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궁주는 내 추측이 맞다고도, 틀렸다고도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침묵이 곧 답이었다.
그런 이유가 있으니 당가와 섣불리 척질 순 없었을 것이다.
“……본래 남해태양궁은 그리 강한 곳이 아니었다.”
한참 만에 입을 연 궁주는 전혀 엉뚱한 소리를 시작했다.
“거기에 나는 그리 촉망받는 장자가 아니었지. 본래 남해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선 양기가 가득해야 하는데, 나는 기이하게 음기를 타고났다.”
역시, 내 추측이 맞았다.
“하지만 반대였겠군요. 궁주님의 무공이 천하오강으로 꼽힐 정도로 강대해졌으니.”
“그래. 내 안의 음기가 양기를 더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되어 현재의 나에 이르렀지.”
한 가지 기에 치우치면 사람의 몸은 병이 난다.
오대세가가 그렇다. 한 가지 기가 가득하기에 또 다른 기가 허하다. 그 탓에 병이 난다.
기존의 남해태양궁은 오히려 그걸 이용해 양기를 극대화시켜 힘을 발휘했을 거다.
하지만 그 방법은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깨게 만들어준 것이 바로 음기.
“이곳 남해에서는 음기를 보충할 수단이 없지. 그래서 선택한 것이 빙옥단이었다.”
“만약 다른 방식으로 음기를 보충할 수 있다면, 궁주께선 어쩌실 겁니까?”
“네 녀석의 의원에서 빙옥단을 만들어 보낸다는 얘기라면 소용없다. 우리가 시도해보지 않은 줄 아느냐?”
“빙옥단 같은 시시한 걸 거래할 생각은 없는데요.”
나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궁주에게 건넸다.
사실 이걸 이렇게 쓸 수 있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 이건?!”
궁주가 주머니에서 아주 작은 돌 하나를 꺼냈다.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그건, 사실 돌이나 보석 따위가 아니었다.
웬만한 보석도 저것에 비할 수는 없다.
“북해빙궁의 만년설석, 들어는 보셨죠?”
엄밀히 말하면 돌이 아니라 얼음인데 왜 만년빙이 아니라 만년설석인지는 모르겠지만, 통용되는 이름은 그렇다.
북해의 냉기가 모인 음기의 결정체.
“이게 어떻게 네 녀석의 손에?!”
튀어나올 거 같은 궁주의 눈이 만년설석과 나를 번갈아보았다.
크기는 작지만, 빙옥단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지금 만년설석을 들고 있는 궁주의 손가락에 조금씩 서리가 낄 정도니까.
“북해빙궁 주변은 항상 눈으로 뒤덮여 있다지만 만년설석이 함부로 반출이 되는 물건은 아니긴 하죠. 남해태양궁의 태양석처럼 말입니다. 특히 그건 작긴 해도 특상품이니까요.”
“금가장의 교섭력이 북해빙궁에 달할 정도란 말인가?”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 금가장의 힘, 거기에 무도 관련이 없진 않고요.”
“막내가?”
“아까 말씀드렸죠. 무를 구할 때, 함께 있던 여자애가 있다고요.”
무한의 이름을 하나씩 따, 한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아이.
한은 심하진 않지만 음절맥 체질을 갖고 있었다.
그 체질과 신체적 특징 때문에 한이 막연히 북해빙궁의 핏줄을 잇지 않았나 추측을 했고, 서로 의지했던 무가 떠나면서, 한은 자신이 북해빙궁 내의 후계자 승계 문제 때문에 궁 밖으로 빼돌려진 걸 털어놓았다.
“다행히 한의 언니가 북해빙궁주가 되었고, 동생을 찾고 있던 궁주가 태양의원에 친애의 표시로 보낸 겁니다. 저희가 요구한다면 더 넘겨줄 겁니다.”
“그 애와 막내의 인연이 있으니 태양의원을 거쳐 남해로 보낸다 해도 거절하지 않겠군.”
만년설석을 든 궁주의 눈이 빛났다.
이론상, 만년설석의 음기를 꾸준히 흡수할 수 있다면 궁주는 더 강해질 거다.
남해태양궁의 다른 무인들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더해 더 이상 당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도 없어진다.
전서구를 통해 한이 북해빙궁으로 무사히 돌아갔다는 소식과 함께 도착한 만년설석이, 머나먼 남쪽의 판도를 바꿔버린다.
“남해에서 직접 북해빙궁과 거래하시는 건 힘들 겁니다. 거리도 있고 하니 저희가 중개를 해드리죠. 폭리를 취하진 않을 테니 걱정 마시길.”
“하하, 폭리를 취한다 해도 받아야 하는 입장인 걸 몰라서 하는 얘긴가?”
“대신 폭리인 셈 치고,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
“뭔가?”
지금껏 이 얘기를 하기 위해 대화를 끌고 왔다.
“이제 거리낄 것도 없으니, 궁주께선 그간의 부당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당가를 치실 겁니다, 그죠?”
“크흠.”
“그 전에 당당의 얘길 들어주십시오.”
“삼 공자의?”
“당가가 남해와 어떻게 지내기를 원하는지, 녀석이 당가를 대표한다 생각하시고 대화를 나눠주시면 됩니다.”
“나, 나?! 내가?”
당당이 당황하며 물었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녀석을 궁주의 앞으로 떠밀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함?!”
“네 얘기 하라니까.”
나는 당가주가 싫다.
싫다 못해 화가 나고, 신생과 내가 당한 일에 대한 복수심이 끓어오른다.
마음 같아선 내가 직접 목을 베고 그 목을 저잣거리에 걸어 놓고 싶다.
그자가 한 일들을 낱낱이 파헤쳐 전 중원에서 당가의 이름이 욕을 먹는 걸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당당의 아버지다.
당가는 녀석의 집이다.
그 때문에 나는 키를 당당에게 넘겼다.
“나는―.”
“넌 남해랑 어떻게 지내고 싶어?”
당가주가 아니고 차기가주도 아닌 녀석이 남해태양궁의 궁주 앞에서 자신의 뜻을 피력한다는 것.
당당은 아마 이 의미를 빠르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녀석은 그러기엔 아직 어리고 그런 쪽으론 욕심이 없었으니까.
“나도 궁금하군. 당가의 삼 공자, 너는 우리 남해를 어떻게 생각하지? 당가의 다른 구성원이나 성도, 사천의 사람들은?”
하지만 알게 될 거다.
궁주가 당당의 말을 듣는다는 것, 그건 녀석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니까.
“……나는 남해랑 잘 지내고 싶음.”
나는 당당에게 권력을 쥐여줄 거다.
사천당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력. 조금 더 나아가자면 그의 뜻대로 사천당가를 이끌 수 있는 권력.
“무도 있고, 솔직히 싸울 이유가 없음. 당가에서 다루는 독사, 독충 중 남해에서 들어오는 재밌는 녀석들도 많음. 다른 가족들은 남해의 독을 매우 궁금해함. 평생 해온 게 독 공부 아니겠음? 남해의 밀림엔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독이 많은데 그걸 우리가 연구해서 남해가 덕을 본 것도 많다고 들었음.”
“그건 삼 공자의 말이 맞다. 밀림 속 독 연못은 외부인을 막아주는 벽이 되지만 때로 어리거나 약한 남해인이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으니.”
“아버지는 가족 외에는 전부 적이다, 믿지 말라 했지만 솔직히 그 말은 틀렸음.”
궁주가 거들어주자 당당이 보다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왼손잡이라고, 반편이라고 가족들이 나를 내돌렸을 때, 나를 챙겨준 건 성도 사람들이었음.”
집안에서야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았지만 그래도 녀석은 당가의 직계였다. 또한 어렸다. 성도 사람들은 밖으로 나도는 당당을 가족처럼 챙겨주었다.
그랬기에 나와 당당이 사람들을 설득해 당가의 행사를 비판하게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들이 우리가 지켜줘야 할 하찮은 존재고, 그러니 우리가 그 대가를 받는 건 당연하다 했지만 받는 건 나였음. 그들이 없으면 당가도 없음. 싸움이 벌어지면 그들이 큰 피해를 입을 거임. 난 그건 싫음.”
백성이 없으면 임금도 없다, 원론이고 정론이지만 사실 우위를 점한 갑이 그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기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진짜 친구라는 게 있다고 믿음. 금태양이 가르쳐줬음. 남해도 분명 그런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임. 물론 들어보니까 아버지랑 내 형들이 큰 잘못을 했음. 그건 내가 대신 사과를 드리겠음. 나로 대신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하며 당당이 포권을 취해 보였다.
“본인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받아내겠지만, 일단 그대의 사과는 받아들이겠다.”
요식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낫다.
궁주도 제법 예의를 갖춰 당당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내가 녀석을 차기가주로 밀려고 하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남해 입장에서도 당랑, 당철 쌍둥이보다야 당당이 낫겠지.
“앞으로 잘 부탁하네, 당가주.”
“알겠, 음?”
아니, 이 아저씨가?
나는 일단 당당을 차기가주로 밀어 넣어놓고 당가주의 발언권을 약화시키는 등의 방안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괴뢰정부를 만들려고 하네?
물론 나로서도 녀석이 당가주가 되는 게 남해태양궁과의 거래 등을 고려했을 때 훨씬 편리하긴 하지만, 일에는 절차라는 게 있잖아!
“잠시만요, 궁주. 그건―.”
내가 궁주의 말에 딴지를 걸려고 할 때, 밖에서 남해의 무인들이 뭐라 외치며 웬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차림새가 보통의 남해인이 아니라 중원인에 가까웠는데, 얼굴에는 남해인의 특징이 보였다.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어?! 춘삼 아저씨 아님?!”
“당 공자? 공자가 왜 여길―.”
그는 당당이 어릴 적 그를 돌봐줬던 성도 사람이자, 부모 중 한쪽이 남해 사람인, 이번에 궐기했다가 대비하고 있던 당가에게 진압당한 상인.
옷매무새는 엉망진창에 모진 고초를 당한 얼굴을 본 당당의 낯이 시커멓게 죽었다.
“아이고, 궁주님 살려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우리 남해 사람들 당가에 다 죽게 생겼습니다!”
* * *
난리가 났다.
우리가 기회를 만들기 위해 설득했던 사람들은 당가 무인들에게 붙들려 모진 고초를 당했다고 한다.
그걸로도 모자라, 당가주는 이들을 하나씩 참형에 처하기 시작했다.
저잣거리에서 배를 가르고 독을 먹여 오장육부가 녹아내리는 걸 전시했다는 거다.
거기에 그들의 가족들을 억지로 붙들고 와 그 앞에서 이를 똑똑히 보라고 잡아두기까지 했단다.
어지간히 남의 불행을 즐기는 이들도 학을 뗄 만한 잔혹한 행태였다.
누구든 적과 내통하여 성을 무너트리려는 자들은 참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성도 성주의 이름으로 공표되었지만 그 뒤에 당가가 있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성도에는 공포가 번져나갔고, 동시에 불만 또한 팽배해졌다.
남해와의 거래는 당가가 주도해 이루어졌다.
십여 년이 넘는 세월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동안 남해와 밀접한 관계가 생긴 이들도, 혈연으로 묶인 이들도 늘었다.
그런 이들을 이번엔 당가가 처단하는 것이다.
시위에 나서지 않은 이들까지 줄줄이 끌려가기 시작했고 똑같이 지독한 일을 당하기 시작했다.
행방도 모른 채 사라진 이들도 있다고 했다.
춘삼은 가족들이 전 재산을 바쳐 겨우 풀려났고, 풀려나자마자 남해로 달려왔다고 했다.
당가주가 미쳤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어찌할 건가, 당 공자?”
아까 당가주라고 불렀던 건 농담이었던 것처럼 궁주가 다시 당당을 불렀다.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나를 볼 줄 알았는데, 녀석은 두 주먹을 질끈 쥐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금태양, 도움이 필요함.”
“뭔데?”
“빚은 꼭 갚을 테니, 만년설석으로 남해의 무인들을 사주셈.”
녀석의 눈은 굳은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를 막아야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