정도로, 수련에 임하는 청화는 굶주린 짐승 같았다.
수련을 하지 않을 때는 매홍검의 비전서와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철저히 분석했다. 청화검의 뿌리가 되는 무당의 태청검법도 파고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천재적인 무재를 타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금태양이 기대하는 것도 그녀 자신이 홍령검의 극에 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타고난 통찰, 간파력, 무공 분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홍령검의 가능성을 끌어올리는 것.
그것이 금태양, 그리고 그녀의 지도를 맡은 좌수검이 원하는 바였다.
‘하지만 보여드리고 말 거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고, 해냈는지. 그리고 그분께 내 마음을―.’
두근, 심장이 크게 뛰었다.
어느새 연모하게 된 그에 대한 생각이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항상 어느 먼 곳을 보고 있는 그 사람.
청화가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은 그저 곁에 있는 사람일 뿐, 그의 시야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검을 완성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분명 달라지리라.
무언가 확답을 받은 것도 아닌데 청화는 그렇게 생각했다.
받아 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자신도 그 정도 주제는 알았다.
그래도 그 앞에 당당히 설 수는 있을 것이다.
“다음! 아무도 없어요?!”
청화가 있는 힘껏 외치자 주변에 모여든 도박꾼들이 청화의 이름을 연호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그녀의 심장이 뛰진 않았다.
아직 충분할 만큼 검을 펼치지 못했다. 그 검을 보여줘야 할 사람도 이 자리에 없었다.
어쩔 수 없다. 그에겐 그의 일이 있으니까. 청화의 일은 그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그저 스스로 납득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그 검, 내가 받도록 하지.”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좌중을 갈랐다.
그리 큰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신비한 일이었다. 얼핏 소년의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는 단단한 여인의 목소리.
삼단 같은 머리채를 가벼이 흔들며 비무대에 올라온 그녀의 몸놀림은 마치 공기처럼 가벼웠다. 그에 비하면 새의 날갯짓은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녀를 본 순간 청화가 받은 느낌이 그랬다.
저건 대붕(大鵬)이다.
“누구시오! 이름을 밝히시오!”
“누가 감히 청화문주에게 덤비는 거냐! 어느 집안의 애송이야!”
“기도는 예사롭지 않지만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느 문파의 후기지수지?”
삼 연승을 거둔 청화 앞에 나타난 도전자에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 도전자 또한 여인이었다. 거기에 아름다웠다.
청화가 귀엽고 청초한 느낌이라면 도전자는 꽃의 왕, 국화와 같았다. 표정과 태도 그 모든 것이 고귀하고 위엄이 있었기에, 그녀가 주변을 한 번 천천히 돌아보자 도박꾼들도 더 이상 쉽사리 야유를 보내지 못했다.
“나의 이름은 남궁은하.”
장강의 물결처럼 거침없는 목소리가 좌중 속으로 퍼져나갔다.
“남궁세가의 소가주다.”
“……청화문의 문주, 청화예요. 소홍령검이라 불리고 있어요.”
청화가 마른침을 삼켰다.
홍령검을 선보일 맞수를 원하고 있었지만 너무 큰 거물이 올라왔다.
이름을 사칭한 가짜일 수도 있지만 청화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궁이라는 이름은 사칭하기에는 너무 거대했고, 상대는 정말 말로만 들었던 남궁세가 그 자체였다.
“내 가문이 오랜 시간 문을 걸어 잠근 탓에 나는 이렇다 불리는 이름이 없다. 무명소졸의 신분으로 청화문의 문주에게 도전장을 보내니 용서하시길.”
“나, 청화. 홍령검의 이름을 걸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두 무인은 거리를 벌리고 섰다. 청화의 눈에 남다른 각오가 엿보였다.
이길 수 있을까? 그건 모른다.
아니, 사실 알고 있다. 절대 무리라는 것을.
기세에서 이미 상대가 안 된다.
그럼에도, 청화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그것은 홍령검에 대한, 이 검을 이어가고자 한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이미 기세에서 밀리고 있음에도 눈에서 투지가 타오른다. 가문 밖에는 이처럼 재밌는 세상이 있었구나.’
원래대로라면 사촌 제갈다영과 만나 바로 대회의장으로 가야 했지만, 첫 중원행에 발 가는 대로 돌아다니다 보니 이곳 친선장이었다.
바깥세상의 무인들은 으레 그러하다 들어왔던 것과 꼭 맞는 이들도 있었고, 저도 모르게 호오, 감탄을 하게 되는 이들도 있었다. 태양의원의 창천검이나 무당의 대제자 현건 등이 그랬다.
그다지 검을 부딪쳐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들과의 싸움은 어찌 흘러갈지 눈에 훤히 그려졌다.
하지만 눈앞의 이 여인은 달랐다.
청화는 압도적인 실력 앞에 무릎을 꿇을지라도 다시 일어날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세가 내에서 그런 이를 본 적 없었기에, 남궁은하는 비무대 위에 올라섰다.
자신의 실력을, 그리고 상대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이가 어째서 그런 태도로 임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건지도.
“승리권 판매가 끝났습니다! 그러면, 청화문주 청화와 남궁세가 소가주 남궁은하, 비무 시작합니다!”
가문 밖으로 나온 건 집안의 일 때문이었지만 어쩐지 그 이상으로 흥미로운 일이 자신을 반겨줄 것 같은 예감.
그러한 기대감을 담아, 남궁은하는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