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308화 (308/350)

308화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우리 태양의원을 제외하면 무당의 태청의원만큼 실력 있는 의원도 없지. 거길 빼면 사대신의 정도려나. 그들이라면 고독을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몰라.”

녀석이 움찔했다. 태연한 척해도 역시 진짜 그럴 수는 없겠지.

“하지만 단순 제거랑 그 후유증까지 잡을 수 있는 건 별개 아니겠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보통 고독이 아니라 사천당가의 고독이잖아. 운 좋게 안 죽고 제거는 할 수 있어도 치명적인 후유증이 남을 거야. 당가가 아니고서야 그 문제를 해결할 순 없을걸?”

“…….”

“무당이 널 어떤 말로 설득하려는지 몰라도 그건 네 표를 얻으려는 개수작일 뿐이야. 자신감일지도 모르지. 모용가주가 분노한다 해도 자기들은 무당이니까,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을걸. 중간에 낀 너만 고래싸움에 등 터진 새우가 되는 거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어. 애초에 무당파와는 스친 적도 없으니까.”

녀석의 말은 사실이다. 내가 뭐 하러 이 녀석을 태양의원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별실에 넣어뒀겠는가? 오고 가는 사람들을 감시하기에 이보다 최적의 장소는 없다.

그 이전, 무림맹에 있을 때 접근했을 수도 있지만, 그때는 무당이 녀석의 고독을 제거해서 얻을 이득이 없었으니까. 안면 정도는 있어도 이렇다 할 거래가 오고 가지는 못했을 거다.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닐 거 아냐?”

“……오해야. 그럴 이유가 없잖아.”

거짓말을 하려면 입에 침이나 바르든가. 누가 제 목줄을 쥐고 있는데 그걸 끊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 있나? 그것도 녀석처럼 전생부터 현생까지 갑의 자리에 있던 놈이 말이다.

더군다나, 서자로 태어나 모용갑에게 치이며 살다 모용갑이 죽은 이후 실질적인 모용세가의 후계자가 된 놈이다.

그 상황에서 제 몸의 고독을 제거하고 싶지 않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다.

“그럴 이유가 없다라…… 그래, 그럴 수 있지. 사실 생각해보니까 나도 그렇더라고.”

“무슨?”

“너랑 굳이 척질 필요가 있나 싶더란 말이야. 네가 거짓말을 좀 하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네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나는 품에서 미리 준비해온 약 봉지를 녀석에게 건넸다.

“먹어.”

“……이게 뭔데?”

“고독을 제거하는 약.”

“!”

“부작용은 없어. 당가에서 직접 받아온 거니까. 솔직히 목숨을 담보로 누군가를 좌지우지하는 거, 내 성격에 안 맞거든.”

하지만 녀석은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당연하다. 나라도 녀석의 상황이었으면 내 말을 안 믿었을 거다.

하는 수 없지. 조금 더 작업해볼까.

“사실 널 고깝게 본 것도 전생의 이유 때문이긴 했어. 너의 전생과 이름이 똑같은 김진이라는 녀석, 기억해? 네 부하였던, 이름이 같다고 전격 승진시켰던 놈 말이야.”

“그 녀석을 알아?”

“친구였거든.”

가면으로 표정을 가릴 수 있어서 연기가 한결 수월했다. 솔직히 가면을 쓰지 않았다면 태연히 거짓말하는 건 쉽지 않았을 거다.

“뭐, 그렇게까지 친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때 네 정체를 들으니 순간 욱하더라고.”

“그랬군…….”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그거야 전생의 일이잖아? 이번 생에선 너도 좀 불쌍한 놈이고. 그 녀석 잘못된 건 안타깝긴 하지만 전생의 일을 이번 생까지 끌고 오는 게 맞나 싶더라. 그녀석이 지금 여기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여기 있다.

전생의 일을 현생까지 끌고 오는 일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이미 관계없는 일이 됐는데, 굳이 그래야만 할까.

하지만 내 안에 한이 남아 있다.

녀석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눈앞에 있는 철천지원수를 가만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나?

그래서 나는, 녀석을 끝의 끝까지 써먹기로 결심했다.

녀석이 전생에 내게 그랬던 것처럼.

“찜찜하면 안 먹어도 상관은 없어. 하지만 지금 내가 너에게 해코지를 해서 무슨 이득을 보겠어? 안 그래도 적이 많은데 굳이 모용세가까지 적으로 돌리고 싶진 않아. 병 주고 약 주는 일이긴 하지만, 이걸 계기로 너와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다면 더 좋을 거고.”

순간 녀석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진짜 친구가 된다는 말에 흔들린 게 아니다. 계산을 마친 거다.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냐. 더 나빠질 것도 없다. 모용가의 후계자가 되어도 계속 녀석의 노예처럼 사느니 차라리 도박을 선택하자.

놈의 생각은 내 손바닥 위에 있다.

“좋아. 널 믿어보겠어.”

모용을이 결심을 굳힌 듯 약봉지를 펼쳤다. 그리고 그 안에 든 환을 삼켰다.

잠시 뒤, 벌레의 형태를 한 것이 녀석의 얼굴 가죽 밑을 바쁘게 기어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당당에게 저렇게 될 거라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신기했다. 벌레는 녀석의 얼굴거죽 밑을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이내 한 곳에서 멈췄다. 그리고 녹아버린 듯 그 형체가 사라졌다.

녀석이 눈을 떴다.

“……진짜 사라졌잖아.”

“진짜라니까. 날 뭘로 보는 거야.”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보았다. 나는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진짜 친구가 될 수 있겠지?”

녀석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내 손을 단단하게 잡았다.

―잘 살아 있군.

녀석의 맥에서 미약하게 느껴진 느낌이 내 안의 모충에게 전달되었는지 모충이 꿈틀거렸다.

고독은 제거되지 않았다. 그저 그런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녀석이 고독을 제거하려고 시도할 거라는 건 명약관화했다. 모용갑의 죽음으로 녀석이 실질적인 모용세가의 후계자가 되었으니까 더욱 그랬다. 내가 무용가주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모용을의 고독을 제거했을 거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남는 게 없다.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존재는 잃고, 모용세가라는 적을 만들 뿐이다.

이 고민을 상담했을 때 당당은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며 내게 그 방법을 전해주었다.

당가라고 이 고민을 왜 하지 않았겠는가?

제 목줄, 진짜 목숨과 연결되어 있는 목줄을 쥐고 있는 대상에 대한 증오는 언젠가 그 대상을 태워버리기 마련.

당가는 고독을 가사상태에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존재 자체를 느껴지지 않게, 죽은 듯 위장시키는 방법을 이미 개발해 놨다.

그런 점에서는 죽은 당가주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넌 진짜 대단한 녀석이야.”

“칭찬 고마워.”

사람이란 참 오묘한 존재다.

좀 전까지 녀석은 나에 대한 증오를 숨기느라 급급했는데, 지금은 그 증오가 나에 대한 경외로 바뀌었다.

진실을 모르는 상황에서 녀석은 내가 그만한 결단을 할 수 있는 큰 그릇으로 느껴졌을 거다.

목줄을 매지 않았음에도 함부로 거슬러서는 안 될, 기왕이면 제 편인 것이 나은 존재로 인식됐겠지.

그리고 여차하면 내 선량함을 이용해 뒤통수를 치려고 할 거다.

녀석은 그런 녀석이니까. 고독으로 인해 한 방 먹은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 지금은 나를 경외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 녀석이 자존심을 회복하면 나를 큰 그릇이 아니라 뭣 모르는 호구새끼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거기에 나는 모용세가를 의심하고 있는 상황.

그 모든 것들이 맞아떨어지는 때가 있다면…….

죽음을 위장한 고독이 다시 활동하는 건 바로 그 순간이다.

* * *

의맹회의의 시작은 화려했다.

무한성주가 의맹회의를 구경하고 싶다며, 다시 올 때까지 코끼리들을 맡아달라고 한 덕분에 태양의원은 코끼리들을 개막행사에 이용할 수 있었다.

이용이라고 해봤자 코끼리들이 이번 회의에서 다루는 의학 의제들을 벽보처럼 걸고 마을을 한 바퀴 돈 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분위기를 끌어올리기에는 충분했다.

태양의원의 의원들은 그간 연구모임에서 얻어낸 성과들을 발표했다.

발표장마다 중원 전역에서 몰려든 의원들이 자리를 비집고 들어갈 정도로 사람이 몰렸다. 보통 의원은 생업을 유지하기 바빠 연구에 힘을 쏟을 수 없어, 대문파의 연구회에 비싼 돈을 내고 참석해야 조금이라도 배움을 늘릴 수 있었다.

하지만 태양의원에선 자신들의 연구실적을 약간의 참가비만 받고 공개했다.

그리고 그들을 태양의원 자유연구회의 회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어떤 문파 소속이든 가입이 가능하고 연구에 참여할 수 있으며, 정기적으로 연구 보고서를 받을 수 있는데 그 금액이 합리적이어서 회원 신청이 쇄도했다.

태양의원의 기발한 의료도구를 전시하고 시연하는 자리에는 의원 외에도 태양의원과 거래를 트고 싶은 상인, 그저 진기한 의학기술이 흥미로운 일반인까지 몰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장 의원은 장중경의 유산 중 굳이 태양의원이 독점한다고 큰 이득이 되진 않을 만한, 그러나 현재 통용되는 제약기법보다는 발전한 기법 몇 가지를 정리해 나누어주었는데, 그 엄청난 줄을 세우고 관리하느라 표사들이 애를 먹었다.

한 의원은 아예 한편에 자리를 차려놓고 태양의원 가맹을 원하는 이들에게 상담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한산한 거 같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체가 노출되지 않게 가리고서 하나둘 찾아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걸 본 금리가 아예 태양의원 뒤편에 천막을 쳐놓고 상담을 받게 하자 그 숫자가 열 배로 늘어 한 의원 외에 다른 가맹의원들까지 상담에 나서야 할 정도였다.

태양의원이 판매하는 약은 몇 달 치 재고까지 불티나게 팔려나갔으며, 참석한 의원들이 자원봉사로 환자를 보는 천막에는 의원도 사람도 가득해 오히려 침상이 부족할 정도로 문전성시였다.

환자들이야 공짜로 진료를 받을 수 있으니 당연히 붐비는 것이겠지만, 사실 의원들은 구태여 무료 봉사를 할 이유가 없었다. 기존에 소림 등에서 의맹회의가 열렸을 때도 비슷한 기획을 했지만, 정작 진료를 할 의원의 숫자가 부족해 흐지부지되고 만 전적이 있었기에, 의맹회의에 주기적으로 참석했던 이들은 태양의원이 헛짓거리를 한다며 비웃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봉사에 참여한 이들은 무당신의의 특강에 참석할 자격이 주어졌다.

지원자가 몰릴 것을 대비해 그들의 봉사 실적을 점수화하고 상위 이십여 명만 참석할 수 있게 제약을 두었으니 의원들이 눈에 불을 켜는 것은 당연지사.

거기에 일찌감치 상위권에 들지 못하는 이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어느 정도 점수만 넘기면 민초신의의 대담에 참석할 수 있게 해두었다.

제법 열심히 해야 최저선을 넘길 수 있었기에 모두들 열정 어린 태도로 환자를 보았다.

재밌는 건, 그곳에 태양의원 소속의 의원들은 한 명도 없었음에도 환자들 모두가 “태양의원이 정말 좋은 일을 하는군.”이라고 말했다는 거다.

재주는 곰이 넘고 공은 태양의원이 받는 상황이지만 정작 봉사에 나선 의원들도 불만이 없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win―win이랄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말이 의맹회의지, 거의 태양의원 중심의 축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그 분위기는 의맹회의 본회의장에서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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