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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303화 (303/350)

303화

밖으로 나가보자 당가타 방면에서 거대한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이렇게 빠르게 진행될 줄은 몰랐는데요.”

“네 녀석이 당가주 그놈의 본성을 잘 꿰뚫어본 게지.”

“그것도 그거지만, 저는 남해 무인들의 일 처리 속도를 칭찬한 겁니다.”

“그게 칭찬이냐? 그 정도는 기본으로 해야 하는 거다. 그 정도도 못 해서야 남해태양궁이라 할 수 없지.”

궁주가 콧대를 높였다. 그래도 다행이다. 남해 덕분에 확실히 피해를 줄일 수 있게 됐으니까.

“정말 혼자 갈 거냐? 우리는 이 정도만 하면 돼?”

“예, 충분합니다.”

남해는 이 이상 나서면 안 된다.

궁주는 남해에 만족하고 중원으로 진출할 생각이 없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으니까.

이 이상 남해가 두드러지면 누군가는 새외가 침략을 했다고 여길 거고, 또 누군가는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황실이나 당가 대신 남해가 자신들을 보호해주길 원할 거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

의원용 덧옷을 벗고 검을 챙겼다. 응급처치는 끝냈으니 더 이상 이곳엔 내가 필요하지 않다.

장원을 나서는 내게 큰 그림자 하나가 불쑥 달려들었다.

“천랑호표?!”

뭐지? 남해는 더 끼어들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 생각으로 뒤를 돌아보자 난감한 표정의 궁주가 나를 보고 크게 외쳤다.

“내가 보낸 거 아니다! 천랑호표가 너를 도와준다고 하니 감사히 여기기나 해라!”

이거 참, 난감한데.

천랑호표는 남해의 상징. 궁주가 없다고 해도 남해의 개입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천랑호표는 그런 인간들의 사정이야 알 바 아니라는 듯 내 몸에 고양이처럼 머리를 가볍게 쿵 박고는 제게 타라는 듯 갸르르 울었다.

……에라 모르겠다.

“잘 부탁한다. 가자!”

천랑호표의 등에 올라타자 남해의 신수가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그 속도가 내 신법을 상회할 정도라 다소 오싹할 지경이었다.

눈을 한 번씩 깜빡일 때마다 당가타를 집어삼킨 화마의 뜨거운 열기가 바짝 다가왔다.

화마에 집어삼켜진 당가타 앞에선 남해의 일 공자를 포함한 남해 무인들과 맹수 일부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일 공자!”

“왔습니까! 화약은 지시대로 터트렸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을 구하는 중입니다!”

당가주가 남해의 맹수들을 막기 위해 준비했던 화약.

그 화약은 곧바로 맹수들의 등에 실어서 당가타 앞으로 옮겨놓으라 부탁했었다.

그리고,

“당가주가 위협을 느끼면 독을 퍼트릴 거라 했던 당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졌습니다.”

성도 내에 준비되어 있던 화약을 본 순간, 나는 당가주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너무나도 약한 자다.

동시에 너무나 약하고, 또한 악하다.

아무리 성문 근처 외곽이라지만 준비된 화약의 양은 보통이 넘었다. 거기에 불을 붙였다면 성도의 사분지 일이 날아갔을 것이다.

남해를 막아낸다 하더라도 비난의 화살이 당가로 돌아갈 것은 명약관화.

그럼에도 당가주는 상관없는 것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작자다.

그런 자가 자신의 목숨, 명예, 가문의 명운이 경각에 달렸을 때는 어떻게 행동할까.

도주해서 재기를 꾀할 수도 있겠지만 당가 사람들의 ‘사천당가’에 대한 자부심은 보통이 아니다.

그만큼 집착도 강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멸을 택할 거라곤―.”

일 공자가 말을 흐렸다.

남해 무인과 맹수들이 구해낸 당가의 무인들은 지독한 상태였다. 독에 중독되어 호흡이 불가능한 자, 피를 토하는 자, 얼굴이 녹아들어 간 자 등.

당당을 통해 남해태양궁주가 무인들을 이끌고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거다.

당당은 당가주를 설득하려 들었겠지만 오히려 그 사실 자체를 위협으로 느꼈겠지.

타인을 모두 적으로 보는 자에게 친구라는 단어는 굴종처럼 들릴 테니.

그가 당가 직계도 버티지 못할 극독으로 당가와 남해의 공멸을 꾀하리라는 것은, 그런 인물상을 간파하고 있다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방법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다.

“당당은 아직인가……?”

물론 당당이 아니었다면 그것까지 추측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당가타는 천혜의 요새.

수많은 기관진식이 당가의 연구를 통해 개발된 극독을 머금고 있고, 남해의 무인들을 당가타로 끌어들여 일망타진할 생각일 거라는 말은 당당이 해주었다.

아무리 집안에서 내돌려졌어도 직계이기에 일반 당가 무인에 비해 아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독은 불에 약하다, 만약 극독이 퍼진다면 즉시 화섭자로 당가타를 태워버리라고 한 것도 당당이었다.

당가의 독이 친구가 될 수 있는 상대를 해치고 당가와 성도 사람들의 목숨을 앗는 걸 보느니, 당가 자부심의 총체인 당가타를 태우라고 한 녀석.

그랬기에 녀석을 믿고 보내주었다.

당가주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은 게 아니라, 설득하지 못해도 녀석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은 거다.

당가주가 준비한 화약이 거센 불길이 되고, 그 불길이 내부에서부터 피어오른 극독을 불살랐으며, 당가 사람들은 독과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겨우겨우 탈출해 남해의 도움을 받았다.

그럼에도 당당은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지? 뭐가 잘못됐나?

당가주가 직계에게도 위협적인 독을 쓸 게 분명하므로, 당가주가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일 시 곧바로 빠져나오기로 약속했다.

그게 아니라면 신호탄이라도 쏘기로 했다. 남해의 개입을 최소화하려 했지만 녀석의 목숨 앞에서 그런 건 차후의 문제였다.

그런데 빠져나오지도 않고 신호조차 없다니…….

“안 되겠습니다. 안에 들어갔다 와야겠어요.”

불길함이 엄습했다. 당가타에 들어가지 않기로, 기다리기로 약속했지만 도저히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안 됩니다. 당 공자가 말했습니다. 당신의 몸은 아직 회복이 덜 되었다고―.”

“그렇다고 여기서 죽치고 있을 순 없습니다.”

당가주의 지하뇌옥에서 당한 여파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나는 검을 뽑았다. 남은 반병의 해독제를 들이키고 옆을 돌아보았다.

그르릉―

솔직히 혼자였다면 아무리 당당이 걱정되어도 쉽게 진입할 마음을 먹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천랑호표가 있었다. 그리고 이 똑똑하고 현명한 신수는 내가 잘못되면 제 자식인 금동이에게 큰일이라는 듯, 내 옆에 바짝 붙었다.

“천랑호표 좀 빌리겠습니다!”

일 공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난 모른 척 그 등에 올라탔다.

남의 집안 신수를 험한 일에 부려먹자니 좀 미안하지만―

“부탁한다.”

나를 등에 태운 천랑호표가 크게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곧장 불타오르는 당가타를 향해서 바닥을 박차 날았다.

하늘까지 치솟은 화염 속을 통과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뜨거운 불길이 머리카락을 태우고 내장을 익힐 것 같았다.

나도 이런데 털 달린 짐승은 어떨까 싶어 걱정했지만 천랑호표는 오히려 나보다 멀쩡했다. 하늘을 살라먹을 듯 이글거리는 불길도 천랑호표의 털 한 오라기 그을리지 못했다. 과연 불길 속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데 망설임이 없다 싶더니.

그렇게 불길을 헤치고 들어간 당가타 내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커진 불길이 각종 집채를 삼키고 있는 데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당가 식솔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살짝만 맡아도 머리가 핑 도는 연기가 주변을 자욱하게 메웠다.

독이 불에 약하다지만, 그 독이 불에 타버리는 과정에서 독연기가 발생되는 건 막을 수 없다.

그나마 화약으로 인한 불길이 하늘로 치솟을 정도라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거다.

반대로 말하면 이 안의 독성은 그야말로 위험수위다.

“내 친구를 찾아야 해. 냄새 맡아봤지?”

바닥에 착지한 상태로 천랑호표한테 말을 걸자 녀석이 곧바로 코를 킁킁대더니 어디론가 달렸다.

나는 최대한 숨을 참고 녀석의 등에 매달렸다.

당당을 혼자 보낸 것이 더없이 후회되었다.

고초를 겪은 남해 사람들을 치료해야 한다는 이유로 남는 게 아니었다.

제발, 살아만 있어라.

천랑호표가 독연무 가득한 당가타를 헤치고 달리다가 어느 즈음에서 발을 멈췄다. 그리고 신경이 곤두설 정도로 낮은 소리로 울어댔다.

“거, 거기 누구임―.”

“당당!”

나는 서둘러 천랑호표에서 내려 녀석에게 달려갔다.

녀석은 누군가를 부축하고 있었다.

아니, 녀석이 부축하고 있는 건 하나가 아니다.

“쳇, 뭐야. 누가 구하러 왔나 했더니 네 녀석이냐…….”

“…….”

녀석의 양 어깨에는 당씨 형제가 각각 팔을 걸치고 있었다.

녀석들의 상태는 위중했다.

척 봐도 당당보다 그들, 특히 왼쪽 어깨에 매달리다시피 걸쳐 있는 당랑의 상태가 심각했다.

“금태양, 형님들이 날 구하려다가―.”

“야, 말은 바로 해. 누가 널 구하려고 했냐. 난 그저, 큭―.”

당랑의 몸 여기저기 암기로 인한 심각한 부상들이 눈에 띄었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보랏빛이었고 얼굴의 절반은 짙은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당철의 경우는 당랑보다 나았지만 그의 몸에도 비슷한 중독 반응이 있었다.

두 사람 다 독에 대한 내성을 타고난 당가 직계. 거기에 당철은 그 자체로 독을 뿜어내는 독인이라고 불리는데, 이 두 사람을 이렇게 만들 정도라면.

“당가주는―.”

“시끄럽고. 이놈들이나 빨리 데려가라.”

당랑이 당당의 어깨에서 팔을 빼더니 녀석을 내 쪽으로 밀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형님!”

“저놈, 내가 있으면 안 태울 거다.”

당랑은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몸으로 나를 보고 또박또박 내뱉었다. 아니, 내가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천랑호표를 보고 말했다.

“난 됐으니까 저놈들만 어떻게 안 되겠냐?”

“당랑.”

“당당과 아버지가 얘기하는 걸 들었어. 내가 쌔벼서 팔아먹었던 저놈의 새끼가 네놈에게 있다지?”

당랑이 쓰게 웃어 보였다.

“업보 같은 건 안 믿었는데. 제기랄, 당씨 사내로 태어나 천하제일의 독에 뒈지는 것도 사천당가다운 마지막이겠지.”

그러더니 당랑은 바닥에 넙쭉 엎드렸다. 아니, 쓰러진 건가?

“미안하다. 나는 여기서 뒈질 테니 이 새끼들을 부탁―, 컥!”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나는 어쩔 줄 모르는 당당의 팔을 잡아당겼다. 녀석의 오른쪽 어깨에 매달리다시피 걸쳐져 있던 당철도 받아들어 천랑호표의 등에 올렸다.

“금태양, 형님도!”

“방법이 없어.”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 울다시피 외치는 당당을 잡아끌면서 천랑호표의 등에 탔다.

방법이 없다는 것은 당당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녀석을 데려가고자 하는 건, 시신이라도 건지면 안 되겠냐는 물음이었지만―

쓰러진 당랑을 보는 천랑호표의 눈빛이 지독하게 싸늘했기에, 한 번 자식을 잃었던 이 짐승에게 그 이상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당가타 외부에서 시작된 불길은 어느새 내원까지 번졌다.

이 이상 지체하면 모두가 싸그리 불길에 삼켜질 것이다.

“가자.”

더 이상 미동조차 없는 당랑의 시신을 남겨둔 채 천랑호표가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욱 빽빽해진 불길의 숲을 지나, 우리는 당가타를 빠져나왔다.

불타오른 건물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미리 대피했던 사람들, 남해의 무인들이 구해낸 당가의 식솔들, 그리고 인질로 잡혀 있었던 남해 사람들 중 거동이 가능한 사람들이 어느새 몰려와 일대를 독으로 지배했던 한 가문의 몰락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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