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나는 당당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궁주 또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남해는 곧바로 출진했다. 숫자를 셀 수 없는 맹수들이 밀림 속을 종횡무진하며 달려 나가는 것은 실로 엄청난 광경이었다.
당당은 일 공자와 함께 백호의 등에 올라탔고 나는 궁주의 뒤, 천랑호표의 등에 올라타 미친듯한 속도로 당가를 향해 달렸다.
사실 나는 함께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신생 때문에. 그 아픈 애를 두고 갈 수도 없고, 전장으로 데려가자니 그것도 못 할 짓이었다.
할 수 있는 처치는 다 했고 이제 남은 건 곁에서 상태를 돌보는 것뿐인데도 그랬다.
그랬던 것을 곽 표두와 표사들이 내 등을 떠밀었다.
“신생은 내가 잘 돌볼게. 금 의원님은 갔다 와!”
기억을 되찾더니 훨씬 의젓해진 무도 있었다.
나는 그들을 믿고 당당과 함께 가기로 했다.
녀석이 마음을 정했다. 그렇다면 곁에서 함께 검을 들어주는 것이 친구일 것이다.
“성문이 닫혔군. 어쩔 거냐?”
우리가 반나절을 꼬박 달렸던 거리를 남해의 맹수들은 한 시진 만에 주파해버렸다.
그 중간중간 당가의 방해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정찰대가 우리의 움직임을 알렸는지 성도 성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성벽 위에서 활을 시위에 겨눈 채 경계하고 있는 병사들의 눈에는 불안함이 가득했다.
“성문을 못 올라가서 하시는 말씀은 아닐 거고. 저들이 걱정되어 하는 말씀이시겠죠?”
“그럼. 우리야 무인들을 빌려준 입장이니. 당 공자는 저치들을 아끼지 않나? 우리로서도 앞으로 잘 지낼 수 있다면 일반 성도 사람들을 해치는 건 악수야.”
궁주의 말이 백번 타당했다.
천하오강으로 불리는 그의 무력이라면 사실 저 성문쯤이야 단독으로도 뛰어 올라가 열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생길 인명피해를 모두가 원치 않기에 지금처럼 가만히 있는 것뿐이지.
“당당, 더 시간 끌면 안 돼.”
지금도 성도의 남해 사람들은 당가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고 있다.
그들을 구해야 한다.
그러려면 당가를 둘러싸거나 양동작전을 하는 등 사람이 필요한데, 그 많은 무인들이 들어가려면 눈앞의 성도 병사들을 해쳐야 한다.
“……금태양, 무슨 방법이 없겠음?”
짧지만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민의 시간을 거치고 당당이 도움을 청하듯 나를 보았다.
역시, 아직은 어린가?
“쉽게 생각해.”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것.
사실 원래대로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세상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빼앗아가는 잔혹한 법칙을 갖고 있으니까.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법칙을 부수고 뭉개버린다. 둘 다 가진다.
힘이 있는 사람들은 말이다.
“궁주님. 최정예만 소수 뽑아주세요.”
“침투시키려고?”
“그것도 있고, 일단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은 좀 치우죠.”
무림인에게는 무림인의 방법이 있다.
궁주가 빠르게 열 명 남짓의 무인을 추렸고, 나도 천랑호표의 등에서 내리며 가면을 벗었다.
“엥? 왜 내리냐?”
“왜냐뇨? 올라가야 할 거 아닙니까?”
“최정예만 뽑으라매. 나는 두고 갈 것이더냐? 네 녀석이 나를 아주 하찮게 보는구나. 그리고 그 가면, 쓰면 안 되겠냐? 쓴 편이 훨씬 낫다.”
엥?
물론 실력 순대로 세우자면 남해 최강은 궁주긴 하겠다만, 이런 일에 직접 가겠다고?
와앙. 내가 당황한 사이 천랑호표가 내 목덜미의 옷깃을 물어 다시 제 등에 나를 태웠다.
“내 아들도, 당 공자도 간다. 가자!”
약 열 기의 맹수들이 등에 무인들을 태우고 성벽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오, 온다!”
“쏴라!”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이 화살을 쏴댔지만 그 정도도 피하지 못하는 바보는 없었다.
맹수들은 순식간에 성벽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도약했다.
한 번의 도약에 성벽의 절반까지 뛰어오른 맹수들이 발톱을 세워 그 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다른 맹수들의 경우나 그렇고.
천랑호표는 한 번의 도약으로 성벽 위에 도착했다.
“으아아악!”
“도망치지 마라! 무기를 들고 싸워라!”
성벽 위의 병사들이 우리 쪽을 향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전부 기절시키면 되느냐?”
“기절시켜서 저기 모아두죠.”
우리는, 각자의 무기를 꺼내는 대신 주먹을 우드득 우드득 풀었다.
그리고 달려오는 병사들을 향해 각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하나, 둘.
“으악!”
“컥!”
열하나, 열둘, 열셋.
……
어느 순간 숫자도 세기 귀찮아 빠르게 몸을 움직이는 데 집중했다.
병사들도 해치고 싶지 않고, 빠르게 진입하고 싶다면 이보다 좋은 방법이 있을까.
기절로 인한 후유증이 조금 있긴 하겠지만 죽거나 어디 부러지는 것보단 나을걸?
대충 내 주변의 병사들을 기절시켜 한 곳에 쌓아놓고 보니, 다른 무인들도 성벽에 올라와 똑같이 병사들을 정리했다.
일 공자와 함께 올라온 당당만이 조금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을 뿐이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원래 사람이 힘이 좋으면 머리가 고생을 안 한다.
장차 큰 짐을 맡길 생각이라 머리를 좀 써보게 하려고 했는데, 역시 처음부터 무림인의 방식대로 움직이라고 등을 떠미는 게 나았으려나.
“뭐 하느냐? 여긴 우리가 처리할 테니 후딱 가봐라!”
궁주의 말에 나는 당당과 함께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남해는 곧 성문을 열고 입성할 거다.
그 전에 우리는 당가의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이쪽임!”
당당이 방향을 잡았고 나는 그 뒤를 따라 달리며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사람이 없는데?
물론 이 상황에 누가 밖을 나다니겠냐만은, 도통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문풍지에 손가락 구멍 뚫어서 지켜보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당당, 혹시 성도에 대피소 같은 게 있어?”
“어? 딱히? 그건 왜 물어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마침 뒤에선 육중한 성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가, 난 주위를 확인하고 갈게.”
“나 혼자?!”
“못 갈 건 또 뭐야. 당가주랑 담판을 지으러 갈 거지?”
당당의 눈이 흔들렸다. 녀석은 아직 제 아버지를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럴 경우 보통의 사람은 가장 먼저 대화를 시도한다.
어떻게든 말로 설득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제야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녀석이다. 녀석에겐 아직 그런 과정이 필요했다.
“다른 부분은 내게 맡겨. 가라!”
나는 녀석의 등을 힘 있게 밀고는 방향을 틀었다.
지금껏 달려온 길, 그 어디선가 수상한 냄새가 났다.
“누구냐!”
냄새를 쫓아 달려 벌컥 문을 열자 그 안에는 당가의 무인이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횃불.
그리고 발아래 놓인 것은 그 양을 헤아릴 수 없는 화약이었다.
놈은 나를 보자마자 횃불을 화약에 집어 던졌다. 아니, 정확히는 던지려 했다.
다행히 나의 검이 더 빨랐다.
보통내기가 아니었기에 그냥 횃불을 빼앗거나 하는 것으로 끝낼 수 없었고, 다행히 불티 하나 튀기지 않은 채 상대를 쓰러트리는 데는 성공했다.
문제는, 이게 하나가 아닐 거 같다는 것.
나는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와 궁주를 찾았다.
“뭐냐, 먼저 간 거 아니었느냐?”
성문이 열리고 궁주가 먼저 성도의 대로를 따라 달려오다 내 앞에서 멈췄다.
“맹수들을 물리고 서둘러 무인들을 파견하세요. 당가주가 화약을 심었습니다.”
내 말에 궁주가 움찔하며 서둘러 남해 말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나를 따라 성벽을 올랐던 최정예 무인들이 주변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독은 입마개로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만, 불은 그렇지 못하지. 우리의 밀림은 우기라 불을 붙여도 타지 않을 테니 제 앞마당을 태우겠다는 건가?”
“다른 부분도 조심해야 합니다. 물이라든가 식량이라든가. 독을 탔을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이해를 못 할 바는 아니다. 당가 입장에서야 본진을 침략당하는 거고, 더 이상 수가 없다 판단했을 때 청야전술을 택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 상황에 정작 남해태양궁의 궁주가 이빨을 뿌득 갈았다.
“일대의 안전을 꾀한다는 이유로 일대를 지배해온 자들이 이런 무도한 짓을! 애초에 저들이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아 벌어진 일이 아닌가! 왜 죄 없는 자들이 이런 짓을 당해야 하는 건가!”
궁주의 분노 또한 타당했다.
사실 궁주가 성도에 들어와서 마음을 바꿔먹고 성도를 지배하려 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럴 경우 이건 더 이상 무림의 문제가 아니라 황실이 나서는 일이 되어버린다.
이에 일조한 나나 당당이 역적이 되는 건 물론이요 태양의원도 제국의 동창에 의해 소리소문 없이 지워질 수 있다.
하지만 궁주는 지금 순전히 당가주에 대한 분노로만 가득 차 있었다.
“내 오늘 기필코 당가주를 베고 사천이라는 친구를 구해내리라. 가자!”
화약을 제거하러 나섰던 최정예들이 신호를 보내자 맹수를 앞세운 무인들이 당가타로 달렸다.
중간중간 우리를 막아서기 위해 당가의 무인들이 나섰지만 숫자에서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남해 사람들을 가둔 곳이 어디지! 당가타 밖이라 들었는데!”
우리는 그들을 죽이지 않고 최대한 붙잡거나 기절시켰고, 일부에겐 이렇게 물었다.
“다, 당가타에서 북서쪽에 있는 당가의 장원입니다!”
당가 무인은 우리가 그걸 왜 묻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갑시다! 사람들을 구하러!”
나는 일부러 크게 외치며 앞서 달렸다.
아까와 달리 이 부근에는 어느 정도 인기척이 느껴졌으니까.
이들이 이곳에 온 것은 그들을 죽이고 노예로 붙잡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저 남해와 관련 있는 이들이 무고한 고초를 당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당가주의 잔혹함이 하늘을 찔러서라는 것을 일반 성도 사람들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그래야 이들에게 미래가 있다.
함께 살아가는 내일이라는 미래가.
“비켜라!”
물론 이게 함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인질을 잡아놓고 한 명 정도 탈출시켜서 적을 꾀는 건 아주 전통적인 방법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나, 남해의 궁주다!”
“태양왕이다!”
당가주는 남해의 본대가, 아니 남해의 전력이 전부 인질들 쪽으로 달려갈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고작 이 정도 인원, 이 정도 실력들을 여기 숨겨놨을 것이다.
한 부대 정도가 왔다면 충분히 유의미한 피해를 입혔겠지만 이미 습격을 예상하고 있었던 데다 병력의 차이부터가 너무 심했다.
“상태가 위중한 사람부터 살피겠습니다. 끝날 때까지 이 주변에서 대기해주세요.”
고초를 겪던 포로들을 풀어준 후 나는 본업을 시작했다.
중원어가 되는 남해 무인들이 나를 보조했고 우리는 빠르게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래도 당가의 장원이라 기본적인 의약품들이 갖춰져 있었다는 걸까.
빠르게 그들을 치료하고 안정을 취하게 하며, 나는 당당의 연락을 기다렸다.
아버지와 대화를 해보겠다고 당가로 향한 당당.
녀석이 성공할 거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저 그 자신에게 후회가 남지 않기를.
그렇게 생각하며 처치를 서두르고 있는데 정찰을 나갔던 자들이 돌아오며 외쳤다.
“당가타가 불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