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참석자 중 절반은 확실히 내 편이다 보니 이 축제를 제대로 즐긴 것이다.
“젊은 의원이 참으로 영리합니다. 역시 금왕의 핏줄인 건 무시 못 하는군요. 의맹회의를 완벽히 제 것으로 만들어버렸어요, 허허.”
“약침이라는 것이 참 탐이 나서 물어보니, 여기 있는 금왕공방 분점에서 만들어 바로 공급하기에 물량이 넉넉해 거래가 가능하다더군요.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고민했더니 금왕전장 분점이 있다고 하지 뭐요. 본문의 전표를 쓸 수 있는 데다, 돈을 지불하면 금왕표국 분점을 통해 바로 보내준다 하더군요. 좀 비싸기야 하지만 이처럼 편리하니 굳이 우리가 직접 만들어야겠단 생각도 안 들더이다. 상재는 참으로 타고났습디다.”
“다들 태양의원 의학당은 구경하셨소이까? 본도는 오늘 하루 그곳만 세 번을 돌았소이다. 한 스승에게 깊이 있게 배우지 않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스러웠는데, 그들의 기본이 본문의 의원들보다 탄탄하더구료. 거기에 졸업 후 스승을 정해 깊이를 더할 수 있다 하더이다. 이건 의원들뿐 아니라 본문의 제자들을 가르치는데도 쓸모가 있겠더군요.”
“의학당의 학생들 중 아미의 제자들이 있던데, 부럽습니다. 아까 연구발표를 들어보니 산과는 물론,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거뒀던데. 우리도 다음번 기수에 의원들을 보낼 수 있을지 물어봐야겠습니다.”
“모든 것이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아니겠습니까, 아미타불.”
공을 돌리면서도 아미파 장로의 만면에는 흐뭇한 미소가 가득했다. 구파일방의 일원이긴 했지만 어딘지 대외적으로 평가가 떨어지는 곳이 바로 아미파였다. 불가로는 소림에 밀렸고, 무공으로는 여인들의 문파라 하여 아예 논외로 쳐지는 경우가 대부분.
불자가 그런 것에 연연해해서는 안 된다, 속상해하는 삼대제자들에게 누누이 말하곤 했던 그지만, 비교대상에 오르지도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 모를 리가.
그랬던 것을, 이번에 삼대제자들이 잡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용해 조금이나마 어깨를 펴고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무공 실력 덕분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장로는 지금으로서도 충분히 만족했다. 의술과 무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시간이 좀 걸리기야 하겠지만, 의학적 성취가 아미 제자들의 무공 성취에도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기에 아미파의 장로는 지금을 즐겼다.
“흠흠, 슬슬 시작할 때가 됐는데. 주재해야 할 사람이 오질 않는군요.”
“젊은이라 그런가 시간 약속의 중요함을 모르나 봅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가 불편했던 이들, 무당과 무당의 편이 되어주기 위해 참석한 이들 몇몇이 창밖의 그림자를 보며 불평을 내뱉었다.
확실히 약속됐던 시간보다 좀 지체되기는 했다. 그 때문에 친 태양의원 인사들이 분위기를 띄우려 수다를 떨었던 거기도 했고.
비록 태양의원이 이번 회의를 개최한 주인공이라지만 여기 모인 이들은 모두들 기나긴 역사와 전통, 자부심을 가진 문파와 세가의 일원들.
그들을 두고 약속된 시간에 늦는다는 건 그들을 무시하는 처사나 다름없다.
이미 일 각이 지났다.
이 이상 늦어진다면 무당을 비롯한 파벌이 자리를 뜬다 해도 할 말이 없을 때쯤.
“늦어서 미안하네.”
문이 열리고 백발이 성성한 두 노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두 분을 모시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부축하는 금태양 또한 등장했다.
무당신의와 민초신의.
각각이 회의에 유의미한 표를 던지진 못하겠지만, 무림의 의학계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들이 등장했다.
사실 그들까지는 이미 등장이 예고되어 있었기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리 놀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노의(老醫)들을 향해 예의를 표했다.
무당의 대표, 청운진인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무당신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이상의 교류는 없었기에 무당신의가 태양의원에 있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갖고 있던 이들이 기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조금 늦기야 했지만 이제라도 시작을 하면 되겠군요. 허면―.”
청성의 대제자가 분위기를 수습하며 운을 띄운 순간 또 한 사람이 문을 벌컥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고, 내가 좀 늦었습니다. 벌써 시작했나?”
늦었다곤 하지만 전혀 미안하지 않은 말투에 몇몇이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친 보석이며 황금으로 된 장신구가 한가득이라 그 무게 때문에 늦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자였다.
황금신의. 돈만 주면 정사마를 가리지 않아 악명이 높지만 그 실력만큼은 진짜라 알려진 이가 민초신의와 무당신의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민초신의와 무당신의까지는 썩 놀라지 않았던 사람들도 조금 흥미롭다는 듯 주변에 작게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사대신의 중 무려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들 각각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다시 없을 일.
그 일을 만들어낸 태양의원의 금태양에게 다시 한번 시선이 모였다 흩어졌다.
“크흠, 무량수불. 올 사람은 정녕 다 온 듯하니 이제 시작을 하면 되겠소이다.”
무당의 청운진인이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양의원에서 개최를 하긴 했지만 아직 정회원은 아닌지라, 주재는 청운진인이 하게 되어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더 이상 올 사람이 없었기에, 다들 황금신의의 등장에서 관심을 끄고 청운진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허면 요번 회의의 가장 중요한 안건부터 시작하겠소이다. 바로 태양의원의 정회원 승격에 관한―.”
벌컥―
그때 또다시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성큼 발을 들였다.
“나 왔다, 아가야!”
날카롭지만 눈이 휘둥그레지는 미모를 가진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소리 없는 경악을 담은 눈으로 다시, 한쪽에 앉은 제갈세가의 대표를 힐끔거렸다. 제갈세가의 대표는 ‘저러다 실신하는 거 아냐?’ 싶을 정도로 놀라서 입을 붕어처럼 뻐끔거리고 있었다.
제갈세가의 망나니, 홍령과 좌수검의 옛 절친, 그리고 지금은 마의라 불리는 자. 제갈천우.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주인공이 등장했는데 더 반겨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사람 멋쩍게.”
그는 전혀 멋쩍지 않은 태도로 황금신의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 사대신의가 한 자리에 모이다니…….”
누군가의 말처럼 쉽게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진 상황.
금태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이제 진정으로, 태양의원 주최 의맹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 *
좀 떨리는데.
태양의원을 개원하고부터 쭉 이 순간을 향해 달려왔다.
정회원을 목표로 하는 이유는 처음에 비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초창기부터 목표로 해온 일이었다.
처음에는 의원을 운영하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다양한 방법으로 의맹의 인정 없이 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지금 상태 그대로 지속해도 의맹은 내게 어떤 제재를 가할 방법이 마땅찮다.
물론 그를 위해서 쓸데없이 자원을 써야 하기에 정회원 자격을 득해놓는 것이 좋기도 하지만.
“―이제 해당 안건을 투표에 부치도록 하겠습니다. 투표는 거수로 진행합니다. 태양의원의 의맹 정회원 승격에 동의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하나, 둘, 셋……
나는 숫자를 세다 그만두었다. 의미가 없었다. 척 보기에도 2/3정도 인원이 손을 들었으니까.
소림과 개방은 물론, 아미파와 청성도 손을 들었고, 내가 약관을 이용해 내 표로 흡수한 남해태양궁도 있었으며, 북해빙궁에는 얘기도 안 했는데 참석해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당당 녀석 또한.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어 보였다.
당가를 재건하느라 여력이 없을 거 같아서 일부러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럴수록 이런 자리에 참석해 얼굴을 비쳐야 한다며 시간을 짜내 달려왔다.
뭐, 내 승리가 확정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지만 내 편을 들어주고 싶어서도 있겠지.
그 외에 긴가민가했던 제갈세가가 내 편을 들었고, 청성처럼 무당이 제 편으로 삼으려고 데려왔던 이들 몇몇도 찬성에 손을 들어올렸다.
진행을 맡은 무당의 청운진인은 다음 순서로 넘어가야 하는 것도 잊은 듯,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에 반대하는 분들은―.”
“흐아암― 그거 굳이 필요 있나? 이미 끝난 거 아냐?”
청운진인의 말을 자른 건 마의였다. 고의적인 게 분명한 하품과 함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짝짝 쳤다.
“자자, 정회원 됐으니까 이만 해산!”
찬성표를 던진 이들도 마의의 그런 행동에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미 끝난 사실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였다.
그때.
“애초에 근본적인 문제를 논하지 않고 얼렁뚱땅 정회원 자격을 주어도 되는 겁니까?”
누군가 삐딱한 목소리로 이의를 제기했다.
찬성에 손을 들지 않은 젊은 청년은 팽가의 소가주였다.
하북팽가는 황실과 인연이 깊어 무림맹 회의에도 잘 참석을 하지 않는다. 의맹회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들 또한 핏줄로 인한 유전병이 존재하지만 그들은 자체적으로 의술을 파고드는 대신 황실 어의의 손을 탔다.
또한, 그들은 무당과 인연이 깊은 문파이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면 황실과 무당의 인연이 깊었다. 당대 황제는 무당의 신선술을 신봉해 정기적으로 도사를 초청해 어의들에게 연단술을 전수하게 했다.
그러니까 팽가의 소가주, 저 녀석은 무당의 어용으로 온 참가자란 말이지.
“소가주, 무슨 뜻으로 한 말이오?”
“저희 팽가가 의술에 있어서 그리 대단한 성취를 거두진 못했지만, 그래도 여러 문파의 의원들이 합의한 바에 대해선 압니다. 마비산은 수술시든 그 외든 절대 사용해서도 허용되어서도 안 될 극악무도한 독이라 들었습니다. 헌데 저자의 의원에서는 수술에서는 물론 일반 처치에도 이를 남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회원이 되기도 전에 의맹의 합의를 어기고 있는데 승격이 말이 됩니까?”
아이구, 잘한다. 잘해!
청운진인의 꿈틀거리는 입꼬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무어라 항변을 해보란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느긋하게 의자에 상체를 기대었다.
어차피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마비산을 금지한 이유를 아는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가 혼재되어 있는 지금.
그 일을 정확히 해명하지 않으면 훗날에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다.
“그건 우리 당가가 설명을―!”
쉿.
나는 당당과 눈을 맞추며 입에 검지를 갖다 댔다.
당당이 나서서 우리가 쓰는 마비산은 당가가 만든, 산공독 성분이 전혀 없는 거라고 말해봤자 저들이 들을 리 없다.
오히려 금지하기로 협의를 했음에도 산공독 성분만 빼서 마비산을 만들어 사용한 당가에 나쁜 이미지가 씌워질 수도 있다.
이 사안에 대해서는 이미 대비를 해놨다.
당가도, 태양의원도 전혀 해를 입지 않는 쪽으로 말이다.
“그 얘기에 대해서는, 이 늙은이가 한마디 하겠소이다.”
한 편에 앉아 잠자코 얘기를 듣던 사대신의 중 한 사람, 무당신의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청운진인의 눈이 또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저 정도라면 차라리 눈을 빼놓고 놀랄 일이 다 끝난 후에 끼우는 게 낫겠는데.
차라리 건드리지 않는 것이 무당 측에는 좋았겠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판도라의 상자를 건드려 버린 것을.
“마비산이 금지된 배경인 섬서사변, 그 일에 빈도가 큰 책임이 있음을 여러분 앞에 고하는 바요.”
나는 그저 구경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