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305화 (305/350)

305화

태양의원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이제는 나의 외유가 익숙한 북촌 주민들도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우지 않고 잘 다녀왔냐 인사를 건넨 후 갈 길을 갔다.

그렇다고 환영을 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삼촌. 삼촌의 결재를 기다리는 일이 많습니다. 조금 휴식을 취하셨다가 업무를 진행해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아이고, 금 의원님! 이제야 오셨습니까?! 사대신의가 둘이나 있는데도 꼭 금 의원님에게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드러누운 환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환영 맞지?

물론 그들이 나를 반기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내가 와서 서둘러 일 처리를 해주기를 더 바란 거 같긴 했다.

“이눔시키야, 다녀오는 거면 다녀오는 거지! 애를 왜 이 지경을 만들어놨누! 으이그, 옛날 거지 꼬라지 할 때하고 낯빛이 똑같네.”

이건 환영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했지만, 장 의원이 우리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버선발로 뛰어나온 건 사실이었다.

장 의원은 신생의 상태를 보고 혀를 찼고 당장 해독약을 지어보겠다며 다시 제약당으로 뛰어갔다.

나는 민초신의와 무당신의, 두 사대신의를 불러 신생을 부탁했다.

오는 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우리가 탄 마차에는 사천당가와 제휴해 얻어낸 비전 일부가 실려 있었는데, 나는 그 내용을 독파하며 신생에게 도움이 될 것들을 추렸고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했다. 이제 홍령이 없어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기에, 이제 몇 달 푹 요양을 시키는 거 외에 더 이상 묘수가 없었지만, 뭐라도 더 해주고 싶은 게 스승의 마음 아닌가.

먀아악―!

진짜 나를 맹렬하게 반기는 존재도 있었다. 금동이였다.

녀석은 내가 들어서자마자 털을 삐죽 세울 정도로 놀라더니, 이내 울며 달려와서는 머리와 턱을 마구 비볐다.

“두고 가서 서운했구나? 힘들까 봐 안 데려갔는데 같이 갈 걸 그랬다. 거기서 네 어머니를 만났거든.”

사실 금동이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 같았다. 천랑호표의 냄새가 나는지 지금껏 들어본 것보다 훨씬 큰 소리로 고롱고롱 울어댔으니까.

“덕분에 일이 잘 풀렸어. 이따가 맛있는 거 줄게.”

천랑호표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며, 남해태양궁주가 남해의 물소를 잡아 말린 육포를 산더미처럼 챙겨주었다. 아마 금동이도 좋아하리라.

“일이 그렇게 되었군요. 놀랍습니다. 한을 통해 받은 만년설석을 보내길 천만다행입니다.”

반나절 정도 휴식한 후, 금리에게 보고를 받기 전 사천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요약해 들려주자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던 금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곤경을 겪을 뻔했다는 사실이 썩 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거래는 빙궁에 연락을 해서 준비해줘. 나머지는?”

“기존에 말씀하신 대로 착착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금리가 내게 고급스러운 서찰 한 통을 내밀었다. 서찰을 펼치자 무당 장문인의 직인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거추장스러운 여는 말과 맺음말을 제외하고 나면 서찰의 요점은 하나였다.

의맹회의 개최지와 개최일 확정.

“언제 온 거야?”

“어제 막 도착했습니다.”

“칠 주 후라. 아슬아슬하겠는데.”

칠 주, 그러니까 대충 오십여 일이다.

이런 거 준비할 때는 보통 두세 달 정도는 시간을 확보해주지 않나? 그냥 당사자들이 모여서 얘기하고 끝나는 행사도 아닌데, 고작 오십 일이라니.

어떻게든 준비를 허술하게 만들어 나를 물 먹여 보겠다는 무당의 악의가 서찰 너머로 전해지는 거 같다.

“걱정 마십시오. 늦지 않게 준비될 겁니다.”

금리가 자신 있게 말했다.

* * *

태양객잔의 주인이자, 하오문 북촌지부장인 사내는 최근 기분이 무척 좋았다.

물론 그 전에 기분이 별로였다는 뜻은 아니다. 근 2년 사이에 그의 인생은 엄청나게 좋은 쪽으로 변화했으니까. 거기에 하나 더 좋은 일이 생겼다는 거다.

‘흐흐흐, 북영이라. 그게 내 별호라 이 말이렷다!’

그랬다. 그에게 생긴 좋은 일은 바로 별호였다.

그간 북영은 자신의 이름을 잘 말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그냥 객잔주인, 혹은 점주 등으로 불렀고, 술에 취한 뜨내기들은 그를 점소이로 착각하거나 절름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심지어 제 객잔에 태양이라는 이름을 준 금태양도 그의 이름을 잘 몰랐다.

그 전에는 그저 객잔주인이라 불렀고, 하오문의 일원이 된 이후로는 지부장이라 불렀으니까.

물론 그게 나쁜 건 아니었다. 금태양은 자신이 일개 객잔 주인일 때부터도 한 번도 그를 낮춰 부르거나 얕본 적이 없었다. 그저 저가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고, 이름까지 부를 정도로 친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도 당당히 알려줄 수 있는 이름이 생겼다.

‘사람 이름이 팔돌이가 뭐냔 말이다, 팔돌이가. 아무리 여덟째로 태어났다고 해도 팔돌이는 좀 아니지!’

부모가 여덟이나 되는 자식을 낳았기에 벌어진 참사였다. 그나마 자신이 마지막이었으니 망정이지, 제 뒤로 막내가 태어났으면 어떤 이름이 나왔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새로운 이름은 사실 이름이 아닌 별호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오문 내에서 쓰는 암호명이라고 할까?

어차피 하오문의 암호명은 곧 그 사람의 별호가 되기에 별반 차이가 없긴 했지만, 그간 지부장에 임명됐는데도 별호를 받지 못했던 그에게 북쪽의 그림자라는 뜻을 가진 그 별호가 가진 의미는 남달랐다.

‘이게 다 금 의원님 덕분이지. 이번에 태양의원에서 의맹회의를 개최하니 내게 별호도 주어진 것이다.’

금태양의 덕을 본 것이야 두 손 두 발을 다 동원해도 꼽지 못할 정도지만 이번 일의 인과관계는 확실했다.

애초에 금태양에게 정보를 주느라 이 작은 동네에서 지부장이라는 자리를 받은 거다.

거기에 의맹회의라는 거창한 행사까지 열리자 하오문에서는 주루와 기루 하나씩을 북촌에 내기로 했고, 북촌 지부가 정말 최소한의 지부 규모를 갖추게 되자 지부장을 칭할 이름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북영은 금태양이 실질적인 하오문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기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고.

사실은 금태양이 매번 지부장의 이름도 모른 채 부려먹기가 뭐해서 별호를 하나 내려주라고 은 파파에게 부탁한 것이지만, 그 진실을 북영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진실을 알게 되면 더 감격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북영은 앞으로도 태양의원과 금태양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게 북영이 북촌 어귀에서 이처럼 어슬렁거리고 있는 이유였다.

북촌 어귀는 전날과 달리 오고 가는 사람들로 매우 붐볐다.

태양의원의 성장과 함께 북촌 또한 준 도시 규모로 성장했지만, 그럼에도 대도시에 비하면 아직은 한적한 시골마을이나 다름없어 사람의 유입이 왕성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의맹회의 개최 삼 일 전.

미뤄졌던 의맹회의가 새로이 떠오른 신성, 태양의원에서 열린다는 소문에 중원 각지에서 사람들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거기에 한 달이라는 짧은 준비기간 때문에 아직도 필요한 물자가 태양의원에 도착하는 중이라, 지금 마을 어귀는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끝없는 표물의 행렬, 멀리서 찾아온 의원과 환자들, 이때를 노리고 몰려든 장돌뱅이들까지 뒤엉켜 대도시의 시전을 방불케 했다.

그중에서 북영은 그가 찾던 이들을 발견했다.

푸르른 복색에 푸를 청자를 수놓은 건을 두른 무인들.

청성이다.

“아이고, 어서 오십쇼.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대가 우리 청성의 안내인인가?”

“예이, 그러믄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길이 많이 붐비지요. 제가 아주 한적하고 여유로운 길을 압니다.”

북영은 서둘러 청성의 무인들에게 다가가 대로에서 빠져나가는 샛길로 그들을 안내했다. 어귀가 거동하기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붐비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청성의 무인들은 북영의 인도를 따라 샛길에 접어들었다.

태양의원으로 가는 직선경로가 아니라, 원래 북촌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는데, 길이 이리저리 꼬인 데다 대로처럼 돌로 포장되어 있지 않아서 이 길을 타는 사람이 없었다. 청성의 무인들이 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촌이라고만 들었는데 생각보다 큰 마을이군. 그대가 아니었으면 한참을 틈바구니에 끼어 가야 할 뻔했네.”

“아무렴요. 그러니 제가 이리 여러분을 마중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북영은 뻔뻔하게 청성 무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저 멀리 대로 쪽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자를 살폈다. 그는 북영이 청성 무인들을 빼돌린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가시지요. 쉴 곳으로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요.”

청성의 무인들도 원래 그들을 마중 나오려 한 안내자가 멀어지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른 채 북영의 뒤를 따랐다.

“대사형, 사람도 많은데 땅이 제법 윤택해 보입니다.”

“그래. 무당산이나 숭산에 가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여기도 견문을 넓히기에는 나쁘지 않은 것 같구나.”

의맹회의 때문에 태양의원을 찾은 청성의 무인들은 청성의 삼대제자였다.

원래는 이대제자급이 가야 하는 일이 맞지만 청성의 장문인은 이번 회의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무림맹 회의도 아니고 의맹회의가 아닌가?

청성은 의술에 대한 조예가 깊은 문파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의술은 수련과 비무로 인한 상처를 응급처치 할 수 있는 수준이면 족했다. 의술을 파고들 시간에 차라리 무공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는 게 청성의 기조였다.

정말 중한 병이나 심각한 상처라면 인근 대문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게 무당이었다. 거리도 가깝고, 현 무림에서 무당만큼 실력이 있는 의문도 없으니까.

물론 그럴 경우 자파의 내가기공을 파헤칠 수 있다는 위험이 있긴 했지만, 어차피 청성과 무당은 같은 도가 내가기공에 뿌리를 두고 있어 사실상 그걸 위험이라 부르기도 뭐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인해 청성은 그간 의맹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무림맹 회의와 같이 열리니 중요한 안건이라면 한번 얼굴이나 비치는 정도일까.

거기에 이번처럼 중대 안건도 없고, 심지어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어중이떠중이가 정회원이 되겠다며 설치는 일에 참석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아마 무당이 꼭 참석해서 표를 행사해 달라 요청하지 않았다면 청성은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깊은 인연을 가진 무당이 요청했기에 청성의 장문인은 삼대제자들만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간 이대제자 없이 출도한 적이 없는 그들에게 경험을 쌓아주고자 한 일이었다.

만약 이대제자가 함께 있었다면 마중을 나왔다는 북영이 무당에서 온 안내인이 아님을 빠르게 알아차렸겠지만―

“근데 사형, 여기 좀…… 심하게 윤택해 보입니다?”

청성의 삼대제자들은 안내인의 정체를 의심하기는커녕 전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다.

마을로 들어가는 옛길은 북촌의 밭을 빙빙 돌아 들어가는 길.

추수 때를 맞은 황금빛 밀밭이 길 양옆으로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