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핥짝. 핥짝. 핥짝…….
남해를 대표하는 신수답게 그 덩치가 산만 했기에 혓바닥 또한 A4용지보다 컸다.
그런 혓바닥으로 핥았으니, 내 가면이 침 범벅이 되지 않고 버틸 수가 없었다.
허나 신기하게도 가면이 벗겨질 정도로 핥지는 않았다.
“어어?”
몇 번을 핥고 떨어지기에 끝인 줄 알았더니, 이번엔 아예 내게 콧잔등을 비볐다. 부들부들한 털에서 낯익은 냄새가 났다.
……설마?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우연이 지나치다.
하지만 천랑호표의 갈기에서 나는 냄새와 그 색, 느낌은 내가 아는 한 동물의 것과 너무나 흡사했다.
아픈 것을 치료해주었더니 원래 보살피던 진양 누님보다 나를 더 잘 따르게 되어 아예 태양의원에서 살게 된 영물, 금동이.
호랑이인지 고양이인지 모를 그 작은 짐승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대단한 위세를 가지고 있어, 소림에선 산신이라 불릴 만한 터주들을 제 발아래 부렸다.
나는 정신을 잃어서 몰랐지만,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모용갑 앞에 뛰어들어 검기를 막아내기까지 했다고 홍령에게 들었다.
그 정도라면 금동이가 남해의 수호신, 신수라 불리는 이 천랑호표의 핏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궁주, 혹시―.”
내가 천랑호표의 비비적 공격(?)에서 살짝 물러나 궁주에게 질문을 하려는데, 천랑호표가 아예 내 발치에 발라당 배를 까고 누워버렸다.
긁어.
긁으라고.
고양이처럼 가르릉대는 천랑호표가 마치 그렇게 말하는 거 같아서 나는 질문을 하다 말고 엉거주춤 자리에 쭈그려 앉아 천랑호표의 턱을 긁어주었다.
“허허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 금 의원이랬나? 자네 대체 뭔가? 천랑호표는 우리 남해태양궁의 직계들에게도 그런 친밀한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데.”
좀 전까지 호랑이 신랑이라니 가당찮다고 호령을 하던 궁주가 허탈하다는 듯 물었다.
벼랑 끝에 몰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일로 상황이 돌변했다.
무조건 이걸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저야말로 궁금한 게 있습니다. 혹시 천랑호표에게 새끼가 있지 않았습니까? 좀 전에 말씀하신, 잃어버린 남해의 보물이라는 건 천랑호표의 새끼겠고요.”
“그걸 어떻게?!”
됐다.
방법이 보였다. 당당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그 아이도 제가 돌보고 있습니다. 천랑호표는 제게서 새끼의 냄새를 맡은 걸 겁니다.”
쭈그려 앉아서 천랑호표의 턱을 긁다 못해 엉금엉금 기어가 배를 긁어주고 있는 상황이라 솔직히 멋은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궁주를 비롯한 남해의 인물들이 더 경악했을지 모른다.
* * *
당당은 곧 풀려났다.
“야! 괜찮아?!”
당당이 안으로 들어오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녀석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호들갑은. 괜찮음. 별일 없었음.”
녀석이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나는 걱정이 되어서 한참이나 녀석을 앞뒤 위아래로 살펴본 후에야 안도하고 자리에 앉았다.
일 공자가 나와 무를 봐서 큰 해코지를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크흠, 일단 가둔 것은 풀어주었으나, 앞으로의 일은 더 상의해 봐야 할 것이다.”
나와 당당의 눈물겨운 재회(?)를 잠자코 지켜보던 궁주가 헛기침을 하곤 말했다.
사실 궁주로서는 조금 면이 구겨진 일이긴 했다.
지엄하게 당가 직계에 대한 처벌을 선포했는데 천랑호표 때문에 자신의 결정을 번복해야 했으니.
하지만 그만큼 천랑호표가 남해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가 강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던 얘기를 마저 하도록 하지. 그래, 이름이 금동이라고?”
“네. 맞습니다.”
“허허. 말하는 걸 들어보면 그 생김새나 하는 짓이 진정 천랑호표의 새끼인가 보군. 고것이 사라졌을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천랑호표가 무려 석 달이나 끼니를 거르고 울기만 했으니.”
궁주의 한탄에 천랑호표가 늑대와 같이 울었다. 자기 흉보지 말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천랑호표에게는 미안하기 짝이 없어. 그 직전 내 아들이 사라진 탓에 새끼가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알았거든.”
“그게 가능합니까? 남해의 신수인데요?”
“크흠, 새끼를 낳고 본래 일 년여 간은 사람이 손을 대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네. 그건 나와 내 자식들 같은 남해의 직계 혈통도 예외는 아니지. 깊은 숲속 동굴에서 새끼와 함께 지내다가, 새끼에게 독립 연습을 시키려고 내보냈을 때 변을 당한 모양이야.”
“금동이는 사람에게 친숙합니다. 상대를 좀 가리긴 하지만…… 그 때문에 더 쉽게 납치당했나 보군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놈들이 새끼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단순히 팔아버린 것이겠지. 영물을 잡아먹어 내공 증진을 꾀하려는 놈들은 중원에 널리고 깔렸으니.”
궁주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금동이가 나를 만난 것도 행운이지만, 그 이전에 누님을 만나게 된 것도 진정한 천운이었다. 누님이 아니었다면 남해로 돌려보내는 과정에 또 변을 당했을지도 모르니.
“쩝, 새끼는 내 아들놈에게 점지해주려 했건만. 이미 제 곁에 둘 인간을 정한 것 같으니 어쩔 수 없게 됐군.”
궁주가 안타깝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듣자 하니 천랑호표가 새끼를 배는 건 수십 년에 한 번 있는 일이란다. 그리고 자신이 곁에 둘 인간을 스스로 고르는데, 그 곁을 절대 떠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나.
남해태양궁의 직계는 대대로 천랑호표의 친우로 선택받았다. 금동이는 원래 일 공자의 친우가 될 예정이었으나, 사정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소자는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응? 다행?”
“자식의 생존을 알게 된 천랑호표가 기운을 차렸잖습니까.”
일 공자는 궁주와 달리 조금의 아쉬움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진심으로 다행이라 말하고 있었다.
“아직 아버지가 건재하신데 제게 천랑호표가 필요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제 백호도 멋진 녀석입니다. 그보다는 남해의 신수가 예전의 기세를 되찾고, 그 새끼가 다른 곳에서나마 무탈하게 잘 지낸다는 것이 저는 안심입니다.”
이야, 이 녀석 걸물이네.
남해태양궁은 궁주 자리를 세습으로 물려주고 있다. 거기에 이 일대는 중원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아 궁주는 일대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오대세가가 아무리 위세가 높아도 천자의 이름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데, 여긴 그게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것이 되리라 여겼던, 남해의 상징이 전혀 관계없는 타인에게 넘어갔는데도 저런 아량과 포용력이라니.
“쩝,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다만은…….”
반면 궁주는 아직도 아쉬움을 달래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버지 된 입장에서 그 마음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긴 하다만.
“지나간 얘기는 그만하고, 앞으로의 일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궁주, 당가를 어쩌실 겁니까?”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금 남해태양궁은 입장이 좀 애매하다.
남해가 발호한 가장 큰 이유는 당가가 무를 납치해놓고 거짓말을 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는데, 일단 이게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고, 거기에 무도 돌아왔다.
새끼를 잃어 시름시름 앓던 신수 천랑호표가 기운을 차렸고 그 새끼의 행방도 알게 되었다.
물론 사건의 원인은 분명 당가였고, 영영 돌아오지 못할 남해인도 많기에 그 울분을 해소해야 할 필요성은 있지만, 궁주 입장에선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감내하기엔 좀 애매한 상황이 된 거다.
“솔직히 제가 생각하기에, 궁주는 당가를 적대하고 싶지 않았을 거 같습니다만.”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지?”
“궁주의 엉덩이가 꽤 무거우시더라고요. 그래서입니다.”
“…….”
“그게 무슨 망언입니까. 금 의원, 아버지께 사과하십시오!”
궁주는 내 말을 바로 이해한 거 같았지만 남해의 일 공자는 아니었다. 당당 또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으로 얘기한 거임? 나만 이해 못 한 건 아닌 듯?”
“아들이 납치되고서도 한참이나 후에 발호했으니까.”
“금 의원!”
“제 영역의 사람들이 줄줄이 납치됐다고 하면, 남해태양궁이 아니라 우리 태양의원이어도 조사에 나섰을 거고, 원인을 알았다면 그걸 막거나 제재를 가했을 거야. 안 그래?”
“그렇슴. 당가라고 해도 그랬을 거임.”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움직이지 않았어.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는데도 말이야.”
끄응, 궁주가 앓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당가 무인들이 몹쓸 짓을 못 하게 철저히 교류를 단절했으면 그런 일은 더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남해는 그러지 않았고, 그 결과 당씨 형제가 신분을 감추고 남해 일대를 휘저었어. 궁주의 아들이 사라지고, 신수의 새끼가 사라지고 나서, 남해는 일대를 이 잡듯이 뒤졌지만 수확이 없었어. 결국 남해는 당가에게 강력하게 항의했지.”
나는 하오문에서 접한 정보와 조련사에게 들은 얘기,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일들의 시기를 맞춰보았다.
“그때가 대충, 소림의 연등회전이 열리기 직전.”
“잠깐만. 그럼 아버지는 그걸 알고 형님들을?”
“일단 멀리 보내버린 거지. 당장 용의자가 당가에 없다는데 뭐 어쩔 거야.”
내 말이 진실에 근접하다는 것은 궁주의 얼굴만 봐도 알았다.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래도 남해의 항의가 끊이질 않으니, 우리가 잘 교육하겠다 하고 돌아오자마자 근신을 명했을 거고,”
고작 소림에서 망신 좀 당한 거 가지고 몇 달이나 근신에 처할 리 없다.
하물며 그 망신을 시킨 장본인이 남도 아니고, 당가의 막내가 아닌가?
“그동안 당씨 형제가 그 일에 관련이 있다는 흔적을 지웠겠지. 아들들의 비행이 그리 심한 줄 몰랐다 발뺌하면서.”
당가주는 그러고도 남을 작자다.
여차하면 두 쌍둥이를 남해 맹수들의 밥으로 넘겨주고 당당을 차기 가주로 세우는 복안도 있었을 거다.
“아버지, 정말 저게 사실입니까?”
일 공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궁주에게 물었다.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저에게는 수련에 집중하라고, 별일 아니라고 하셨으면서―.”
“빙옥단 때문이죠?”
내가 일 공자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 즉시 궁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안 게냐!”
“오해 마세요, 추측입니다.”
지금까지 좀 민망해도 참았던 궁주가 당황과 분노로 얼룩져 일어날 만한 일이긴 했다.
난 지금 남해태양궁의 가장 큰 비밀을 알고 있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아시다시피 어릴 적 저는 매우 아팠거든요. 낫고 싶어서 의술을 공부했고, 오대세가처럼 체질을 치료하기 위해 무공도 익혔습니다. 그 때문에 체질과 무공의 관계에 대해서 잘 압니다.”
이 변명 오랜만에 해보네. 하지만 크게 거짓말도 아니긴 하다.
“빙옥단은 몸에 냉기를 더하는 영단. 더운 열기가 닿으면 그 효과가 며칠 만에 사라지죠. 거기에 그 재료인 빙설초는 더우면 잘 자라지도 않아요. 당가 정도가 그 약초를 재배할 수 있는 한계선일 겁니다. 남해는 근 십 년간 당가의 빙옥단을 거래해왔죠?”
“……그래, 맞다. 당가 이외의 곳에서 그걸 운송해왔다간 남해에 왔을 때 이미 효과가 사라져 어쩔 수 없었지.”
“근데 왜 빙옥단일까, 저는 그 부분이 의아했습니다. 빙공을 익히는 것도 아니고요.”
남해의 행보는 분명 이상했다.
당가로부터 얻는 이득은 빙옥단을 거래할 수 있다, 그거 하나뿐인데 그걸 잃으면 모든 걸 잃는 것처럼 끝까지 놓지 못했다.
“그래서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죠.”
“그게 뭐임?”
“남해태양궁의 무공을 극성까지 익히려면, 열기가 아니라 되레 냉기가 필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걸 설명할 수 없어.”
보통의 상식으론 이해하기 어렵지만, 무의 완성과 힘을 추구하는 무인이라면 그럴 수 있다.
“어떻습니까, 제 추측이?”