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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304화 (304/350)

304화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라고 하면 별일 없었던 것 같지만, 사실 매일이 정신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전쟁만큼이나 전후복구가 힘들고 어려운 것처럼.

당가주가 사용한 극독으로 인해 당당과 당철은 당가타를 빠져나온 직후 혼수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다행히 당당은 반나절 후 정신을 차렸다. 당랑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독을 전부 뒤집어써 그 영향이 적었던 모양이다.

정신을 차린 당당은 며칠은 요양해야 한다는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장 먼저, 성도 성주를 찾아갔다.

“대체 여기서 뭐 하심?”

“사, 삼 공자? 여긴 무슨 일로?”

성도 성주는 성도에서 떨어진 별장에 있었다. 우리가 들이닥쳤을 때는 옆에 기녀를 끼고 저를 따르는 관리들과 술자리를 즐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우리에게 버럭 성질을 내려다 당당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 성도에 난리가 났는데 몰랐음? 왜 코빼기도 안 비치는 거임?”

“난리라니, 당가주께선 어찌하고 계신 거요? 그분께서 내가 필요하다 하시오?”

그 말에 당당이 폭발해서 성치도 않은 몸으로 상을 죄다 뒤엎어버린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사천이 당가의 손아귀에 있다는 말은 들었다만, 성주라는 작자가 모든 일을 당가에 맡기고 저리 방만하게 일하고 있을 줄이야. 사천당가가 아니라 거의 사천당궁이었군.”

얘기를 전해 들은 남해태양궁주가 코웃음을 쳤다. 내 일도 아닌데 솔직히 좀 쪽팔렸다. 원래대로라면 관과 무림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건지.

어쨌든 당당의 분노에 성도 성주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부랴부랴 성도로 복귀했다. 그리고 당가에서 일어난 참상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대체 이게 어찌 된―.”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까? 당당이 당신을 서둘러 데려온 게 그러라고는 아닐 텐데요?”

당당은 당가 식솔들과 불길, 독에서 살아남은 당가의 비전들을 다른 장원으로 옮기느라 내가 성도 성주의 옆에 붙었다. 나도 당당을 따라가려고 했는데, 여기 남길 잘했군.

“관군을 동원해 불탄 잔해를 정리하고, 피해를 집계하고, 집을 잃은 이들을 돌보세요. 성주의 일을 하란 말입니다.”

아무리 성도가 사천당가의 손에 있다고 해도 관군을 움직이려면 성주가 필요했다.

거기에 당가타가 그렇게 전소되고, 당가주가 공멸을 꾀하며 독을 퍼트렸다는 사실이 암암리에 퍼지며 사람들이 당가를 보고 흰 눈을 뜨고 있는 상황. 여기서 피해복구를 하겠다며 당가가 전면에 나서봤자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는데 어찌―.”

성주가 난감한 눈으로 내 눈치를 보았다. 하아. 대체 이런 한심한 작자가 어찌 성주가 됐는지. 죽은 당가주가 부리기 쉬운 자를 성주로 올리기 위해 로비라도 한 건가?

“돈이라면 당가가 내기로 했습니다.”

아니면 눈치가 빠르고 연기를 잘하는 건지도 모른다.

재난에 대한 복구는 그 자체로 돈이 어마어마하게 드는 일이다.

세금 일부를 당가가 거두고 있었던 상황이니 성도에 돈이 얼마나 있을까.

성도 성주는 자신이 유용할 수 없는 돈이 없으니 못 하겠다고 드러누웠다. 제 사비는 풀지 못하겠다는 뜻.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이미 당당과 말을 끝내 놨다.

“돈과 재물, 거기에 당가의 무인들도 몸을 추스르는 대로 복구에 앞장서기로 했습니다. 원인제공도 당가가 했고, 가장 큰 피해도 당가가 봤으니.”

“허나 당가의 재물은 저 당가타 안에 있었을 텐데, 어떻게?”

“누가 계란을 한 판 안에 모아둡니까?”

당당이 식솔들을 인솔하여 이동한 장원을 포함해 사천에 있는 당가 소유의 장원만 스무 개가 넘고 곳곳마다 재물이 비축되어 있단다.

“물론 그만한 금액을 일시에 지급하기는 어렵다 합니다. 장원 몇 개를 처분해야 하는데 그런 게 하루 이틀에 팔리는 게 아니니.”

“허면?”

“삼분지 일은 보름 내로 전달할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간 당가가 세금과 함께 거둬왔던 보호세, 그걸 성도에게 돌려줄 겁니다. 그거면 충분하고도 남을 겁니다.”

“헉……!”

“물론 그간 지나치게 많이 걷어온 감이 있으니, 성주께선 그 절반만 걷어도 될 겁니다. 돈은 성도에 가나 권한은 여전히 당가에 있으니 잘 쓰셔야 할 거라고 전하더군요.”

“무, 물론입니다. 그렇게 자본이 주어진다면야, 못 할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럼 왜 아직까지 여기 계신 겁니까?”

내 말뜻을 알아차린 성도 성주가 서둘러 주변 관군들에게 명을 내렸다. 돈과 인력이 생겼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을 거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바지사장인 줄 알았던 성도성주가 맡은바 일은 그럭저럭 해낸다는 점이었다. 중간에 재물을 착복할까 내가 수시로 찾아가 감시했는데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대체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임? 돌아가셈.”

나는 당당으로부터 축객령을 받았다.

“애초부터 의맹회의 때문에 온 거였잖음. 남해가 태양의원 편을 들 테니 이미 목적은 달성했고, 무도 돌아갔음. 안 그럼? 돌아가서 의맹회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음?”

“그쪽은 리가 잘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그냥 머무는 게 아니라 널 돕고 있잖아? 신생도 좀 더 요양해야 먼 길 갈 수 있을 거고. 아직 우리 계획을 발설한 자들을 찾지도 못했―.”

“안 그래도 그자들, 어젯밤 찾아서 처리했음.”

“엥?”

“거지들이었음. 개방 방주가 소홀한 사이 아버지가 사천지부를 손에 넣었었나 봄.”

녀석은 전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얼굴로 내게 몇 가지 서류를 내밀었다. 개방의 암호로 되어 있었지만, 도개걸과 정보를 주고받게 되면서 신생에게 이를 배웠기에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다행히 하오문은 결백하군.”

이 일을 전하면 도개걸이 펄펄 날뛰긴 하겠다만, 내게 최선의 호의를 보여주었던 하오문 사천지부장을 단죄하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이었다.

“신생은 조금 무리겠지만, 여기보단 태양의원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나을 거임. 시설도 좋고, 장 의원이라면 더 좋은 약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음.”

“……진짜 내가 가도 괜찮아?”

사실 나도 지금쯤 돌아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이처럼 멀리까지 와서 뭐 하나 제대로 얻어가는 게 없다는 느낌이 발목을 잡았다.

당당이 말했던 것처럼, 애초에 계획했던 의맹회의를 위한 표는 확보했지만, 사실 그게 뭐 얼마나 중요한가.

생때같은 제자는 사경을 헤매다 겨우 정신을 차렸고, 나를 믿어주는 친구는 많은 것을 잃고 그보다 더 무거운 것들을 어깨에 짊어졌다.

지금껏 이보다 더 힘든 역경도 거쳐 왔지만 그건 대부분 내가 위험하고 내가 대가를 치렀던 것들이었고, 이를 보상할 만한 결과물들을 받았는데.

……차라리 내가 힘들었으면.

그러면 훨씬 견딜 만할 텐데.

“난 괜찮음.”

“당당.”

“그러니까 너는 돌아가, 네 자리로 가셈.”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눈은 굳건했다.

분명 내가 사천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녀석은 소년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이로만 따지면 엄연히 청년과 소년의 경계에 있는 어린아이였다.

아직은 철없는 실수로 인생을 배워가야 할 나이에 녀석의 어깨엔 사천당가라는 거대한 짐이 올라갔고―.

“지금까지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함. 너는 정말, 최고의 친구임.”

녀석은 그 무게를 짊어지기 위해 소년의 미소를 버리고 사내의 얼굴을 갖췄다.

괜히 마음 써서 더 머무르는 건 녀석의 결심을 되레 욕보이는 일일 터.

“당당, 아니, 사천당가 가주대행에게 제안을 하나 하겠어.”

녀석은 가주대행의 자리에 올랐다.

당가주, 그리고 차기가주였던 쌍둥이 중 당랑이 죽었다.

남은 것은 당철 하나였으나 그는 극독의 후유증에 형제의 죽음까지 겹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

살아남은 원로들은 그 뒤에 나와 남해의 힘을 업은 당당을 가주 대행으로 밀었다. 사실 말이 대행이지 가주의 권한 대부분이 당당의 것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 혼란이 수습되면 당철에게 가주 자리를 이양받게 되겠지.

“제안? 뭐임?”

“당가의 비전 일부에 대해 제휴를 하고 싶어. 특히 독과 해독제에 관한 것.”

“금태양, 너―.”

“그냥 달라고는 안 하겠어. 가치에 상응하는 비용을 지불하지. 당가 살림에 보탬이 될 정도는 될 거야.”

원래대로라면 말도 안 되는 제안이다.

그 어느 문파가 제 비전을 타인에게 넘기겠는가.

하지만 이런 제안을 한 데는 이유가 있다.

“……확실히, 지금 당가의 상황에서 모든 비전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함.”

이건 실질적인 문제였다.

불길과 독, 그리고 잔해 속에서 최대한 비전을 건져냈지만 물리적으로 보관할 공간이 부족했다. 원래 이를 보관하던 당가타가 워낙 넓었으니까.

장원이 스무 개가 넘지만 그곳에 나눠 보관하자니 이를 지킬 사람이 부족했다. 당장 당가는 재건에 쓸 손도 부족한 상황. 비전의 유실은 피할 수 없었다.

허술한 감시를 뚫고 유출되거나 관리가 부실해 사라지거나.

그런 상황에서 내가 제휴라는 카드를 내민 것이다.

“일급 비전을 내어줄 수는 없음. 그것만큼은 안 됨.”

“나도 그렇게까지 바란 건 아냐. 이급, 삼급이어도 당가의 연구다. 제휴를 하기엔 부족함이 없어.”

비전이 유실될 위기의 당가는 비전을 구하고, 엄한 사람의 손에 독이 들어가지 않게 막을 수 있으며, 태양의원은 상대적으로 약한 독과 해독에 대한 연구를 빠르게 진전시킬 수 있다.

이건 떳떳한 거래였다.

곤란한 지경에 빠진 친구를 두고 가야 하는 나의 죄책감을 덜고, 당당이 보다 가책 없이 내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건 부차적인 이득이다.

“좋아, 태양의원과 독에 대한 비전을 제휴하겠음.”

“현명한 선택이야, 가주대행 나리.”

우리는 즉석에서 계약서를 만들어 서로의 지장을 찍고 한 부씩을 나눠 가졌다.

그리고 녀석은 다시 전소된 당가타로 향했고, 나는 일행을 불러 출발을 준비했다.

무가 남해로 돌아갔기에 마차를 탈 필요는 없었지만, 신생의 몸 상태를 고려해 다시 마차를 마련했다.

우리가 돌아가는 날, 남해태양궁이 우리를 배웅하러 나섰다.

궁주는 일부 무인들을 데리고 복귀했지만 일 공자는 당당과의 친분도 쌓을 겸, 복구를 도우며 남해와 성도의 교류도 회복할 겸 남아 있었다.

“무와 천랑호표에게 안부 전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부탁하신 일은 걱정 마십시오. 남해의 대리인이 의맹에 표를 행사하러 제 때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일 공자는 대기하고 있던 마차의 말에게 다가가 한 마리씩 갈기를 쓰다듬으며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말들의 눈빛이 번쩍였다.

“우리의 친구들을 잘 부탁한다고 전했습니다. 가는 동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이미 한 번 그 위력을 보았기에 나는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윽고 출발하자, 말들은 힘 있고 빠르면서도 마차가 흔들리지 않게 달려 나갔다. 부드럽게 달려 나간 마차 너머로 씁쓸한 풍경의 성도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괜찮아질 거다.

병원을 제거하면 사람의 몸은 일시적으로 취약해지지만, 이내 곧 회복해 살아가듯이.

사람들이 사는 저 땅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씁쓸함을 삼키며 사천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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