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307화 (307/350)

307화

의맹회의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청성의 대제자가 만남을 요청했기에 나는 흔쾌히 시간을 내어 그를 만났다. 그리고 청성에게 태양의원을 견학시켜 주었다.

그들은 태양의원의 진료체계와 의학당의 시스템 등에도 관심을 보였지만, 그보다는 의약당과 태양의원을 구성하는 소소한 요소들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정말 놀랍습니다. 병실에 태양석을 깔아놓는 것만으로도 환자의 상태가 완화되다니.”

“체온 유지가 중요하기 때문이죠. 체온이 떨어지면 각종 증상이 나타나고 병이 악화되지만, 정말 아프면 사람의 기는 그 아픈 곳으로 쏠리기 때문에 정작 체온이 떨어져 연쇄작용이 일어납니다. 이를 외적으로 보완해주면 치료에 한결 보탬이 됩니다.”

“아아, 어떤 것인지 알겠습니다. 약한 주화입마에 걸린 사제가 있었는데 그도 체온이 갑자기 내려가더라고요. 그런 경우에도 쓸 수 있을까요?”

“충분히 응용 가능할 겁니다.”

사실 그 방법은 생각 못 해봤는데. 나는 대단한 힌트를 준 청성의 대제자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태양의원의 병실 바닥에 깔린 태양석은 얼마 전 남해태양궁으로부터 들여온 것들이다.

내 태양보도에 쓰인 것 같은 특상품은 아니고 남해에서는 딱히 태양석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하품인데, 그걸 태양의원에 팔아달라고 요청했다.

남해로서는 어차피 만년설석을 거래하느라 사람이 오고 가는 마당에 굴러다니는 돌덩이나 마찬가지인 걸 돈 주고 사겠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그 결과 대량의 태양석이 병실 바닥을 따끈하게 채우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하품이면 충분했는데 남해에선 최상품 아니면 별 쓸모도 없다며 중품 이상의 물건을 잔뜩 안겨줘서, 병실을 깔고 품질이 좀 떨어지는 남은 건 태양객잔에 주었다. 그것도 손님들에게 꽤 호평이라나.

이게 약한 주화입마를 치료하는 데 보탬이 된다면 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겠지? 그게 아니라도 군불 땔 필요 없이 따끈한 태양석은 꽤나 수요가 있을 거다. 남해랑 독점 계약을 맺어두길 잘 했다.

“그리고 이건 정말 탐이 납니다. 이름이 냉장고라고요?”

태양석 바닥에 이어 청성 대제자가 눈을 빛낸 건, 북해빙궁의 만년설석으로 만든 냉장고였다.

이 또한 극상의 냉기를 가진 최상급 만년설석이 아니라 중상품으로 만든 건데, 남해처럼 거저 주진 않았지만 그 값어치를 톡톡히 하는 물건이었다.

“이걸 쓰면 약은 물론, 음식도 오래도록 신선하게 보관이 가능하다니. 폐관에 들어갈 때 여기에 식자재를 가득 채워 들어가면 몇 달이고 걱정이 없겠습니다. 벽곡단이 있긴 하지만 솔직히 젊은 혈기에 벽곡단이 성에 차겠습니까? 하하.”

태양의원에서는 식품보다는 약을 보관할 때 쓴다.

밀봉하지 않아도 제법 오랜 기간 품질을 유지해주는 건 물론, 상온에서는 쉽게 변질되는 약침용 약액을 보관하기에 더없이 좋은 물건이니까.

바로바로 쓸 분량을 보관하는 소형 냉장고가 각 병동 앞에 비치되어 있고, 의약당에는 아예 크게 냉동창고를 지어주었는데, 그게 얼마나 좋았는지 장 의원이 내 앞에서 반 각 동안 춤을 출 정도였다.

그의 말대로 폐관 수련에 쓰기도 좋겠다. 요새 이런저런 비용이 늘어서 흑자 폭이 아슬아슬할 정도로 줄어들었는데 이걸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만년설석은 독점계약을 맺진 않았지만, 사실 우리 외에는 중원과 거래할 생각이 없으니 독점 계약이라고 봐도 된다.

“태양의원에도 귀한 물건이니 비싼 값을 치른다 해도 내어주기는 힘드시겠죠?”

“뭐, 이런저런 애로사항이 있긴 합니다. 만드는 것도 그렇고요. 그냥 돌을 깎아 만든 것 같지만 나름 기를 품고 있는 돌이라 내공을 싣지 않으면 가공 자체가 불가능하고, 기가 유독 농축된 부분을 살리는 등, 좀 까다롭죠.”

이걸 가공한 건 신 금가장의 금왕공방 분점의 장인들이었다. 의맹회의 때 참석자들에게 선보이려고 금손 누님을 달달 볶았는데, 다행히 제때 물건이 나왔다.

그러니까 물건만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 가공도 우리를 통해야 한다는 거다.

그 희소성이 오히려 청성 대제자의 마음엔 불을 붙인 것 같았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너무 터무니없는 금액만 아니면 얼마든 지불할 용의가 있고요.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태양의원을 둘러본바, 이런 곳을 만든 금 의원님이 터무니없는 금액을 부르시진 않을 거 같습니다. 하하.”

“이번 의맹회의가 잘 끝나면 생각해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끝나지 않겠습니까? 이 태양석 바닥이며 냉장고도 그렇지만, 의약의 수준이며 규모, 체계까지, 저는 부족한 부분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걸 보고도 태양의원에 정회원의 자격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다 눈이 삔 걸 겁니다.”

“장문인의 허락 없이 결정하셔도 됩니까?”

“아마 장문인께서도 직접 와보셨다면 그러셨을 겁니다. 제가 잘 설득하면 됩니다.”

나는 빙긋 웃었다. 청성의 대제자는 우리 쪽으로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 전권을 받은 건 아닌 거 같은데, 장문인의 결정을 거스르겠다 하는 걸 보면 상당한 영감을 주긴 한 모양이다.

청성 대제자를 만난 후엔 금리를 만나러 갔다.

“청성을 만난 일은 어찌 되셨습니까.”

“잘됐어. 대제자가 태양석과 냉장고를 원하던데, 한번 타진해봐.”

“그 정도로 청성에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랑 손을 잡는다는 건 무당의 손을 놓는다는 건데, 그만큼 무당에 아쉬운 것도 두려울 것도 없다는 거잖아. 특히 무력적으로 꿀릴 게 없다는 거지. 우리로서는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거 없어.”

“무당만큼이나 거리가 가깝기도 하지요.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가 되겠군요.”

“현건이 생각보다 잘해줬어. 연기 같은 거 못할 줄 알았는데.”

원래 청성 제자들을 마중 나가는 것부터 내가 하려고 했는데, 현건이 자기한테 맡겨달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나는 너무 바쁘니까 그런 일이라도 나눠 하고 싶다나.

“현건 소협은 정도를 수호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없는 말을 꾸며낸 것이 아니라 태양의원을 있는 그대로 설명했을 테니, 그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상하다.

왜 현건에 대해 말하는 내 조카의 뺨이 살짝 붉어진 거지?

그냥 일이 바빠서 뛰어다니느라 그런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아까까지 괜찮았는데?

조카의 연애사정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사이에 내 조카사위 후보군에 큰 변동이 생긴 건가?!

창천 이 녀석, 일부러 두고 갔더니 그 잠깐 사이에 왜 밀리고 있는 거야?

“크흠, 어쨌든 청성을 설득했으니 우리가 한 표 차이로 이기는 거지?”

갑작스러운 조카사위 순위변동에 조금 당황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런 쪽에 신경을 쓸 계제가 아니었다.

“예, 그렇습니다. 별 이변이 없다면 그럴 겁니다.”

원래는 남해만 데려와도 우리가 이기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무당 또한 우리처럼 그간 의맹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청성을 끌어들였다. 거기에 기존에 참석하지 않았던, 표를 가진 문파와 세가들을 물밑에서 열심히 설득하고 있으리라.

“안정적으로 한 표 정도 더 획득하면 좋겠는데.”

확실히 이겨야 했다. 기왕이면 압도적인 표차일수록 좋다.

그래야 그 뒤의 일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테니까.

“그보다는 지금 확보한 표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건 그래. 아미파 대표 분위기가 좀 애매하다고 했지?”

“좀 전에 양진, 양원 스님께서 설득해보겠다 가셨습니다. 의약당으로 데려가 산후풍에 쓰이는 궁귀조혈음이라는 약을 보여드리면 될 거 같다 하셨습니다.”

“아미파 대표가 그쪽에 관심이 많나 보네. 장 의원님 실력이면 충분히 설득되겠지.”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또 걱정되는 곳은?”

“저는 모용세가가 신경 쓰입니다.”

모용세가.

그들도 이번 의맹회의에 참석했다. 대표로는 당연히 모용을이 왔다.

소림에서 일어난 참변에 대해, 모용세가는 일정 부분 사실임을 인정했다.

모용갑이 혈교에 빠져 일을 벌였고, 이에 관해 모용가주는 아는 바가 없었으나, 모용가의 핏줄이 일으킨 사달에 대해 소림에 사과한다는 내용이었다.

사과도 말뿐인 사과가 아니라 제법 많은 재물을 무림맹 사절에 들려 돌려보냈다.

솔직히 죽은 자식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내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오히려 죽은 자식이니까 더 성을 내야 하는 게 보통의 부모가 아닐까?

나는 그게 산 자식을 위해서라고 판단했다.

적장자는 죽고 서자인 차남은 무림맹에 구류되어 있는 상태. 아무리 요녕의 패자라지만 무림맹에 쳐들어가 차남을 빼내기엔 곤란한 부분이 많았다.

거기에 들어보니, 아무리 세가 약해졌어도 소림은 소림이라, 맹 내에서도 해당 사건에 분개한 이들이 많아 쉽게 넘어가지 말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단다.

소림에 건넨 돈은 피해보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용을의 몸값이었던 거다.

그렇게 몸값을 주고 풀려난 모용을은 의외로 요녕으로 돌아가지 않고 무림맹에 남았는데, 그런 녀석을 의맹회의에 오라고 부른 것은 나다.

녀석에겐 사천당가의 고독이 심겨져 있는 상태. 모충은 내 안에 있으니, 죽고 싶지 않다면 녀석은 내 말을 들어야 한다.

그 사실을 모른다면 모용세가가 우리 편을 든다고 확신하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금리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건, 이 녀석을 비장의 한수로 쓰기 위해서였다.

적을 속이려면 내 편부터 속이라고 하잖아?

……뭐, 금리에게 항상 떳떳하고 바른 길만 가는 삼촌처럼 보이고 싶어서도 있지만.

“녀석에 대해선 걱정 안 해도 괜찮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번 보고 올게.”

금리와 다른 세세한 부분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나는 모용을을 만나러 갔다.

녀석이 머무는 곳은 태양의원의 특실 중 가장 넓고 좋은 곳이었다. 데리고 온 무인들의 숫자가 손에 꼽는데 방이 몇 개나 있어서 오히려 방이 남아돌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은 방에 머무는 모용을은 똥 씹은 얼굴로 나를 맞았다.

“……무슨 일이냐.”

“인사하러. 손님이 오셨는데 주인이 얼굴도 안 비치면 안 되잖아? 잘 지냈어? 표정은 왜 그래, 어디 안 좋나? 손 좀 줘봐. 맥 좀 짚어보자.”

녀석은 표정을 더욱 구겼지만 오만상을 하고서도 내게 순순히 손목을 내주었다.

살짝 기를 흘려보내자 녀석의 몸 안에 있는 고독이 반응했다. 놈이 꿈틀거리는지 모용을의 표정이 더욱 기괴해졌다.

“크게 아픈 덴 없네. 다행이다. 그래도 우리가 같은 비밀을 공유하는 입장인데, 네가 잘못되면 꽤 섭섭할 거야.”

녀석과는 전생에서부터 악연이었다. 그때는 녀석이 갑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갑의 입장. 아마 녀석이 내 전생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전생과 달리 역전된 이 상황에 혈압이 올라 뒷목 잡고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래, 무당파랑은 어디까지 얘기해봤어? 녀석들이 고독을 제거해주겠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